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ober 18, 2020

“참된 예배” (I) (The True Worship)

Preacher:
Series:
Passage: 요한복음 (John) 4:23~24
Service Type:

“참된 예배” (I)

(The True Worship)

10-18-20

본문말씀: 요한복음 (John) 4:23~24

23 아버지께 참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Yet a time is coming and has now come when the true worshipers will worship the Father in spirit and truth, for they are the kind of worshipers the Father seeks.)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God is spirit, and His worshipers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설교 요약]

            저는 오늘 우리 크리스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한가지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그것은 ‘예배’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소요리 문답>의 첫번째 ‘질문’은 “인간의 근본목적은 무엇인가?”이고, 그 <대답>은 “인간의 근본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오직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다” 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이 짤막한 인간의 삶의 목적에 대한 정의가운데, ‘무엇이 참된 예배인가?’가 깊이 녹아 들어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한 사마리아여인과의 대화 가운데 무엇이 진정한 예배인지를 밝히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이 합당하게 받으시는 예배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영 (in spirit)고 진리 (in truth)로 예배하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먼저 무엇이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인지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존 맥아더>목사가 그의 설교 “The kind of worship God desires”에서 <4가지 합당치 못한 예배들>가 무엇인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 4가지 예배일까요?” (What are the four kinds of worship that are not acceptable to God?)

첫째, “거짓신들에 대한 예배” (It is worship of false gods)입니다: 모든 율법의 기초가 되는 십계명의 첫째 계명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출. 20:3)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거짓 신들과 우상과 그 영광을 나누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둘째, “참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형태의 예배” (It is worship of the true God in a wrong form)입니다:  <출애굽기 32>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을 만들고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출. 32:4)라고 외쳤습니다. 금송아지 우상이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참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잘못된 형태의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셋째, “참 하나님에 대한 자기방식의 예배” (It is worship of the true God in a self-styled way)입니다: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제사에 쓸 향로에 지시하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분향하다가 불이 나아 죽게 되었습니다 (레. 10:1~2).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자기 스타일의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넷째, “참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마음’의 예배” (It is worship of the true God with a wrong heart)입니다: 예수님 당시 제사장들의 제사는 형식은 별 문제가 없으나, 중심이 빠진 예배였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도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 (호. 6:6)라고 하나님은 중심은 빠지고 형식만 남은 예배를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진리의 지식으로, 그리고 마음의 중심으로 그분을 사랑하여 영으로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오늘 우리 크리스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한가지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그것은 ‘예배’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는 실로 우리 크리스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씀 드림에 있어서 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크리스챤의 모든 신앙활동의 출발이자 마침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 크리스챤이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이 바로 이 예배에 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챤의 신앙을 가장 잘 정의하고 요약한 <신앙고백>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소요리 문답>의 첫번째 ‘질문’과 ‘대답’ 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질문> “인간의 근본목적은 무엇인가?”; <대답> “인간의 근본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오직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다” 라고. 인간이 살아가면서 추구해야 할 가장 중심적인 삶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짧은 정의가운데, ‘무엇이 참된 예배인가?’에 대한 심오한 의미가 녹아 들어가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저는 이번 주와 다음 주, 두번의 설교를 통해 ‘과연 무엇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함께 묵상하고, 깨닫아 나감을 통해 참된 예배자로 한층 더 나아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배경이 되는 <요한복음 4장>을 시작하면서, 어느 날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고 계셨습니다. 그 당시 유대지방에서 갈릴리로 가는 길은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여 나 있었습니다. 만일 사마리아인들과 마주치고자 아니 하려면, 요르단 지역으로 상당히 우회해야 하는 길을 택하지 않고는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가는 다른 길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수가’라 불리는 마을에 이르러 거기 <야곱의 우물>이라는 우물에 정오쯤 되어 도착하셨습니다. 주님은 오랫동안 길을 걸어 오신지라 피곤하셨고, 목도 마르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 우물가에 앉으셨고, 그 때 사마리아 여자 한사람이 물을 길러 왔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듯이 이 여인은 우연히 주님과 마주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 여인을 만나실 줄을 그의 신적 능력을 통해 이미 아셨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 수가성을 통과하시고자 했던 주님의 주된 이유도 바로 이 여인을 만나고자 하심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그분의 ‘신적 약속’ (Divine appointment)으로 말입니다.

여러분이 대부분 기억하듯이 이 여인은 주님과의 대화 가운데서 주께서 자신의 과거를 정확하게 맞추시는 것을 보고 선지자로 생각합니다. 그리고나서, 그녀의 관심은 갑자기 ‘예배’로 옮겨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보니 (당신은)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v.19~20)라고 말입니다. 이 여인이 질문하고자 핵심은 ‘우리 사마리아인들의 조상들은 이 그림심 산에서 예배했고, 당신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했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은 과연 어느 산에서 드리는 예배를 받아 주시는 겁니까?’ ‘어느 쪽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짜 예배입니까?’라고 그 여인은 주님께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 여인의 자신과 자신의 민족 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하나님은 어떤 예배를 기뻐 받으시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놀라운 대답을 하십니다. “여자여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v. 21,23).

주님은 장소가 진정한 예배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신령과 진정’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영’ (spirit) 과 ‘진리’ (truth) 로 드리는 예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영과 진리로 예배드린다’는 뜻일까요? 여기서 ‘영’은 ‘신령’ 혹은 ‘성령’이라고 해석 되기도 하고, ‘열정, 마음, 중심’이라고 의미 되기도 합니다. 거기에 비해, ‘진리’는 ‘진정’ 혹은 ‘말씀의 지식과 진리’라는 의미가 됩니다. 마음의 중심과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진리를 가지고 드리는 예배가 ‘영과 진리’의 예배인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좀더 구체적으로 무엇이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인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에 대해 살펴봄에 있어서, 우리 성도가 취할 수 있는 지혜로운 방법의 하나는 역설적으로 ‘무엇이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치 않는 예배인가?’를 확인해 보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저는 <존 맥아더>목사가 그의 설교 “The kind of worship God desires”에서 탁월하게 밝히고 있는 <4가지 합당치 못한 예배들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 4가지 예배일까요?” (What are the four kinds of worship that are not acceptable to God?)

첫째, “거짓신들에 대한 예배” (It is worship of false gods)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왕의 압제에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시고, 모세를 통해 모든 율법의 기초가 되는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그 내용이 잘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데로 이 십계명의 <첫 계명>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출. 20:3)고 명령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외의 다른 신은 누구일까요? 그것은 거짓 신들입니다. 왜 거짓 신입니까? 그 이유는 오직 성경의 <여호와 하나님>만이 홀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이외의 다른 모든 신은 ‘단지 인간이 돌이나 나무에 조각한 생명없는 상상의 신’이거나, ‘조각한 우상 배후에서 인간을 조정하는 타락한 영’ 즉 ‘사단 마귀’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다른 신들’은 거짓이요 참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그럼으로 ‘거짓 신들을 향한 예배’는 결코 하나님이 받으실 수도 없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시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거짓신과 헛된 우상에게 자신의 영광을 나누지 않으실 것임을 분명히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사. 42:8) 하나님께서 그 분의 백성들이 거짓 신들에게 행하는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제가 더 설명할 필요조차도 없을 것입니다.

둘째, “참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형태의 예배” (It is worship of the true God in a wrong form)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거짓 신들이 아니라 참되신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만 한다면 문제가 없는 것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그 근본이유는 하나님이 까다로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너무도 빨리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악에 물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은 그의 크신 능력으로 모세를 통해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 왕의 바로의 압제에서 구원해 내시고 시내산에서 그분의 선하신 십계명을 돌판에 새겨 주셨음을 <출애굽기 20장>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2장>에서 무슨 사건이 벌어졌습니까? 바로 ‘금송아지’사건입니다. ‘금송아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금으로 만든 송아지 우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 사실은 무엇인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그것은 백성들의 요구대로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그들이 그것을 이렇게 소리쳤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출. 32:4)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입니까?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백성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서 그것이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사실 <출. 20장>에서 이들이 하나님께 십계명을 받고나서 <출. 32장>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기 까지는 결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 사이 이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모두 잊어버린 것일까요? 하나님은 십계명의 두번째로써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창. 20:4~5)고 분명히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민족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을 자신들을 애굽에서 구원한 참 하나님이라고 예배한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예배는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존 맥아더>목사는 이것을 “이러한 인간 내면의 하나님은 사람들이 편안하게 느끼는 하나님이다. 이런 예배는 이들의 변질된 영적 직관이 만들어 낸 것이다”라고. 이들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느낌이나 생각에 좋은데로 편한 하나님을 만들어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이런 잘못된 형태의 예배를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열정’의 영은 있으나, ‘말씀’의 진리가 없는 사마리아인의 예배인 것입니다.

셋째, “참 하나님에 대한 자기방식의 예배” (It is worship of the true God in a self-styled way)입니다: 모세의 형인 아론과 그 아들들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제사장직을 수행하도록 명하셨습니다. <레위기서 8~9장>까지 그들을 제사장으로 위임하는 내용이 자세히 잘 나와 있습니다. 요는 이들을 성결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즉 예배를 드림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도록 영육 간에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 장 <레위기 10장>에 안타까운 일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각 하나님 앞에서 제사에 사용할 향로를 가져다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했던 것입니다. 그 다음 상황을 말씀은 기록합니다.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레. 10:2) 나답과 아비후는 참되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하심을 따라 올바른 제사를 드리지 않고 자기 스타일로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잘못된 예배방식을 나답과 아비후처럼 즉각적으로 심판하지 않으시는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선하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예배 드린다고 하면서도 그분의 명령을 무시하고 얼마나 내 방식과 내 기준을 따라 신앙생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내 방식의 잘못된 예배를 드릴 때 마다 하나님의 불이 나와서 우리를 심판하시지는 않는다 할찌라도 이런 예배는 하나님께서 결코 기뻐하시지도 받으시지도 않는 예배라는 것입니다.

넷째, “참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마음’의 예배” (It is worship of the true God with a wrong heart)입니다: 우리는 몇 주전에 ‘종교인화’ 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이것을 ‘바리새인화’ 되었다고 표현함을 우리는 잘 압니다. 왜냐하면, 특별히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을 무섭게 꾸짖으셨기 때문입니다. 왜 입니까? 그들의 ‘겉과 속이 다른 모습’ 즉 ‘위선적인 삶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정확히 바리새인과 제사장처럼 ‘지식은 있으나 마음이 빠진 자’의 예배임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구약성경으로써 말라기 선지자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400여년전에 기록한 <말라기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습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찐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찐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찐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말. 1:6) 하나님의 이스라엘 제사장들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는 제사의 형식이나 방법에 관한 것이 아니라, 마음과 중심에 관한 것입니다. 제사의 형식과 방법은 나무랄데가 없는데 중심이 빠진 예배를 하나님은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도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 (호. 6:6)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진리는 있으나, 영이 없는 예배’인 것입니다. 지식은 있으나, 마음의 중심과 열정이 빠진 바리새인의 예배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어떤 예배입니까?

우리는 다음시간에 계속해서 ‘어떻게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를 삶으로 드릴 수 있을 것인지를 함께 묵상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설교를 마무리하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에 대한 한가지 분명한 말씀의 기준을 나누기 원합니다. 우리가 지난 주 큐티했던 말씀 중에서, 다윗의 <시편 24편>에서 그는 이렇게 질문하고 또한 대답합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하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시. 24:3~4)라고. 곧 겉의 손을 깨끗이 할 뿐 아니라, 속의 마음까지도 깨끗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예배하는 자로 설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소유할 뿐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한 자가 참된 예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누가 참된 예배자입니까? 그는 구원받은 자입니다. 구원받은 자가 예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가 모두 참된 예배자는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참된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더욱 깨끗한 손으로 진리를 알아 나가고’ 더욱 청결한 마음으로 영에 충만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거룩하심을 깨닫아 나감으로 참된 예배자로 나아가는 복된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Topi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