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ober 4, 2020

“두려움” (The Fear)

Preacher:
Series:
Passage: 시편 (Psalms) 56:1~3
Service Type:

“두려움”

(The Fear)

10-4-20

본문말씀: 시편 (Psalms) 56:1~3

1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 하나이다 (Be merciful to me, O God, for men hotly pursue me; all day long they press their attack.)

2 나의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히 치는 자 많사오니 (My slanderers pursue me all day long; many are attacking me in their pride.)

3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Whe I am afraid, I will trust in you.)

 

[설교 요약]

            성도 여러분은 어떤 두려움이 있습니까? 어떤 염려와 불안이 여러분을 사로잡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은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서 최후의 도피처로써 블레셋 땅에 피해 있을 때 지은 시 입니다. 그는 자신을 삼키고 압제하고자 하는 수많은 적들에 둘러 싸여 불안하고 두려운 나날을 보냈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고 이렇게 담대하게 선언합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 주를 의지하리이다” (v.3) 라고.

그렇다면 다윗은 어떻게 이런 혹독한 고난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않고 불굴의 삶을 살수 있었던 것일까요? 아니 다윗 한사람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에게 까지도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두려움’이라는 현대인의 치명적인 병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 크리스챤은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How are Christians able to overcome against the fear?) 그것은,

첫째,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 입니다 (We can overcome the fear through the genuine faith to God): 우리는 다윗의 그 파란만장한 삶을 관통하여 흐르는 한가지 변함없는 믿음을 봅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선한 목자 되신다’ (시. 23편)는 믿음입니다. 이 선하신 하나님은 자신을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여 주실 뿐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함께 동행하시는 선한 목자 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고통의 삶 속에서도 변함없이 그가 놓지 않았던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견고한 생명줄이었던 것입니다.

둘째, ‘스스로를 설득함’ 입니다 (We can overcome the fear through persuading ourselves): 로이드 존스 목사는 그의 책 ‘영적 침체’에서 바로 <시편 42:5>을 인용하면서, 우리 성도들은 영적 침체의 조짐이 찾아왔을 때 무기력하게 침체의 늪에 빠져서는 안되고, 도리어 자신을 향해 명령하고 설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 42:5)라고. ‘내 영혼아, 어찌 낙심하느냐, 왜 불안해 하느냐, 도리어 하나님을 바라라’고 말입니다.

셋째, ‘확고한 결단’ 입니다 (We can overcome the fear through strong making up our minds): 다윗은 <시편 118편>에서 이렇게 굳은 결단을 합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 (시. 118:17)라고. 여기서 그가 말하는 ‘죽지 않고 살겠다’는 것은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영적인 승리를 거두겠다는 뜻입니다. 사자처럼 담대함으로 반드시 의인의 승리를 거두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허락하신 성령의 충만을 통해서 입니다.

성도 여러분이 지금 겪는 고통은 무엇입니까? 알게 모르게 여러분을 사로잡는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바라기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사자와 같이 담대한 의인의 믿음을 통하여 두려움이라는 현대인의 가장 치명적인 병을 극복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성도 여러분은 어떤 두려움이 있습니까? 어떤 염려와 불안이 여러분을 사로잡고 있습니까? 다윗은 청년시절 수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수많은 그의 원수들이 그를 둘러싸고 삼키려 했습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 주를 의지하리이다” (v.3) 라고 다윗은 하나님을 향해 담대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절망적이고 절대절명의 위기가 올지라도 결코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바로 자신의 선한 목자 되셔서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지켜 주실 뿐 아니라, 그의 강한 팔로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음으로 굳세게 일어서겠다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믿음으로 가장 두렵고 힘든 날에 조차도 그분을 의지하여 믿음으로 승리하겠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고통의 시간 가운데 다윗과 같이 여호와를 담대히 의지함으로 영적으로 승리하며 믿음의 귀한 열매를 맺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데로 다윗은 소년시절,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을 무찌름으로 일약 총망 받는 이스라엘의 전사가 되었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의 용맹함과 전쟁에 능한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군대의 중책을 맡겼습니다. 다윗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으로 인해 마치 사자같이 담대히 싸워 승승장구 적군을 물리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더 용맹하고 더 많은 전쟁에서 승리함으로 백성들의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뜻밖의 고난의 인생이 기다리고 있음을 그는 기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여인들이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돌아오는 다윗의 군대를 향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삼상. 18:7)라고 뛰놀며 노래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옆에서 듣고 있던 사울 왕은 점점 더 다윗을 질투하고 미워하기 시작하면서 급기야 그를 죽이기에 혈안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 다윗에게 벌어졌던 그 수많은 사건과 그가 왕위에 오르기까지 10여년의 기간동안 그 파란만장한 삶의 모습은 다윗이 얼마나 힘들고 험난한 인생을 보냈는지를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다윗이 사울왕을 피해서 도망다니던 시기에 그가 지은 시입니다. 특별히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고자 혈안이 되어 온 이스라엘 땅을 쥐 잡듯이 뒤지며 점점 더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을 때, 그는 생존을 위한 마지막 최후의 선택을 한 것입니다. 바로 매우 위험한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것은 얼마전까지 적이 되어 치열하게 싸웠던 적국 블레셋에 거짓으로 투항하여 들어갔던 것입니다. 사울 왕의 칼을 피하고자 하는 최후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상할 수 있듯이 이런 위험한 ‘적과의 동침’ (?!) 은 결코 순탄한 삶으로 이어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특히 블레셋 왕을 호위했던 장군들은 매우 의심에 찬 눈으로 그를 대할 뿐 아니라, 급기야는 블레셋 왕에게 다윗은 이스라엘의 첩자로서 전쟁이 났을 때 뒤에서 우리를 도리어 공격할 것이다고 모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마디로 다윗의 삶은 ‘사면초가’의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과 같은 심히 두렵고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두려움의 삶이었습니다. 이 후의 스토리를 읽어보면, 급기야 다윗은 이런 극도의 생명의 위협을 모면하고자 블레셋 왕과 신하들 앞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미친 체 하기까지 했음을 보게 됩니다.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보면 그가 겪는 생명의 위협과 인간관계 속에서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 하나이다. 나의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히 치는 자 많사오니” (v.1~2) 라고. 다윗은 지금 살아남기 위해 적국 블레셋의 심장부인 블레셋 왕궁에서 자신을 의심과 적개심에 찬 눈으로 바라보며 공격의 기회를 엿보는 블레셋 장군들 틈바구니에서 하루하루를 살얼음 위를 걷듯이 그는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겪는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불안 가운데서의 두려움은 과히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런 상황 속에서 다윗은 이런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v.3) 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정말이지 영혼의 반전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어떻게 이와 같이 어떤 고난의 환경도 그를 좌절시킬 수 없는 불굴의 삶을 살수 있었던 것일까요? 오늘 본문을 이어가는 <4절>에서 그는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 즉 두려워 아니 하리니 혈육 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이까” (v.4)라고 말입니다. 한마디로 모든 힘과 능력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시는 데 인간들이 감히 건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다윗은 이런 그의 확고한 심정을 <11절>에서도 한번 더 확정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 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v.11) 라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다윗의 이런 놀라운 반전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까? 속으로는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겉으로만 용기 있는 척 믿음 좋은 척하는 것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다윗은 실로 사자같이 담대한 사람으로 굳게 서서 악한 원수와 싸워 이겨 나갔던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저는 먼저 여기서 현대 문학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한 사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는 ‘프란츠 카프카’ (Franz Kafka) 입니다. 카프카는 1883년에 현재 체코의 수도인 프라하, 그 당시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유대인 부모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독일어를 쓰는 프라하 유대인 사회에서 성장했는데, 1906년 법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보험회사에 취업했지만 그의 일생의 유일한 목표는 창작 활동이었습니다. 그는 프라하에 살면서도 체코사회에 소속되지 못했고, 유대인이었지만 유대종교를 믿지 않았고 (유대인으로 살지 못했고), 독일어를 사용하였지만 독일문화를 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카프카는 언제나 한쪽 그룹에 소속되지 못하고 양쪽 경계선 (board line) 사이에서 머물러 있으면서 자신의 정체성 (identity)에 많은 혼란을 겪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성장배경은 장차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끼침으로 <사회적 소외감>이라는 그의 작품 특유의 주제를 낳게 된 것입니다. 그의 작품은 ‘성’ ‘변신’ 그리고 ‘심판’과 같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작품들이 있는데, 그 주인공들은 대부분 자신의 한 분신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꿈을 꾸는 듯한 현실 속에서, 실체가 없는 조직의 힘에 무기력하게 한 개인이 파멸되어지고 그 조직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주인공의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40세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생존 했을 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작품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의 실존적이고 허무주의 (nihilism)적인 작품은 사후에 사르트르, 카뮈, 그리고 ‘존재의 가려움’을 쓴 밀란 쿤데라와 같은 20세기 문호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던 것입니다.

제가 오늘 비교적 소상하게 카프카의 삶과 문학에 대해 설명하는 이유는 그의 문학세계가 오늘날 현대인의 정신세계를 매우 잘 대변하고 있다는 점일 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 크리스챤들 조차도 그와 유사한 정신구조를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현대인의 특징인 ‘불안감, 무력감, 소외감, 허무감’을 카프카는 일찍이 자신이 먼저 경험했을 뿐 아니라, 그의 작품을 통해 투영시켰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챤에게서 유사한 정신현상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제 말씀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크리스챤은 삶 속에서 결코 불안해서도 안되고 무기력함을 느껴서도 안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제가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거듭난 성도의 삶은 두려움의 늪에 빠지거나 허무주의의 포로가 되어 헤어나오지 못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잠시 환경과 육신의 연약함으로 두려움과 염려가 불쑥 불쑥 엄습해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찌라도, 그 감정에 포로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수많은 크리스챤들을 목격하고 됩니다. 그럼으로 이와 같은 허무와 불안과 두려움이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이 직면한 가장 강력한 ‘골리앗’의 하나라고 제가 말한다면 여러분은 지나친 과장이라고 치부하시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 다윗의 시편은 우리 성도가 어떤 자세로 이 복잡다단한 환경과 인간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가르쳐주는 귀한 말씀임을 저는 믿습니다. 이제 저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어떻게 오늘 본문의 다윗과 같이 환경에 지배를 받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써 환경을 지배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인지를 함께 묵상해 보겠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적용해 보자면,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에게 까지도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두려움’이라는 현대인의 치명적인 병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어떻게 우리 크리스챤은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How are Christians able to overcome against the fear?) 그것은,

첫째,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 입니다 (We can overcome the fear through the genuine faith to God):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제가 언급했듯이, 다윗의 삶은 이미 청년의 시기에서부터 수많은 고난의 시간을 넘기어야 했습니다. 제가 만약 그와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힘들고 이해할 수 없는 여러가지 상황 가운데서도 한가지 놓치지 않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선한 목자 되신다’ (시. 23편)는 것입니다. 이 선하신 하나님은 자신을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여 주실 뿐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함께 동행하시는 선한 목자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행하실 뿐 아니라, 그분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고통의 삶 속에서도 변함없이 그가 놓지 않았던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견고한 생명줄이었던 것입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v.3)는 것입니다.

둘째, ‘스스로를 설득함’ 입니다 (We can overcome the fear through persuading ourselves): ‘고라 자손의 노래’ 라고 전해지는 <시편 42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 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 하니이다” (시. 42:1)라고. 하나님의 은혜와 그 얼굴을 사모하는 신자의 갈망이 한편의 수채화처럼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는 이어지면서 기자의 영적 고뇌와 흔들리는 마음이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4절>은 이렇게 스스로에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 42:5)라고.

로이드 존스 목사는 그의 책 ‘영적 침체’에서 바로 <시편 42:5>을 언급하면서 우리 성도가 어떻게 영적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를 매우 구체적으로 조언하고 있습니다. 바로 자신을 불안과 염려 가운데 사로잡히게 그냥 방치하지 말고, 이렇게 자신에게 선포함으로 스스로를 설득하라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느냐! 어찌하여 불안해하느냐! 네는 이렇게 두려움과 슬픔에 사로잡힐 존재가 아니다. 이제 눈을 들어 너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환경을 바라보고, 사람들을 바라볼 때 우리는 실망할 수 밖에 없고 낙심할 수 밖에 없지만, 눈을 들어 이 순간에도 도우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 여러분과 저는 오히려 불평과 불만이 변하여 소망과 찬송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수동적으로 환경 가운데 이끌려 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을 설득하고 있습니까? 그 얼굴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까?

셋째, ‘확고한 결단’ 입니다 (We can overcome the fear through strong making up our minds): 종교개혁의 선구자였던 마르틴 루터가 시편 말씀 중에서 가장 사랑했던 말씀이 <시편 118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마르틴 루터는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의 비성경적이고 권위적인 교권에 대항하여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겼는데, 그로 인해 사방에서 말할 수 없는 핍박과 공격에 시달렸던 것입니다. 다윗은 <6절>에서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시. 118:6)라고. 루터는 늘 이렇게 이 시편을 읍조렸다고 합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계속해서 이런 확고한 결단을 하고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 (시. 118:17)라고. 그가 정확하게 몇살 때, 어떤 상황 가운데서 이 시편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라는 그의 선언이 비장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죽지 않고 산다’는 그의 선언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단순히 목숨을 부지한다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이 죽지 않고 산다는 의미는 영적인 승리요,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로 반드시 승리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이것이 의인이 사자처럼 담대한 이유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다윗은 이렇게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장군과 같이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게 의의 문을 열찌어다 내가 들어 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문이요 의인이 그리로 들어 가리로다” (시. 118:19~20).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도우시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낙심시키고 두려움으로 몰고가는 세상을 향해 담대하게 선언해야 합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반드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겪는 고통은 무엇입니까? 알게 모르게 여러분을 사로잡는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여러분 속지 마십시요? 세상은, 그리고 악한 영 사단 마귀는 수없이 교묘한 방법으로 전략을 달리하여 우리를 공격하지만, 그 목표는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실족케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것입니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잠. 28:1)고 잠언서 기자는 선언합니다. 구약의 다윗과 의로운 성도 뿐 아니라, 기독교회 2천년 역사를 지나오면서 신실한 성도가 언제나 붙들었던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신뢰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v.3) 는 다윗의 고백이 바로 성도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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