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ober 11, 2020

“인간의 행복” (The Happiness of Man)

Preacher:
Series:
Passage: 로마서 (Romans) 4:6~8
Service Type:

“인간의 행복”

(The Happiness of Man)

10-11-20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4:6~8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David says the same thing when he speaks of the blessedness of the man to whom God credits righteousness apart from works:)

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Blessed are they whose transgressions are forgiven, whose sins are covered.)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Blessed is the man whose sin the Lord will never count against him.”)

[설교 요약]

            모든 인간은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세상 그 누구도 행복을 거부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누가 행복한 자라고 불릴수 있는 사람일까요?

제가 여러분과 함께 깨닫기 원하는 것은 선하신 하나님의 눈 앞에서 과연 누가 행복한 자인가를 이해하기 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4장>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게 된 아브라함을 예를 들어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본문 <6절>에서 사도가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라고 말한 것은 ‘율법’을 비유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의 모든 요구를 다 지키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하나님께 인정함을 받은 다윗의 행복에 대해서 인용한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사도가 강조하는 바는 우리 크리스챤의 진정한 행복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연, “무엇이 하나님께서 행복한 자라고 불러 주시는 삶일까요?”

  • <첫 걸음>은 “죄사함을 받는 것” (There are the lives to be forgiven of their sins)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행복의 첫 출발은 하나님으로부터 죄용서함 받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v.7~8)는 다윗의 행복한 고백은 곧 우리 모든 크리스챤의 고백인 것입니다.
  • <둘째 걸음>은 “하나님과 평화하는 것” (There are the lives to be peace with God)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롬. 5장>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진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롬. 5:1/ 새번역)라고. 그러나 ‘하나님과의 평화’는 내가 구원받았다고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하심을 받음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 <세번째 걸음>로는,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 (There are the lives to joy in God)입니다;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롬. 5:11)고 사도는 또한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즐거움을 선언합니다. 이 즐거움은 본질적으로 독생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시는 성부의 영원하고 온전하신 즐거움인 것입니다 (요. 17:26). 아들 안에서 그 즐거움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죄사함 받은 구원의 감격 가운데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그분 안에서 즐거워하는 이 행복한 자녀의 삶을 누리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성도 여러분은 행복하기 원합니까? 아니, 솔직히 행복해지기를 윈치 않는 사람이 세상에 누가 있을까요? 사실 ‘행복’이라는 말만큼 인간의 가장 근원적이고 포괄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욕구가 또 있을까요?! 그것이 긍정적인 의미든, 부정적인 의미든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의 대표적인 것이 ‘행복해 지고자 하는 욕구’라고 정의할 수 있겠지만, 그 행복을 추구하고 성취하고자 하는 그 방법은 너무도 다양할 것 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보기에 그것은 자신을 파괴하고 불행으로 치닫는 것이 불보듯 뻔한데도 본인은 행복해지고자 그렇게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까지도 우리는 안타깝게 보곤 합니다. 이처럼 행복에 대한 구체적 정도, 그리고 그 행복을 성취하고자 하는 실천방법도 실로 다양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 저와 행복에 대한 이해와 기준이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을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제가 이 시간 진정으로 관심가지고 함께 이해하기 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세상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유일한 창조주 하나님은 ‘과연 누가 행복한 자라고 불러 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진정으로 여러분과 함께 깨닫기 원하는 것은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그의 독생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은혜를 허락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의 눈 앞에서 과연 누가 행복한 자인가를 이해하기 원하는 것입니다. 생명과 지혜의 주인되신 하나님이 ‘행복한 자’라고 인정하시면 그가 참으로 행복한 자가 아니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진정한 행복을 깨닫아가며, 그 분으로부터 행복한 자라고 인정함을 받는 복된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4장>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게 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예를 들어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를 범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지만 (롬. 3:23)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3)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게 된 아브라함의 ‘의인’으로서의 상태를 밝히고 나서, 이런 흥미로운 진술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일을 하는 사람은, 그가 받는 품삯을 은혜로 받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당연한 보수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경건하지 못한 사람을 의롭게 하여 주시는 분을 믿는 사람은, 비록 아무 공로가 없어도, 그 믿음이 의로움으로 안정을 받습니다” (롬. 4:4~5/ 표준새번역) 라고. 그러면, 사도는 바로 앞절에서 어떻게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하나님께 인정함을 받을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고 나서, 갑자기 왜 ‘일하는 자가 품삯으로 받게 되는 보수’에 대해 비유로 설명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비유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구약의 유대인 뿐 아니라 신약의 모든 성도가 믿음의 최종적인 목표로서 추구하는 것은 ‘구원 받는다’는 뜻이요, ‘영생을 누리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는 ‘구원’을 설명하기 위해 ‘왜 일하는 자의 받는 품삯’을 예로 설명한 것일까요? 그것은 ‘율법’ 때문입니다. ‘율법은 그 요구를 지킴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입니다. 이 율법은 하나님의 선하고 의로운 법이지만, 문제는 죄에 속한 인간은 이 율법의 요구를 모두 지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모세가 <신명기서>에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신. 27:26/ 갈. 3:10) 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누구도 행위로 율법을 만족시킴으로 의롭게 될 자가 없으며, 그럼으로 구원받을 자가 없다는데 우리 인간의 딜레마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가 ‘일하는 자가 받는 품삯’을 예로 든 것은 <만약 우리 인간이 행위로 율법의 요구를 모두 지킬 수 있다면, 그 대가 즉 ‘품삯’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안타깝게도 어떤 인간도 율법을 만족시킬 수 있는 자는 없다>라고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이것이 이어지는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v. 6)라고 다윗의 글을 인용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왜 복이 있다고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v. 7~8)는 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이 진실로 행복해하는 이유는 막강한 왕의 권력을 가졌기 때문도, 물질적인 풍요도, 건강도 아니고,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죄가 하나님의 죄에 대한 진노로부터 가리워지고, 죄 용서함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진실로 감격하고 행복해하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여기에서 성도 여러분에게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의 행복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진정으로 감격하고 즐거워하게 되는 행복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물론 제가 오늘 말씀의 서두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우리는 인간의 숫자만큼이나 각자 다양한 행복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저는 잘 압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 행복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곳에서 출발해야 함을 저는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가 ‘다윗의 행복’을 소개하는 이유입니다. 다윗의 행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일한 것이 없는 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행복’이요, ‘죄 용서함 받은 자의 행복’인 것입니다. 다윗은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천여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지만, 하나님을 믿는 순전한 믿음을 통해 그의 죄가 용서함 받았음을 성령의 충만하심 가운데 깨닫았던 것입니다.

아니, 다윗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서 오늘 본문이 포함된 <로마서 4장>의 중심인물, 아브라함의 경우에서도 동일하다고 사도 바울은 진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았을 때 (창. 15:6)에 진정으로 행복한 자가 되었다고 사도 바울은 주장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행복한 자가 출발이라 믿습니다. 그렇다면 좀더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무엇이 행복한 자의 삶인가?”에 있어서 그 <첫 걸음>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는 것” 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를 우리는 <창세기 1~3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연만물을 창조하시고, 더욱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셔서 인간이 살아가기에 부족함이 없는 ‘기쁨과 행복의 동산,’ 바로 ‘에덴동산’에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첫 인간부부는 그 에덴동산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행복을 지속하지 못하고, 불행한 삶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왜일까요?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 열매를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이 죄입니까? 그것은 단순히 선악과 열매를 먹었느냐? 먹지 않았느냐? 이전에 아담과 하와의 마음 가운데 싹튼 하나님을 향한 불신임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하나님은 내가 이 선악과 열매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전능한 존재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이 열매를 못 먹게 한 것이 아닐까?’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고, 마침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의 상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 즉 ‘불신’ (不信/disbelief, distrust)이 죄라고 분명히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아브라함이나 다윗 뿐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믿는 순전한 믿음을 통해 그분을 불신했던 무서운 죄에서 용서함을 받는 것은 바로 그분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 베푸신 기쁨과 행복의 동산의 삶을 회복하는 첫 걸음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용서함 받은 확신이 있습니까? 이 확신에서 오는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죄 용서함을 받은 행복한 자가 누리는 <둘째 걸음>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과 평화하는 것” 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 4장>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의 행복’을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나서, <롬. 5장>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롬. 5:1/ 새번역)라고.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듭난 성도가 누리게 되는 놀라운 영적 은혜를 사도는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었을 때,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우신 피로 우리의 모든 죄가 깨끗이 씻음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게 된다’ (We have peace with God)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다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에서 한가지 성도 여러분에게 질문하기 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십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 한다는 뜻입니까? 하나님과 평화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무서운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말로 만이 아니라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방금 여러분에게 질문한 이유는 의외로 예수 믿는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그분과의 사랑의 관계를 발전시켜 가지 못하는 크리스챤들이 많치 않은가 하고 저는 문제의식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음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을 ‘서먹서먹’하고 ‘부담스러운’ 분으로 대하는 크리스챤이 적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저만의 생각일까요?

만약 여러분도 저의 의견에 동의하신다면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바울은 <롬. 8장>에서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 8:14~15)고 선언합니다. 우리 성도가 명심해야 하는 사실은 하나님의 영, 성령을 통해 우리는 거듭나게 될 뿐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성령의 충만함으로 말입니다. 문제는 성령의 충만한 도우심을 받지 못할 때, 내가 비록 거듭났을찌라도 거듭난 자의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치심과 인도하심의 절대적인 필요성이 우리 크리스챤에게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믿고 죄 용서함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될 뿐 아니라, 하나님과 참된 평화를 누리게 될 때 우리는 행복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세번째 걸음>로는,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 입니다. 사도는 우리 성도가 죄 용서함 받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게 된다고 진술하고 나서, 이것에 거치지 않고 이렇게 나아갑니다.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롬. 5:11)고. 이것은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중요한 영적 원리입니다. 하나님과 평화 안으로 들어간 자는 이제 그 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또한 즐거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즐거움은 우리 크리스챤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클라이막스가 아닐까요? 내가 진정한 행복의 삶을 살고 있는지를 가름하는 최종적인 측도가 아닐까요?

미국의 존 파이퍼 목사는 그의 책 <the pleasures of God>에서 이렇게 ‘행복한 하나님’을 설명합니다. “아무도 불행한 하나님과 영원을 보내기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행하시면 복음의 목적이 행복한 목적이 아니며 그것은 전혀 복음이 아닐 것이라는 뜻입니다. ~ 하나님의 행복은 무엇보다도 그의 아들에 대한 행복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행복을 공유할 때 우리는 아버지가 아들에게서 느끼는 즐거움을 공유하게 됩니다”라고. 예수께서 <요.17장>에서 우리 성도를 위한 위대한 기도를 끝내며 마지막하신 말씀이 그것을 잘 나타내 줍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26) 이는 그분의 아들로 인한 하나님의 즐거움이 우리 안에 있음으로 우리가 또한 즐거워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들 안에서 누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충만한 즐거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행복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일상에서 누리는 작고 소소한 행복이라 할찌라도 하나님은 여러분이 누려나가기를 기뻐하심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죄사함 받은 구원의 감격이 여러분의 일생을 통해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더 나아가 성령의 충만하신 은혜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버지 안에서 즐거워하는 이 행복한 자녀의 삶을 누리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