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ember 20, 2020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I) (The True Will Set You Free)

Preacher:
Series:
Passage: 요한복음 (John) 8:31~32, 35~36
Service Type: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I)

(The True Will Set You Free)

9-20-20

본문말씀: 요한복음 (John) 8:31~32, 35~36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To the Jews who had believed Him, Jesus said, “If you hold to my teaching, you are really my disciples.)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Then you wi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will set you free.”)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Now a slave has no permanent place in the family, but a son belongs to it forever.)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So if the Son sets you free, you will be free indeed.)

 

[설교 요약]

            예수께서 자기를 믿는 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v.31~32)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거할 때,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아감으로 자유하게 된다는 선언은 저의 가슴을 부풀게 합니다.

저는 이번주와 다음주에 ‘진리로 자유하게 되는 삶’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우리 크리스챤은 현재 그분의 말씀 안에 거하고 있는가? 말씀 안에 거함으로서 진리를 깨닫아 감으로 자유하고 있는가? 라고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 각자가 ‘나는 자유하고 있다’ 라고 대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왜일까요?

저는 우리 성도들이 진리로 자유함에 이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영적 강력한 적의 하나는 ‘종교화’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이렇게 종교화된 자들을 ‘바리시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시간에 살펴보아야 할 것은 “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적대시한 것일까요?” (Why did Pharisees not only deny but also hate Jesus very much?)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 ‘남에게 옳게 보이고자 했기 때문’ (Because they acted to be seen as righteousness before men) 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마. 6:1) 고 도전하셨습니다. 핵심은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을 때, 인간의 평가와 칭찬을 받고자 겉과 속이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전통을 진리보다 더 따랐기 때문’ (Because they put their traditions first then the truth of Words) 입니다: 주님께서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낫게 하시고, 세리와 함께 식사하시던 주님을 바리새인들이 율법과 전통이라는 잣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되신 말씀으로 볼 수 있었다면 그들은 주님의 마음을 깨닫았을 것입니다.

          셋째, 거룩보다는 도덕을 더 중시’ 했기 때문’ (Because they considered ‘morality’ more important than ‘holiness’) 입니다: <로마서 14장>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롬. 14:17)라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지엽적인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라는 내 기준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라는 본질을 잡고 성령 안에서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의 성도의 거룩을 이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함께 서로 사랑함으로 종교화된 겉옷을 벗어버리고 주님께서 명하신 사랑의 법을 성취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성도 여러분은 ‘종교와 신앙’의 차이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더 강한 종교인이 된다’는 말과 ‘더 깊은 신앙인이 된다’는 말은 비슷한 듯하면서도 사실 정반대의 말을 하고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종교와 신앙의 차이점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자유함’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바로 ‘진리로 말미암아 자유할 수 있느냐 없느냐? 가 진정한 신앙인을 종교화된 사람들로 부터 구별되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자유는 무엇인가요? 그렇다면 그 자유가 진정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자유일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진리를 통해 허락하신 참된 자유를 점점 더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되길 소망합니다.

저는 ‘국어사전’에서 [종교]라는 개념을 먼저 확인해 봤습니다. [종교 (宗敎)는 ‘종교일반’ 신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 또는 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인간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체계. 그 대상. 교리. 행사의 차이에 따라 여러가지가 있는데, 애니미즘. 토테미즘. 물신숭배 따위의 초기적 신앙 형태를 비롯하여 샤머니즘이나 다신교. 불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의 세계 종교에 이르기까지 비제도적인 것과 제도적인 것이 있다] 라고 <국립표준 국어대사전>은 정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종교인’이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의 의미는 믿는 대상은 다르다 할지라도, 자신이 확신하는 [‘절대적 존재’ (=일반적으로 ‘신’이라고 부름)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구원받고 복을 누리기 위해 그 종교에서 명령하는 계율 (=율법)을 준수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계율’은 각각의 종교에서 추구하는 본질에 따라서 매우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이 시간에 여러 타종교의 개념과 가치관을 다루기에는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챤으로서 결코 독선과 자만에 빠져서는 안 됨에도 불구하고, 우리 성도의 ‘기독교 신앙’이 세상의 수없이 많은 종교와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이유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만이 유일한 구원의 종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세상을 창조하신 유일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오직 이 땅에 보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만이 구원받게 됨을 믿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고백했듯이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행. 4:12)는 영적 진리를 믿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저는 여러분과 함께 참되고 유일한 구원의 종교인 우리 기독교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종교화된 자들의 모습과 신앙인의 삶을 사는 자들의 모습’을 비교해 살펴봄으로 주께서 약속하신 신앙인이 누리게 될 진리로 말미암아 자유케 되는 은혜의 삶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여기서 ‘종교화된 (=종교적인) 사람’ 이라고 표현했을 때는 앞서도 언급했듯이 ‘일반적인 종교인이라기 보다는 종교를 믿음에 있어서 뭔가 부정적이고 형식화된 사람들을 빗대어 표현한 단어’임을 우리는 먼저 설정하고 나서 오늘 말씀을 진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교인은 신앙인과 대조적인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3가지 약속>을 하심을 보게 됩니다. 첫째는 ‘참 내 제자가 되는 것’ (Being real my disciples), 둘째는 ‘진리를 알게 됨’ (Knowing the truth) 그리고 셋째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것’ (The true will set you free) 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 세가지의 약속은 ‘한가지 조건’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만약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If you hold to my teaching)라고 하는 ‘조건절’ (conditional sentence) 입니다. 그러므로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아 감으로 자유함에 이르기를 우리가 진정으로 원한다면, 우리 주님의 “내 말에 거하라”는 간결하면서도 분명한 말씀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내 말에 거하게 될때, 진정한 내 제자가 됨으로서 진리를 깨닫게 되고, 그 깨닫게 된 진리로 말미암아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는 자유함에 이르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라고 주님은 약속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주님의 말씀에 거한다’는 것은 말은 쉬운데 그것을 실천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음을 우리는 이해해야만 합니다.

이제 저는 왜 이것이 결코 간단하지 않은지에 대해 살펴보기 원합니다. 먼저 제가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종교인과 신앙인의 차이’에 대해 언급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신앙>에 있어서 <바리새인>이라는 말은 ‘종교적인 삶을 사는 사람’을 대표하는 표현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바리새인을 종교적인 사람의 대명사로 치부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이 말과 행동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원래 ‘바리새인’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페루쉼’이라는 말로서 ‘분리된 자’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BC 130년 경인 마카비 시대에 최초로 등장했는데, 바벨론 포로기 동안에 성경으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의 결과로 신약시대에 유대인 사회에서 가장 큰 종교적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엄격한 율법준수를 통해 세상의 죄악과 불신앙으로부터 분리됨으로서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녀의 신앙적 순결을 지켜 나가고자 하는 순수한 신앙운동으로 출발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나친 율법준수에만 매 말리다 보니 율법에서 파생되는 전통과 규례를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함으로 점점 더 형식과 외식에 빠짐으로 신앙의 본질을 상실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바리새인의 ‘종교화’된 그들의 상태를 고려해 볼 때, 왜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유대인들이 죄인으로 취급했던 세리와 창녀은 품어 주시고 친구 삼아 주셨지만, 반대로 (오히려)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고 남을 판단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해서는 강하게 꾸짖고 책망하셨던 것인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마. 23:27) 라고. 그들은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려고 노력했지만, 그 안에는 위선과 불법이 가득하다 (마. 23:28)고 주님은 그들을 고발하신 것입니다.

한편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심을 보고 비판과 비웃음과 적개심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종교화된 눈으로는 진리되신 주님의 말씀을 깨닫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바리새인의 삶을 통해 우리가 내릴수 있는 결론은 <‘종교인’의 삶은 얼핏 보기에는 진리를 추구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진리를 거부함으로 껍데기 (=거짓) 만을 붙잡는 무서운 삶의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이 가장 큰 선지자로 인정하는 모세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을 생명처럼 의지하며 살았던 바리새인들이 왜 진리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토록 부정적이고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일까요? “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적대시한 것일까요?” (Why did Pharisees not only deny but also hate Jesus very much?)  그것은

첫째, ‘남에게 옳게 보이고자 했기 때문’ (Because they acted to be seen as righteousness before men) 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마. 6:1) 사실 다른 사람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그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다는 것은 하등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도리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마. 22:39)는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사랑의 명령을 행하는 실천적인 모습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남에게 잘 보이고 칭찬받고자 하는 노력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요? 문제는 그 동기라는 것입니다. 방금 말씀드렸듯이, 내가 남에게 행하는 행위가 만약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자’ 하는 동기가 아니라 그런 사랑과 진실함은 없으면서도 ‘겉으로만 사랑 많은 척, 동정심과 배려심이 많은 척함으로 남에게 인정받고자’ 한다면 이것이 바로 ‘위선’ (hypocrisy)인 것입니다. ‘위선’이 뭡니까? ‘위선’ (僞善)은 ‘겉으로만 착한 체함’인데, 바로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조금 전에 읽어보았듯이 주께서 <마. 6장>에서 남에게 구제할 때나, 기도할 때, 그리고 금식할 때 남에게 보이고자 행하지 않토록 주의하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모든 종교화된 행위의 동기가 하나님 아버지를 의식한 것이 아니라, 실은 사람을 의식한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적인 사람의 대표적인 행동의 동기인 것입니다.

둘째, ‘전통을 진리보다 더 따랐기 때문’ (Because they put their traditions first then the truth of Words) 입니다: 물론 그 당시 바리새인들을 앞에 두고 ‘당신은 전통을 하나님의 진리보다도 더 중요시하고 따르고 있나요?’라고 묻어 본다면 그들 중에 한사람도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말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모습과 열매가 그들의 믿고 따르는 바가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음을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수없이 목격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서에서 보면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그들의 율법에서 파생된 전통을 생명처럼 지켰는지를 여러가지 사례들을 통해 잘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주께서 안식일에 걷지 못하는 38년된 병자를 고치셨을 때 그들은 안식일의 정신은 이해하지 못하고 주님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판단했습니다 (요. 5:10~18). 그리고 예수님이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셨을 때 그들은 그 당시 사회 편견에 따라 주님을 부정하다고 매도했으며 (막. 2:13~17), 주님의 제자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식사를 했을 때는 장로들의 전통을 어겼다고 비판했던 것입니다 (마. 15:1~20). 제가 여기서 생각해 보기 원하는 것은 오늘날 교회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우리 크리스챤들도 얼마나 동일한 실수를 행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는 바리새인의 모습은 비판하면서 내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전통과 형식 그리고 내 스스로 정한 가치관의 잣대로 형제 자매를 비판하지 않았는지 돌아 보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셋째, 거룩보다는 도덕을 더 중시’ 했기 때문’ (Because they considered ‘morality’ more important than ‘holiness’) 입니다: <로마서 14장>에서 보면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음식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영적 기준과 가르침을 주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음식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일부 성도는 양심 때문에 채소만 먹고, 일부 성도는 모든 음식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두 부류의 사람들은 서로를 향해서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여기에 대해서 중요한 가르침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롬. 14:13,17)라고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우리 크리스챤이 우리가 가진 도덕적 가치나 신앙 양심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아우르면서 관통하는 진리는 성령 안에서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은혜의 나라 안에서 성도가 누리는 ‘거룩한 삶’인 것입니다. 거룩한 채 하는 거룩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의 거룩’인 것입니다.

오늘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부정적인 의미에서 ‘종교화’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는데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되는지 하는 것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시간에는 어떻게 주님의 말씀을 따라 진리 가운데 진정한 자유에 이르는 삶을 살수 있을 것인지를 묵상해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형제 자매의 눈에 있는 티끌은 지적하면서 내 눈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고 있습니까?! 우리는 형제 자매의 연약하고 모순된 행동은 날까롭게 지적하면서도 나 자신의 모순되고 바리새인적인 모습은 깨닫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가요?!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롬. 14:15)고 했던 사도 바울의 말을 기억하며 서로 사랑함으로 종교화된 겉옷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법을 성취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