September 16, 2018

“의인은 사자 같이” (The righteous are as a lion)

Preacher:
Series:
Passage: 잠언 (Proverbs) 28:1
Service Type:

“의인은 사자 같이”

(The righteous are as a lion)

9-16-18

본문말씀: 잠언 (Proverbs) 28:1

1 악인은 쫓아 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 (The wicked man flees though no one pursues, but the righteous are as bold as a lion)

<서 론>

저는 오늘 잠언서 말씀을 통하여 성도 여러분과 함께 ‘의인은 사자 같이’ 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기를 원 합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끊임없는 사건과 사고의 현장 가운데 살아 갑니다. 피할수 없는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어려움 가운데 살아갈수 밖에 없는 것 입니다. 세력이 많이 약해지기는 했지만, 지금도 태풍 플로렌스가 노스캐롤라이나와 사우스캐롤라이나를 중심으로 폭풍우를 동반하며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 태풍으로 인해 며칠전부터 150만명의 주민들이 태풍 대피령으로 인해 집을 떠나고 있고, 조지아와 여러 주에선 이 태풍이 방향을 틀어 오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이렇듯 불안의 연속인 것 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에서 잠언서 기자는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 하니라’ 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때로 여러분과 저를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으로 몰아갈수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삶은 진실로 사자처럼 담대할수 있다는 것 입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 그를 믿는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인 것 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상황과 여건을 초월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사자처럼 담대하고 진정한 평화의 삶을 누리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대 합니다.

<본 론>

18세기 부패한 영국 교회를 구한 ‘영적 부흥’의 핵심리더의 한명이었던 요한 웨슬러는 청년시절 저희가 살고 있는 이곳 미국 조지아에 선교사로 몇년간 선교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선교지에서의 사역은 그리 성공적인 것이 아니었고, 그는 결국 영국으로 되돌아 오게 됩니다. 영국으로 되돌아 오는 어느 밤에 웨슬러는 큰 죽음의 공포를 느꼈습니다. 그날밤에 큰 풍랑이 일어 그가 타고 있던 배가 뒤엎어질 위기에 놓이게 된 것 입니다. 그가 죽음의 공포에 질려 있을때 배 갑판 위에 몇명의 사람들이 평화로운 모습으로 함께 조용히 기도와 찬양을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웨슬러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자신은 죽음의 공포에 떠는데, 그 사람들은 평화로운 모습으로 함께 기도하고 찬양을 드렸던 것 입니다. 그들은 모라비안 교도들이었고, 웨슬러가 이들에게서 받은 충격이 그가 마르틴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론을 듣고 나서 ‘마음이 뜨거워졌다’ 는 유명한 영적 각성을 가져오는 개기가 되었다고 사람들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사자같이 담대한 것 입니다. <시편 46편>에서 보면, 고라자손은 이렇게 고백 합니다. “바닷물이 성난 파도를 일으키고 산을 흔들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하지 않으리라” (시. 46:3) 라고. 왜 그는 성난 파도가 일고, 심지어 그 성난 파도가 산을 흔들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할수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그는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시.46:1) 는 것 입니다. 물론, 우리 크리스챤들은 이런 식의 표현에 너무 익숙해 있어서 이런 말에 크게 놀라지도 감동을 잘 받지 않는 것도 사실 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남의 얘기가 아니라, 실제 내 삶에 있어서 어떤 두려운 순간이 올찌라도 그 환난 날에 나의 피난처와 같은 존재가 있고,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믿음을 통해 내가 진실로 깨닫을수 있다면, 또한 경험할수 있다면 여러분은 결코 무덤덤하게 하나님을 생각할수 없을 것 입니다. 그분만이 나의 자랑이요, 그분만이 나의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임을 나는 온 마음과 힘을 다해 고백하고 선언할 것 입니다.

저는 오늘 잠언말씀을 함께 살펴보면서, 이런 몇가지 질문을 해봅니다. “왜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한 것인가?” “왜 악인은 쫓아 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는가?” 그리고 ‘누가 의인이고, 누가 악인인가?’ 라는 것 입니다.

먼저, ‘누가 의인이고, 누가 악인인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로, 사도바울은 <롬.3:23>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모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죄가운데 빠진 존재들 이라는 것 입니다. 아무도 의인은 없다는 것 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10~12) 라고 말 입니다. <둘째>로, 그러나 이런 우리가 ‘의인으로 인정함을 받았다’ 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잘 아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 1:17) 는 것 입니다.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 의인이라는 인정함을 받았다는 것 입니다. 이 믿음은 무엇 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피를 죄에서 구원하는 (화목)제물로 삼으시고 누구든지 그분을 믿으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 (롬. 3:25a/ 현대인의 성경) 라고 사도바울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나의 구세주로 믿음으로서 구원받게 되고, 이렇게 구원받고 죄없다고 인정함을 받게 된자를 하나님은 ‘의인’이라고 부른다는 것 입니다. 그러면, 누가 악인 입니까? 맞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그로말미암아 그의 죄가 여전히 없어지지 않은 사람이 죄인이요, 동시에 악인인 것 입니다. (성경에서는 ‘죄인’과 ‘악인’을 본질상 동일한 말로 사용함) 바로 하나님께서 ‘의인’이라고 불러주지 않으시는 모든 사람이 악인인 것 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이런 구분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원어에서 ‘죄’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면서, ‘죄는 하나님을 벗어난 것’ 이라고 설명하고 있음을 우리는 유의해야 합니다. 마치 ‘화살이 과녁 (target)을 벗어난 상태’ 를 죄라고 설명한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그 과녁이 하나님이라는 것 입니다.

다음의 질문은 “왜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는가?” 하는 점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범죄 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범죄자들의 특징중 하나는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쫓아오고, 붙잡을 것 같은 불안과 공포 가운데 항상 시달린다’ 는 것 입니다. 이것이 정확히 오늘 본문의 선언인 것 입니다. “악인은 쫓아 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한다)” 는 것 입니다. 옛날 우리 어른들은 비록 하나님을 알지 못했지만, 악하게 사는 자를 향해 “너는 감히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바로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고, 하늘과 땅의 선한 이치를 거스렸다는 것 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그만큼 양심의 명령을 따르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일 것 입니다. 그러나, 악인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 본성속에 심어주신 양심 (롬. 2:14,15) 을 어기고 죄를 짓기에 그는 계속해서 불안하고 두렵고 공포 가운데 시달릴수 밖에 없는 것 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집고 넘어갈것은 이 사람의 양심도 모든 사람이 절대적으로 동일하지는 않다는 것 입니다. 착한 사람의 양심과 악한자의 양심이 상당히 차이가 있드시 말 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왜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한 것일까요?” (Why are the righteous as bold as a lion?) 에 대해 살펴보기 원합니다. 저는 다윗의 삶을 통해서 의인의 모습을 발견해 보았습니다.

첫째, ‘양심의 소리를 거스리지 않기 때문’ (Because they shall not against with the sound of conscience) 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를 시작 하면서, 그 당시 하나님의 율법을 가졌으나 지키지 못한 유대인들 뿐 아니라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방민족까지도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죄를 지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롬. 2장).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의 율법을 받지 못한 이방인들까지도 하나님은 그들의 심성 가운데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주셨고,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고 변명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게 된다는 것 입니다 (롬. 2:14,15). 다윗은 이렇게 고백 합니다;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치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자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시. 39:1) 라고.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내 마음에 합한 자”라는 인정함을 받았던 것도 마음의 성실함과 겸손함으로 그의 신앙양심을 따라 온힘을 따라 살아온 이유가 아닐까요?

다윗이 담대할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지 않고 거스리지 않기 때문 입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것 입니다. 의인이 사자처럼 담대할수 있는 것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기 때문 입니다. 솔직히 주위를 돌아보면, 예수 믿고 교회는 열심히 다닌다고 하는데 양심을 어기며 살아가는 교인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진실하지 못하고 탈법과 불법을 저지르며 양심을 헌신짝처럼 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이것이 얼마나 엉터리 믿음인지는 본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아는 것 입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께서 ‘의인’이라고 불러주시는 자의 삶을 살고 있는지 내 스스로 알고 싶다면, 조용히 눈을 감고 성령님을 통해 내 양심의 소리를 들으실수 있는 귀를 주시도록 겸손하게 기도해야 할것 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인정하드시 ‘우리는 내 자신에 관해서는 눈이 멀고 귀가 먹은 존재들’ 이기 때문 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순을 보지 못하기 때문 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듣습니까? 그리고 그 소리에 따라 행동 합니까?

둘째, ‘하나님께서 나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심을 믿기 때문’ (Because they believe in God’s forgiveness for their sins & transgressions) 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모든 죄와 허물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함 받았음을 확신하면서 이렇게 감격적인 고백을 합니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롬. 7,8) 라고. 자신의 죄와 허물을 하나님께 용서함 받은자는 진실로 행복한 자라고 다윗은 고백하는 것 입니다. 제가 의인이 담대한 이유로서 양심을 지킨다고 말씀 드렸지만, 이런 우리의 행위가 얼마나 상대적이고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은 것인지 여러분은 잘 아실 것 입니다. 이사야의 고백과 같이 우리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모든 자랑은 ‘낡고 헤어진 옷’과 같이 초라한 것 입니다. 누가 ‘나는 내 양심을 따라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 살았다’고 감히 고백 할자가 있을까요?그러면, 왜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할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롬. 1:17) 우리를 의롭다고 불러 주시고,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씻어졌다고 인정해 주심으로 용서함 받았기 때문일 것 입니다. 다윗은 비록 하나님께서 그의 충성되고 성령에 감동된 선지자를 통하여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대략 1000여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 주시는 죄 사함의 은혜와 행복을 노래하는 것 입니다. 다윗의 이런 죄사함 받음의 행복함은 그만큼 죄와 세상 앞에서 담대한 자의 삶을 살게 한것 입니다.

그런데, 다윗왕에 비해 오늘날의 성도들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구약에 예언된 모든 구원의 약속을 성취하신지가 2000여년이 가까와 오는 때에 살아가고 있는 것 입니다. 다윗과 시간적으로 볼때 비교할수 없이 복음 안에 감추워졌던 구원의 진리가 드러났고, 영적 성취에서 볼때 구원의 주인공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새언약에 속한 성도의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다윗과 같은 고백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나의 죄와 허물을 완전히 용서해 주신 하나님을 감사와 사랑으로 고백하고 그분 안에서 행복해 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구원의 감격과 감사가 성도의 삶을 지켜주지 못하고, 불만과 불평과 원망과 짜증으로 우리들의 삶은 가득찬 것일까요?

셋째, ‘하나님께서 친히 나와 동행 하심을 믿기 때문’ (Because they are convinced to God Himself accompanying with them) 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의 하나인 <다윗과 골리앗>스토리에서 다윗은 거대한 골리앗을 맞아 싸우러 나가면서 이렇게 확신의 찬 고백을 합니다.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 (삼상. 17:37a) 그리고 다윗을 보고나서 그를 업신여기고 저주하는 골리앗에게 이렇게 담대하게 선언 합니다.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삼상. 17:46,47) 고 말입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는 그의 ‘영적 부흥’이라는 설교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 교인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한바 있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성도들은 그들이 구원받은 것이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신 은혜 때문임을 깨닫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 영적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거부한다면 그는 주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한 것이라 볼수 없고,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자는 영생의 선물을 받을수 없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그리스도의 생명을 통해 소중한 영생을 소유한 많은 성도들이 그의 몸된 교회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입니다.

왜 이런 문제가 발생했는가에 대해서는 사실 복합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신실한 개인의 영적생활의 부족 뿐 아니라 오늘날의 성령의 충만케 하시는 사역과 절대적 영향력에 있어서 제한을 가하고 그릇된 성경해석을 하는 신학적 사조가 팽배해 있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2000년 역사를 통해서 참된 복음의 역사와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난 시기는 언제나 ‘영적 부흥’의 시기였음을 우리는 목격하게 됩니다. 무엇이 ‘영적 부흥’일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심’ 입니다. 그의 영광과 능력이 그의 백성들 위에 충만히 거하시는 것 입니다. 수천년전 시내광야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이 이스라엘민족의 진 위에 거하실뿐 아니라, 교회가 타락과 위기의 순간이 올때마다 마르틴 루터, 존칼빈, 존 웨슬리와 조나단 에드워드 그리고 한반도 땅의 복음이 처음 전해졌던 평양과 세계 여러지역에서 성령을 통한 부흥의 불길은 교회의 역사를 두고 끝임없이 이어오고 있음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계속될 것 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영이 우리 가운데 거하심을 믿고, 또한 그렇게 간절히 사모하는 개인과 믿음의 공동체를 통해서 말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거하시고 함께 동행하심을 믿습니까? 그리하여 하나님 한분만을 믿는 믿음으로 인해 여러분의 삶이 참된 평화와 담대한 용기를 얻고 있습니까?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는 이론의 종교도 철학의 종교도 아님을 믿습니다. 기독교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그의 영 성령의 통치 아래서 살아가는 철저히 체험적인 종교임을 믿습니다. 누가 의인 입니까? 그는 믿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음을 믿는 자 입니다. 그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죄없다고,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사람 입니다. 왜 의인이 사자처럼 담대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을 따라 진실하고 겸손하게 살아감으로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기 때문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실수하고 죄를 범하는 나의 모든 허물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 모두 용서해 주셨음을 믿기 때문 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영, 성령을 통해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심을 확신하기 때문 입니다. 이런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의인의 삶을, 사자처럼 담대함으로 악한 자가 건드리지도 못하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되는 의인의 삶을 모두 사시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간절히 축원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