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ember 13, 2020

“서로 사랑하자” (Let us love one another)

Preacher:
Passage: 요한일서 (1 John) 3:18~19
Service Type:

“서로 사랑하자”

(Let us love one another)

9-13-20

본문말씀: 요한일서 (1 John) 3:18~19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Dear children, let us not love with words or tongue but with actions and in truth.)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This then is how we know that we belong to the truth and how we set our hearts at rest in his presence.)

 

[설교 요약]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가장 부족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서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 아닐까요? 사도 요한은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v. 18) 라고 우리들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요한 1서>의 주제는 “형제사랑” 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 당시 그의 영적 자녀인 성도들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자녀의 권세와 유익을 누려 나가길 원했던 것입니다. 바로 ‘서로 사랑함’을 통해서 입니다.

이제 저는 우리 성도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를 함께 성찰해 봄으로서 서로 사랑을 실천하는 믿음의 공동체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펴볼 것은 이것입니다. 왜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Why can’t we love one another?) 그것은,

첫째, ‘하나님의 사랑에서 출발하지 않기 때문” (Because we do not start our love by God’s love) 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일. 4장>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 4:16)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함에 실패하는 원인은 그 무엇보다 사랑이신 하나님 안에서 출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먼저 적용하지 않기 때문” (Because we do not apply first our love within our faith community) 입니다: 우리 성도가 사로 사랑해야만 하는 이유는 주께서 명령 하셨기 때문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4)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서로 사랑’하는 대상은 ‘믿음의 공동체’ 임을 알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연습해 나가고 함께 성장하기를 명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사랑함의 우선순위를 무시하기 때문” (Because we ignore the priority to love one another) 입니다: ‘무엇이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명하심 입니까?’라고 질문했던 한 율법학자에게 주님은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5)“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레. 19:18) 라는 두 말씀으로 대답하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온마음과 뜻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 우리 성도의 최우선적인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이웃사랑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요일. 5:2) 고 사도 요한이 말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킬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인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로 사랑함으로 주님의 법을 완성해 가는 믿음의 공동체 되기를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사랑의 사도’로 일컬어지는 사도 요한은 이렇게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도전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v. 18) 라고.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사랑하는 척하지 말고, 진짜 사랑하자’는 말 아닐까요?! 신학자들은 사도 바울의 주요사상이 ‘이신칭의’ (以信稱義)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것이라면, 사도 요한의 경우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도 바울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 1:17) 는 말씀을 통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신칭의]’의 사상을 로마서와 여러 서신서에서 그의 중심 되는 사상으로 삼은데 비해,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크리스챤의 신분과 그 특권’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큰 것인지에 대해 그의 서신서들에서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의 이러한 사상을 좀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요한복음’을 시작하면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라고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과연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지는 이 권세가 무엇인지?’에 대해 집중해서 잘 설명한 것이 바로 <요한 일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 (v.18) 라고 사도 요한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 의무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실로 놀라운 성도의 특권이자 은혜임을 더욱 깨닫고 그 사랑을 풍성히 누려 나갈 수 있는 우리 믿음의 공동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요한 1서>의 주제는 “형제사랑” 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 당시 그의 영적 자녀인 성도들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자녀의 권세와 유익을 누려 나가길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자녀의 권세와 유익을 누려 나갈 수 있을 것인가를 요한은 그의 첫번째 편지에서 영적으로 잘 밝혀주고 있는데 그 중심에 바로 “서로 사랑하자”는 핵심단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검토해야 하는 것은 “왜 사도 요한이 성도들에게 이 첫번째 편지를 썼는가?” 하는 점입니다. 물론 방금 언급했듯이 그의 메시지의 결론 (=핵심)은 ‘서로 사랑하자’는 것이지만, 보다 직접적으로 이 편지를 하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 초대교회 안에 독버섯처럼 퍼져 있었던 거짓 가르침 (=이단사상)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당시 ‘니골라 당’과 같이 교회 안에 퍼져 있던 이단사상을 경계하고, 그들의 거짓사상에서 벗어나도록 사도는 그들을 돕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 사상은 ‘영지주의’ (Gnosticism) 라고도 불리어 지는데, 이 영지주의의 핵심은 ‘영은 전적으로 선하고, 육신을 포함한 물질은 전적으로 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거짓교사들은 우리 인간이 구원받는 것은 죄에서 자유하게 되는 것보다 영이 육에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보다 그들이 강조하는 ‘특별한 영적 지식’ (gnosis/ 그노시스) 를 통해 얻게 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잘못된 가르침이 고린도 교회 등과 같이 여러 초대교회에 만연함으로 심각한 해악을 끼쳤음을 교회사를 통해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한 예로서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서 세상에서도 흔치 않는 음행이 있었는데 이런 부끄러운 육체적 타락의 배경에는 바로 영지주의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이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한 것인데, 우리가 이미 영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식에 이르렀다고 한다면 육체의 타락은 전혀 문제가 안된다>는 터무니없는 거짓 가르침에 속아 성도들이 심각한 육체적이고 영적인 타락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런 상황 가운데 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을 목양하는 목회자로서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거짓교사들로 부터 성도를 보호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 공동체를 지키는 것이 사도가 그의 첫번째 편지를 쓰게 된 직접적 (=1차적) 인 동기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일서>를 내용적으로 보자면, 사도가 편지를 시작하면서 ‘우리 성도는 생명의 말씀 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음으로 세상 가운데 ‘빛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1장). 그리고 나서 <2장>에서 ‘서로 사랑함은 빛 가운데 거하는 것’임을, <3장>에서는 ‘서로 사랑함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증거’임을 주장합니다. 또한 <4장>에서 ‘서로 사랑함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다는 증거’요, <5장>에서는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게 되는 것’ 임을 사도는 주장합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이 편지를 통해서 우리 성도가 하나님의 빛된 자녀가 되었기에 소극적으로는 교회 안에 쓰며 들어 있는 거짓 가르침을 말씀의 빛과 성령의 능력으로 대적하여 물리칠 것과 적극적으로는 ‘서로 사랑함’으로서 자녀에게 주시는 빛과 생명의 삶을 누려 나가자고 도전하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성도 여러분과 함께 ‘서로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 좀더 깊이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사실 ‘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제가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안더라도 성도 여러분은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사랑이 얼마나 강력하고 우리 인간의 삶을 좌우할 수 있는지는 우리 믿는 크리스챤 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대부분 동의 하는 바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제가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과연 우리 크리스챤은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가?!”라고 질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우리 크리스챤에게 여전히 부족한 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제 판단이 잘못된 것일까요? 제 판단이 잘못된 것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만약 여전히 서로 사랑하기를 미루고 행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면 도데체 무엇이 문제일까요? 이제 저는 우리 성도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를 함께 성찰해 봄으로서 서로 사랑을 실천하는 믿음의 공동체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집중적으로 살펴볼 것은 이것입니다. 왜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Why can’t we love one another?) 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의 사랑에서 출발하지 않기 때문” (Because we do not start our love by God’s love) 입니다: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이 포함된 <요일. 3장>을 시작하면서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컫음을 얻게 하셨는 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요일. 3:1) 라고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말일까요? 이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는 도전의 말씀을 시작하기 전에 무엇보다도 이렇게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자 하는 용기와 결심을 내는 근거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사랑으로만 우리는 서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오늘 말씀의 요지를 계속 발전시켜 나가면서 <요일. 4장>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 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일. 4:15~16)라고. 그럼으로 우리 크리스챤이 사랑하기에 실패하는 원인을 우리 각자가 살펴봄에 있어서 ‘내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출발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적지 않은 크리스챤들이 자기 스스로 사랑하기를 힘쓰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문제는 ‘내가 사랑하기를 힘쓴다’는 사실이 아니라, ‘사랑의 출발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 스스로는 결코 사랑할 수 없는 존재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이 사실을 얼마나 자주 자주 잊고 있는지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사랑으로 행치 않을 때 여러분과 저는 결코 사랑을 실천할 수 없는 존재임을 우리는 잊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도 여러분 스스로 사랑을 마음만 먹으면 행할 수 있다는 착각과 확신 가운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둘째,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먼저 적용하지 않기 때문” (Because we do not apply first our love within our faith community) 입니다: 오늘 사도 요한이 성도들을 향해 “서로 사랑하자”라고 주장한 것은 자신이 사랑이 많은 크리스챤이기 때문입니까? 이것은 자신의 성품과 관계없이 이것이 우리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잡히시기 전날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4)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주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새 계명을 주신 대상은 누구입니까? 그런데 <요. 13장>은 “예수께서 ~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 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1)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난 뒤에 주님께서 12사도들의 발을 씻기시는 세족식을 행하시는 내용이 (요. 13:3~11) 이어집니다. 그럼으로 주께서 “서로 사랑하라” 고 <요. 13:34>에서 새 명령을 주신 대상은 주님의 제자들, 바로 우리 크리스챤 공동체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지켜도 좋고 지키지 않아도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명령’ (commandment)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러한 명령은 ‘너희 크리스챤들 끼리만 서로 사랑해라’는 뜻은 물론 아닐 것입니다. 마치 이익추구를 위해 모인 이익집단처럼 말입니다. 우리 크리스챤 공동체는 결코 우리 끼리만 챙겨주는 이기적인 집단이 아닌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 크리스챤이 실제로 사랑에 실패하는 중요 원인의 하나가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제자된 우리 크리스챤 공동체 안에서 먼저 서로 사랑하기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사실 입니다. 주님은 아십니다. 우리가 한번만에 모든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는 순서가 있는 것입니다. 먼저 주님의 몸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연습하고 실천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왜 주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그 무엇보다도 우리 크리스챤들이 먼저 서로 사랑하기를 힘쓰게 될 때 더욱 더 사랑하는 법을 배워 나가게 됨으로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성품에 이르게 되는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하고자 함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를 힘쓰고 있습니까?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장애물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살리신 형제 자매’ (롬. 14:15)를 나와 생각과 취미와 가치관이 다르다고 사랑치 않고, 판단하고 거부하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그 무엇보다도 우리 크리스챤들이 주님의 제자임을 입증할 수 있는 분명한 기준을 주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요. 13:35) 바로 우리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니까?

셋째, ‘사랑함의 우선순위를 무시하기 때문” (Because we ignore the priority to love one another) 입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솔직히 깨닫게 되는 것은 저를 포함한 우리 크리스챤들이 머리로는 ‘서로 사랑해야 함’을 인정하면서도, 실제적인 삶의 현장에서는 그 사랑을 무시하거나 쉽게 다른 것들에 그 자리를 내어준다는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사랑하는 것’이 우선순위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우리 인간의 연약을 잘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택한 자녀,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첫째가는 명령이 <신명기서 6장>에 나오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 이스라엘민족에게 강하게 이렇게 명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4~5) 고.

무엇이 하나님을 최우선적으로 사랑하는 것일까요? <신. 6장>의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는 것’ (신. 6:6~9)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기고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요? 사도 요한이 그의 첫번째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요일. 5장>에서 선언하는 것이 바로 그 결과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요일. 5:2) 고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킬 때,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증거는 ‘하나님의 자녀’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영생을 소유하게 된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있습니까? 내가 크리스챤임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안에서의 사랑은 언제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문제가 많았던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마무리해 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갈. 5:6) 고 그들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의 삶은 그 어떤 율법적인 준수보다도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faith expressing itself through love) 즉 ‘사랑으로 표현되고 실천되는 믿음’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십계명을 비롯한 모든 율법을 준수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모든 것 위에 반드시 사랑으로 열매 맺고 마침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고전. 13:1~2)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서 함께 사랑으로 서로 섬겨 나감으로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믿음의 공동체 되길 기대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에게 허락하신 빛과 생명의 풍성한 은혜들을 사랑 가운데 함께 누려 나갈수 있는 우리 아포슬 교회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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