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ember 23, 2018

“당신이 축복하지 아니하면” (Unless you bless me)

Preacher:
Series:
Passage: 창세기 (Genesis) 32:26~28
Service Type:

“당신이 축복하지 아니하면”

(Unless you bless me)

9-23-18

본문말씀: 창세기 (Genesis) 32:26~28

26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서 론>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축복이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의 말씀을 함께 성경말씀을 토대로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다시말씀 드리면, 우리 크리스챤이 구할 가치가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심히 기뻐하시는 축복이 있는가? 하는 것 입니다. 저는 그것이 분명히 있다고 믿으며,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만이 주실수 있는 축복을 깨닫지 못하고 구하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성도가 있다면 그것만큼 불행하고 안타까운 경우가 또 있는가 자문해 봅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런 하나님만이 주실수 있는 참된 축복을 이해 하십니까? 그렀다면, 그 복을 지금 누리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수많은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뜨거운 감자’ 와 같은 ‘축복’이라는 뜻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바로 이해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수 있는 이 진정한 복을 간절히 구하시고 마음껏 누려 나가시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원 합니다.

<본 론>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먼저 하나님께서는 과연 우리에게 축복하시기를 원하시는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복 주시기를 얼마나 원하시고 기뻐하시는지를 우리는 충분히 알수 있는 것 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보면, 하나님은 6일동안 천지를 창조 하셨는데, 마지막 6일째 첫 인간부부를 창조하시고 나서 이렇게 축복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8) 고 그들을 축보 하셨습니다. 그리고, <창. 12장>에서 믿음의 조상,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그의 본토 친척 아비집에서 부르시고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2절> 에서 이렇게 그를 축복하십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창. 12:2) 하나님은 성경에 수없이 많은 축복을 그의 택한 자녀에게 주시기 원하심을 우리는 확인할수 있는 것 입니다.

그런데 ‘축복’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면, 교회 안에서 사실 '축복'이라는 단어에 대해 대체로 극명하게 갈라지는 두가지 극단적인 두 그룹의 견해를 보게 됩니다.

첫째 그룹은, '축복' 받는 것이 신앙 생활의 유일한 목적인 양 축복을 추구하는 그룹 입니다. 맞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의 복 주시길 심히 기뻐하시는 것 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이 말하는 축복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 입니다. 우리는 이들이 추구하는 축복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냉정하게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소위 '물질' 이나 '건강' '자녀가 잘되는' 것과 같은 내 소원 성취를 복이라고 생각한다는 것 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필요한 줄도 아시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 가운데 이런 우리의 필요를 실제로 채워 주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 이러한 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핵심으로 부르지 않는다는 사실 입니다. 그렇다면, 그 복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알아보기 전에 두번째 그룹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둘째그룹은, '축복'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대단히 부정적인 견해를 가집니다. 주로, 기성세대 신앙의 선배들이 가졌던 '현세기복' 적인 복을 추구하는 신앙행태에 실망하고 거부감을 느낀 청년 혹은 신세대들이 이 그룹에 주를 이룹니다. 그러나, 이 그룹의 문제점은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복'까지고 부정적으로 보고, 거부하고자 한다는 것 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축복이 무언지도 확인하지 않은채 '축복'이라는 단어에서오는 선입관으로 인해 무조건적인 거부감을 가진다는 것 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런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에 대해 무관심 하거나 그것을 거부하는 태도는 어쩌면 현세기복적으로 축복을 무턱대고 추구하는 태도만큼이나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수 있음을 우리는 이해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앞에서 제가 언급했드시 우리의 신앙생활의 본질에는 분명히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복을 추구하고 누리는 것임을 성경은 분명히 강조하고, 그렇게 살아갈것을 도전하고 있기 때문 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오늘 메세지의 핵심은 <무엇이 과연 진정한 복인가>를 이해하는 것일 것입니다. 저는 <창.32장>에 나오는 내용을 통해 야곱이 하나님을 향해 추구한 복이 무엇인가를 살펴 봄으로 이것을 알아 보겠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야곱이 하나님께 진정한 축복을 간구했을때 하나님께서 과연 무엇을 주셨는지를 이해하는 것 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드시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나기 전날밤에 어떤 사람과 씨름 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그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천사이자, 곧 하나님 임을 알수 있습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렇게 야곱이 밤이 맞도록 씨름했다는 것은 <온힘과 생명을 다한 야곱의 하나님을 향한 기도> 라고 결론 내리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야곱은 그 얍곱강가에서 홀로 남은 밤에 하나님께 생명을 건 기도를 드렸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성경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치만,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를 핵심적으로 암시하는 한문장이 기록됨을 우리는 감사와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것 입니다. 그것은 이것 입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v.26b) 는 것 입니다. 바로 ‘축복’이라는 것 입니다. 야곱은 자기 스스로 쟁취한 축복도 아니요, 세상의 그 누군가가 주는 축복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수 있는 복을 온 밤이 새도록, 환도뼈가 위골이 될찌라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구했다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은 야곱이 구한 축복에 응답하신 것일까요?(How did God response to Jacob’s prayer for ‘blessing’?)

첫째, ‘그의 존재를 바뀌어 주심으로’ (God responded to Jocob’s prayer by changing his character totally) 입니다: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해 생각함에 있어서 가장 먼저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야곱이 과연 무엇을 간절히 구했을 것인가? 하는 것 입니다. 만약 성도 여러분이 본문의 야곱이 되어 본문의 얍복강가에서 홀로 남아 간절히 하나님께 구했다면 무엇을 구할것 같습니까? 과연 야곱은 무엇을 간절히 원했을것인가 하는 것 입니다. 저는 그것은 바로 ‘형 에서가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에서 부터 구원 받는 것’ 이 아닐까 생각 합니다. 야곱은 지금 이 순간 그 어떤것보다 형 에서로 부터의 보복과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로 부터 구원 받기를 간절히 원했을 것임을 믿습니다. 만약, 그가 구한것이 여전히 ‘더 많은 소와 양과 염소’라면, 그리고 ‘더 많은 자식들’과 세상 권력이라고 추측한다는 것은 매우 비논리적임을 우리는 쉽게 이해할수 있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몇시간 후 날이 새기만 하면 형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쫓아와서 자신과 가족들을 보복하고 죽이는데 도데체 더 많은 소떼와 양떼가 무슨 의미가 있고, 더 많은 물질과 소유의 넉넉함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 입니까? 그것은 넌센스 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하며 “ ~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v.26b) 라고 끝까지 그를 놓치 않았을때, 그와 씨름했던 사람의 첫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v.27a) 는 것 입니다. 야곱이 대답하기를 “(저는) 야곱 입니다” (v.27b) 라고 대답 했을때 그는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 ” (v.28a) 라고 말 입니다. 그가 야곱의 이름을 바꿔준 것 입니다. 다시말해,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바꿔주신 것 입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스라엘’이 무슨 뜻 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 이라는 뜻 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뜻 입니다. 사람 스스로는 감히 선언할수 없는 뜻 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렇게 불러 주실때 가능한 엄청난 이름 입니다. 야곱이 형의 복수에 두려워서 하나님께 축복을 간구했을때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하신것은 야곱의 이름을 바꿔 주셨습니다. 그에게 ‘안심하라, 걱정하지 마라, 내게 너를 지켜 주겠다!’ 고 약속하시는 대신 그의 이름을 바꿔 주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름을 바꿔 주신다는 것은 그의 전 존재가 바뀐다는 것 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람과 사래의 이름을 바꿔 주셨드시 말 입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을 받는 근본적인 출발점은 <내 소유의 변화가 아니라 존재의 변화>임을 야곱의 이름을 바꿔주시는 하나님의 응답에서 볼수 있는 것 입니다. 형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고 평생을 통해 빼앗고 쟁취하며 살았던 야곱을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로, ‘하나님의 황태자’ 로 살아가게 되는 이스라엘로 근본적인 존재의 변화를 시켜 주시는 것 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추구하게 함으로 (God responded to Jocob’s prayer by let him pursuing Him) 입니다: 야곱과 밤새도록 씨름했던 사람이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바꿔 주었을때, 그는 반대로 그 사람의 이름을 묻습니다.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v.29) 야곱은 왜 그의 이름을 묻었으며, 왜 그는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주는 대신 야곱을 축복한 것 일까요? 이 말씀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여러 신학자들의 견해를 보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천사일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고 해석 합니다. 왜냐하면, 그 다음 구절에서 야곱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기 때문 입니다. “ ~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v.30b) 고. 그렇다면, 중요한 사실은 지금까지 야곱의 삶에서 그에게 나타나셔고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번이 처음이었는가 하는 점 입니다. 아닙니다. 그동안 하나님은 여러번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와 평생을 통해 함께 동행하고 그를 지켜주실것을 약속 하셨습니다.특별히 형 에서를 피해 처음으로 부모를 떠나 외삼촌 라반에게 가고자 어떤 광야에서 돌 베개하고 잠들었을때에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셔서 사닥다리가 하늘에 닿는 꿈을 통해 그를 언제 어디서나 지키시고 축복하실 것을 약속하셨던 것 입니다 (창. 28:10~22). 그뿐 아니라, 외삼촌 라반이 지낸 20년간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고비때 마다 나타나셨고 특히 그가 라반을 떠날 시기가 되었을때 하나님은 다시 나타나셔서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창. 31:3) 고 명령하시고 약속 하셨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러나, 오늘 얍복강가에서 야곱이 하나님과 죽을 힘을 다해 기도하는 순간이 오기까지 그는 한번도 진지하게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라고 질문하지 않았던 것 입니다. 야곱이 자기와 씨름한 분의 이름을 묻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야곱이 비로소 하나님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은 여러번 그의 삶의 중요한 순간에 나타나셔서 약속하시고 함께 하셨지만 그는 깨닫지 못한 것 입니다. 그가 관심가진 것은 자신의 꿈과 야망과 성공과 소유의 넉넉함 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조상의 하나님일 따름이요, 내가 필요할때 도움을 요청하는 하나님이었던 것 입니다. 그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 야곱은 정식으로 자신의 이름을 바꿔주시는, 자신의 존재를 변화시켜 주시는 그분의 이름을 떨림과 겸손 가운데 묻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라고. 이것은 야곱이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영성 각성임과 동시에 그분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되었음을 뜻 합니다. 존 칼빈은 오늘 본문말씀을 이렇게 주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친히 격토장에 내려 오신다 ~ 주님은 좌측 손으로 우리를 상대하시고, 우측 손으로 우리를 도우신다” 라고. 지금까지 야곱의 씨름이 자기 자신과 그리고 주위의 사람들과의 씨름이었다면, 이제부터의 씨름은 하나님과의 씨름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 이 하나님과의 씨름은 하나님을 향한 추구를 뜻 합니다. 지금 심각한 형 에서를 만나야 되는 두려움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삶의 문제도 그 해결점은 사람도 환경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을 추구함속에서 시작됨을 야곱이 영으로 깨닫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 진정한 축복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통해서’ 비롯되는 것임을 이 밤에 깨닫았기에, 그 어떤 것도 아니고 야곱은 하나님을 간절히 추구한 것 입니다.

셋째,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됨으로 (God responded to Jocob’s prayer by reconciling the relationship with Himself) 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마지막으로 살펴보아야 할것은 성경의 기록대로 하나님께서 야곱을 축복하셨다면 (v.29) 그에게 어떤 변화가 나타났는가? 하는 점 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기록을 통해 파악할수 있는 변화는 다음의 몇가지 입니다. 첫째, 야곱이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둘째, 밤새 씨름한 사람이 야곱의 환도뼈를 침으로 뼈를 다쳐서 절룩거리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 (아마도 그의 평생동안) 셋째, <창.33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야곱이 이상스러울 만큼 내적인 변화를 가져 오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형 에서를 대하는 태도에 나타나 있습니다. “ ~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창.33:10) 라고 말 입니다. 이런 야곱의 고백은 무엇을 뜻할까요? 지금 야곱은 형에게 아부하는 말로 그의 마음을 돌리고자 노력하는 것일까요? 그렇치 않습니다. 이것 뿐 아니라, 그 뒤에 이어지는 야곱의 삶에서 더 이상 과거의 움켜잡고 빼앗던 모습은 발견할수 없는 것 입니다. 그는 이스라엘로 바뀌었기 때문 입니다.

그의 이 극적인 변화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제가 지난시간 성 어거스틴의 고백을 통해 말씀 드렸드시 우리 인간의 참된 평화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기 전까지는 불가능한 것 입니다. 나의 진정한 영혼의 만족과 안식은 오직 하나님과의 옳바른 관계를 맺음으로서 시작되는 것 입니다. 이것이 바로 얍복강가의 밤을 새우며 야곱의 내면에서 벌어진 신비한 변화의 핵심임을 저는 믿습니다. 야곱이 이 밤에 그토록 간절하게 하나님께 구했던 축복은 단순히 그의 목숨을 건지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그는 깨닫았던 것 입니다. 그 축복은 어쩌면 그가 죽느냐 사느냐가 아니라, 삶과 죽음을 초월한 하나님 안에서 누리게 되는 진정한 안정감과 구원되는 것임을 저는 믿습니다. 이것이 왜 그가 형을 보고 하나님의 얼굴을 본것 같다고 고백한 이유인 것 입니다. 이것은 아부하는 말이 아니라, 형이 자신을 죽이든지 살리든지 관계없이 더 이상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없이 형을 대할수 있게 되었기 때문 입니다. 야곱은 그 무엇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평화의 축복을 그에게서 빼앗을수 없다는 것을 깨닫았기 때문 입니다. 죽음까지도 말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런 축복을 이해하십니까? 그리고 이것을 누리십니까?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현재 어떤 축복의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복의 개념이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복과 일치하고 있다고 믿습니까? 저는 오늘 말씀을 마치며 다시한번 성도 여러분의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축복을 한사람도 놓치지 않고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한가지 우리가 야곱을 통해 배울수 있는 축복의 순서에서 그 진정한 하나님의 복은 먼저 ‘나의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의 순간’을 통과해야 함을 보게 되는 것 입니다. 내 자아와 육신의 자랑이었던 환도뼈가 부러졌을때 나는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깨닫게 되는 것 입니다. 내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을 추구할수 없고 그 안에서 성령을 통해 주시는 평화와 생명을 경험할수 없는 것 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고백 합니다. “ ~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 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고후. 12:9) 바울은 자신의 약한 것들과 고난을 자랑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그가 약할 그때에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강함을 경험했기 때문 입니다. 야곱과 같이 사도바울도 인간적인 환도뼈가 부러졌을때 역사 하시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능력을 경험했기 때문 입니다. 바라기는 얍복강가의 그 절망적인 밤에 야곱을 만나주시고 그를 축복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동일하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의 삶 가운데 이루어지길 소원 합니다. 그 어떤 상황이나 소유의 변화가 아니라, 복의 근원대신 하나님을 추구하고 그분과의 옳바른 관계를 회복함으로 존재의 본질적 변화를 경험하는 진정한 축복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충만함으로 경험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간절히 기도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