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ember 27, 2020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II) (The True Will Set You Free)

Preacher:
Series:
Passage: 요한복음 (John) 8:31~32, 35~36
Service Type: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II)

(The True Will Set You Free)

9-27-20

본문말씀: 요한복음 (John) 8:31~32, 35~36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To the Jews who had believed Him, Jesus said, “If you hold to my teaching, you are really my disciples.)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Then you wi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will set you free.”)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Now a slave has no permanent place in the family, but a son belongs to it forever.)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So if the Son sets you free, you will be free indeed.)

 

[설교 요약]

            계속해서 ‘그리스도가 주시는 진리로 말미암아 자유케 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웨스터민스트> 신학사전에서 ‘진리’ (truth) 는 [실체 (reality) 혹은 진짜 (genuine)에 관련된 것. 구약성경에서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진실성’ (truthworthiness) 과 ‘신뢰성’ (reliability)으로서 강조하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진리’ (요. 14:6)이심을 밝힌다. 그럼으로 교회는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고자 추구한다] 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주님의 말씀에 거한다’ (‘holding/ remaining’ to His teaching)는 뜻일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날마다 읽고 묵상하고 그 바른 뜻을 깨닫아 갈 뿐 아니라,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것이 주의 말씀에 거한다는 것입니다(마. 7:24).

그렇다면, 이제 주께서 주시는 진리를 통해 자유하게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과연 예수께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자유는 무엇일까요?” (What is the freedom that Jesus promises to His believers?)

첫째, “죄로부터의 자유” 입니다 (It is the freedom from the original Sin) 예수님은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하고 ~” (눅. 4:18~19)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바로 주님은 자신이 이사야가 예언한 인류를 구원할 그리스도로써 죄의 포로가 되어 신음하고 어둠의 권세에 짓눌린 인류를 자유케 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어떤 인간도 벗어날 수 없는 ‘원죄’ (the original sin)로 부터의 자유입니다.

둘째, “육신의 정욕으로부터의 자유” 입니다 (It is the freedom from our desires of the sinful nature) 주님은 또한 ‘육신의 정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6)고 선언합니다. 주님은 그의 참된 제자들을 구원하실 뿐 아니라, 날마다 성령을 통하여 육체의 정욕과 싸워 이김으로 자유케 하십니다.

셋째,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 입니다 (It is the freedom in Christ) 주께서 주시는 가장 영광스러운 단계는 바로 주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일 것입니다. 주님은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요. 15:4) 왜 우리는 주님 안에 거해야 할까요? 그 이유는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어 우리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 (요. 15:11)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누리는 생명과 기쁨의 자유함을 주시고자 함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 그분의 말씀 안에 거함으로 아들만이 주실 수 있는 진리를 통해 참으로 자유케 되는 은혜의 삶을 사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성도 여러분은 자유합니까? 현재 여러분은 스스로 만족하는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실 이 세상 그 누구도 자유를 원치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자유를 거부하고, 대신 구속과 속박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유자’ 되신에 ‘종’이나 ‘노예’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실은 그렇지 않음을 봅니다. 물론 스스로 원한 것은 아니겠지만, 인간역사에서 보듯이 과거에 (심지어 일부 국가에선 오늘날까지…) 신분계급으로 나눠져서 귀족. 양반과 같은 상류지배 계급이 있는가 하면, 상민, 종, 노예와 같은 지배당하는 하층 계급이 존재했습니다. 물론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에선 적어도 법적으로는 이런 신분적 불평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우리 인간의 법적 평등이 곧 자유를 보장한다는 뜻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과거 뿐 아니라, 현재도 우리 인간은 어떤 상황적 변화가 오더라도 결코 자유하지 못하다고 우리 인간의 실존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자유함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깨닫는 것이라고 오늘 주님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초청하고 있습니다. 오직 주님이 주시는 진리로 말미암아 자유함에 이르는 축복된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먼저 이렇게 질문하기 원합니다. “무엇이 진리입니까?”라고. <웨스터민스트>은 ‘진리’ (truth) 는 [실체 (reality) 혹은 진짜 (genuine)에 관련된 것. 히브리 구약성경에서는 이 진리를 초월적인 하나님의 ‘진실성’ (truthworthiness) 과 ‘신뢰성’ (reliability)으로서 강조한다 (신. 32:4). 신약의 경우는 예수님이 ‘진리’ (요. 14:6)이시다. 그럼으로 교회는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고자 추구한다] 라고 기독교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간명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철학사전>에서 ‘진리’는 [참된 이치 또는 참된 도리, 명제가 사실에 정확하게 들어 맞음. 또는 논리의 법칙에 모순되지 아니하는 바른 판단. 형식적 의미로 ‘사유의 법칙에 맞다’는 의미에서의 사고의 정당함을 의미한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승인할 수 있는 보편적인 법칙이나 사실]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하신 <요. 8장>의 오늘 본문말씀을 묵상하면 할수록 제가 더 분명히 확신하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이 진리를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그 사람의 삶 전체를 좌우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방금 철학사전에서 살펴 본대로 ‘진리는 참된 이치로서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승인할 수 있는 보편적인 법칙’이라고 정의하고 있지만, 제가 실제 삶을 살아가면서 경험한 바에 의한다면 사람들이 주장하는 진리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승인할 수 있는 보편적 법칙이라기 보다는 사람들의 관점에 따라서 서로 상반되고 전혀 다른 것을 진리라고 주장함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여러 말씀 가운데서도 특별히 오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v.31)라고 선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심각한 것은 주님께서 지금 <주님의 제자가 되는 자격조건>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표현법으로 말한다면 <예수님을 믿는 참된 크리스챤의 자격조건>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참된 크리스챤이 된다는 것은 좀더 괜찮은 크리스챤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구원받은 성도 중에서 더 신실한 신자가 된다는 뜻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참 내 제자가 된다”는 주님의 약속은 ‘참되지 않은 제자’ 즉 ‘거짓된 제자’와 구별되는 말씀이요, ‘참된 제자만이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그렇다면 어떻게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고, 그분의 제자가 되어 주께서 주시는 진리로 말미암아 자유케 되는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31절>을 주석하면서 <유진 피터슨>은 이 말씀을 “If you remain faithful to my teachings ~”라고 해석했는데, 이것은 “만약 너희가 나의 가르침에 신실하게 거한다면”이라고 번역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신실하게 주님의 말씀에 거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날마다 말씀을 읽음으로써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 다음으로, 계속해서 말씀을 읽어 나가고 있다면 그 말씀을 깊이 묵상해 나갈 뿐 아니라 말씀을 공부해 나가며 주관적 오류에 빠지지 않고 올바른 성경 지식에서 자라나가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내가 깨닫은 주의 말씀을 행 함으로서 열매 맺는 것입니다. 주께서 도전하셨듯이 주님의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행하는 자가 그 집을 튼튼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자인 것입니다 (마. 7:24). 그러므로 ‘신실하게 예수님의 말씀에 거한다는 의미는?’ 그분의 말씀을 날마다 읽고 묵상하고 그 바른 뜻을 깨닫아 갈 뿐 아니라,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것이 주의 말씀에 거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성도 여러분과 함께 구체적으로 주께서 주시는 진리를 통해 자유하게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좀더 집중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왜냐하면 지난 주에 이어서 이번 주 말씀을 통해 우리는 ‘과연 무엇이 참된 진리를 통해 자유하게 되는 상태인지?’를 중점적으로 확인해 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자유에 이르는 삶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과연 예수께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자유는 무엇일까요?” (What is the freedom that Jesus promises to His believers?)

첫째, “죄로부터의 자유” 입니다 (It is the freedom from the original Sin) 복음서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자신의 메시야로서의 첫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안식일에 고향 나사렛에 있는 한 회당에서 두루마리 성경의 한 부분을 찾아 읽으셨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눅. 4:18~19)는 <이사야서 61장>의 글을 읽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이 글을 읽고 자리에 앉으셨을 때, 거기 있던 자들이 주님을 주목하여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주님은 그들을 향해 이런 놀라운 선언을 하셨습니다.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눅. 4:21)고. 과연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런 주님의 말씀이 놀라운 것은 이사야가 <61장>에서 장차 오실 구원자 메시야가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실 사역을 선포한 예언의 말씀인데, 그들에게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이 오늘 너희 귀에 성취되었다’ 라고 선언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자신이 약속의 그리스도되심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오실 그리스도는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고,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첫 인간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그의 모든 후손들이 죄의 강력함 힘 아래 전쟁포로처럼 억압당하고, 눈먼 자처럼 어둠 가운데 고통 당하는 영적 실존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요, 이런 죄의 권세 아래 신음하는 우리 인간을 그리스도가 자유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v.31~32)에서 주께서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유대인들이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v.33)하고 주께 반문합니다. 주님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v.34)고 그들의 영적 상태를 밝히셨습니다. 주님을 통해 죄로부터 건짐을 받지 못할 때, 그들은 여전히 죄의 종인 것입니다. 진리를 통하여 자유하게 된다는 것은 어떤 법적인 자유나, 사회신분과 어떤 외적으로 드러나는 자유가 아니라, 먼저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을 믿음으로 죄 용서함 받고 의롭다함을 받게 된 상태인 것입니다. 바로 사도 바울이 고백했듯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여러분과 저를 해방한 상태’ (롬. 8:2)가 주님이 약속한 자유의 시작인 것입니다.

둘째, “육신의 정욕으로부터의 자유” 입니다 (It is the freedom from our desires of the sinful nature)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진리를 주셔서 자유케 하실 것을 약속하셨을 때, 그 자유의 상태는 앞서 설명한데로 그 무엇보다도 ‘죄로부터의 자유’인 것입니다. 바로 우리 <인간의 구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말씀하시는 ‘자유’가 이것이 전부일까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더 있습니까? 그것은 또한 ‘육신의 소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솔직히 오늘 말씀이 여러분과 저에게 소망과 위로가 되는 것은 우리 각자는 여전히 주님께서 약속하신 자유함에 온전히 이르지 못하고 있음을 우리의 영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 각자의 삶의 모습이 주님이 약속하신 자유를 누리는 상태라면 우리는 틀림없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장성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여 더 깊은 영적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이렇게 편지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6) 사도는 거짓 교사로 인해 유대 율법주의에 얽매여 있는 갈라디아 교회 성도를 향해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으로 자유하게 되는 삶이 무엇인지를 영적으로 잘 설명하고 나서, <갈라디아서 5장>을 시작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 5:1)고 성도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가 불신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믿는 성도를 대상으로 했음을 기억할 때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자동으로 더 깊은 자유함에 이르는 것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악한 영 사단 마귀는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그때부터 우리를 포기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구원받았더라도 여전히 연약한 육체에 거하는 욕심으로 인하여 우리가 얼마나 자주 실수하며 자유하지 못하는 것인지를 우리 스스로가 잘 알지 않습니까?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상은 세상을 사랑함으로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요일. 2:15~16)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약속의 영, 진리의 영 되신 성령을 좇아 육체의 욕심과 맞서 싸우지 못하고, 반대로 육체의 욕심에 끌려 다니기 때문입니다. 진리로 자유하게 된다는 것은 바로 진리의 영, 성령을 좇아감으로 육신의 정욕에서 자유케 된다는 뜻인 것입니다.

셋째,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 입니다 (It is the freedom in Christ) 저는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주님이 그를 믿는 참된 제자에게 주시는 자유함의 가장 복되고 영광스러운 단계는 바로 주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임을 강조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진리를 주실 뿐 아니라, 주님 자신이 진리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 점을 생각할 때, 주께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요. 15:4) 고 주님의 제자를 그 분 안으로 초청하신 의미를 좀더 잘 이해하게 됩니다.

주님은 잡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나서 이렇게 그들을 격려하시고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 내 안에 거하라”고 말입니다. 왜 주님안에 거해야 하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주님께 거하지 않는다면 가지인 우리는 말라 죽게 되고 그 어떤 열매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님 안에 거할까요? 주님은 <7절>에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 <요. 8:31>에서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과 같은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요. 15장>에서 주님은 “~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9절)고 하십니다. 여기서 주님의 논법이 어떻게 진행되는 지를 볼 수 있습니다. 즉 ‘내 안에 거하라’는 ‘내 말씀 안에 거하라’ 로 연결되고, 또한 ‘내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은 ‘내 사랑 안에 거하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주께서 이렇게 초청의 말씀을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요. 15:11) 주께서 우리를 그분 안에 거하게 하시는 이유는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서 충만케 하시고자 함입니다. 주님은 그의 제자들을 자신 안에 거하게 하심으로 놀라운 생명과 기쁨의 자유를 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줄 수도, 세상이 빼앗을 수도 없는 주님 안에서 누리는 진정한 자유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아직도 여전히 누리지 못하는 자유는 무엇입니까? 아직도 여전히 갈구하는 자유는 무엇입니까? 주님은 명절 끝날 서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요. 7:37~38) 바로 주를 믿는 자가 받게 될 성령의 충만하심 입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인간적으로 바라고 소망하는 각자의 자유를 넘어서서 오직 진리되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v. 36)고 약속하신 그 아들로 말미암아 참으로 자유함에 이르는 축복된 주님의 참된 제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