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ember 6, 2020

“남은 자” (A Remnant)

Preacher:
Passage: 이사야 (Isaiah) 10:21~23
Service Type:

“남은 자”

(A Remnant)

9-6-20

본문말씀: 이사야 (Isaiah) 10:21~23

21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A remnant will return, a remnant of Jacob will return to the Mighty God.)

22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 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Though your people, O Israel, be like the sand by the sea, only a remnant will return. Destruction has been decreed, overwhelming and righteous.)

23 이미 작정 되었은 즉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The Lord, the Lord Almighty, will carry out the destruction decreed upon the whole land.)

 

[설교 요약]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남은 자’ (A remnant)에 대하여 말씀의 뜻과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이 ‘남은 자 교리’는 어떤 특정한 시대나 특정한 그룹의 사람에게만 한정된 사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도리어 이 ‘남은 자’교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라는 큰 그림에서 이해되어지는 교리인 것입니다.

먼저, <웨스터 민스트 신학사전>에서 보면 ‘남은 자’ (remnant)는 [원래 (=전체)그룹에서의 한 부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볼 때,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남게 된 자]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약속하신 그의 후손을 통하여 그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심을 보게 됩니다. 그럼으로 성경 전체는 모든 시대를 통하여 믿음으로 남게 된 자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구원받은 자’라고 말하지 않고 굳이 ‘남은 자’라고 말하고 있느냐는 것에 우리는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는 구원받을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이 은혜로 남겨 두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두지 아니 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 (사. 1:9) 라고 이사야가 고백하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살아가는 크리스챤들로서 어떻게 우리는 남은 자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How may we become a remnant?)

첫째, “여호와께로 돌아옴으로” (By returning to the Lord) 입니다: 하나님은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v. 21) 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뿐 아니라, 날마다 죄와 허물을 회개함으로 그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간다는 뜻일 것입니다.

둘째, “마음의 할례를 받음으로” (By receiving circumcision of the heart) 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2:28~29>에서 ‘육체에 받는 할례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 마음에 받는 할례’를 통해 참된 유대인 즉 ‘구원받은 백성’이 된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할례’ 받은 자는 ‘하나님을 영으로 예배하고, 오직 예수를 자랑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자’라고 그는 밝히고 있습니다 (빌. 3:3)

셋째, “하나님께 은혜 받음으로” (By receiving the grace of God) 입니다: 모든 성도는 우리 스스로 남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남겨진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 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롬. 11:5)고 바울은 고백합니다.

오직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임을 감사하며, 날마다 그 분께로 나아와 산제사를 드리며 오직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이 시대의 남은 자로 살아가시 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그동안 로마서 (9장)말씀과 여러 다른 성경 말씀 가운데 드러난 ‘남은 자’ (A remnant)를 설교 가운데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이 <남은 자>에 관련한 영적 의미가 얼마나 깊고 큰가에 대해 강조 드린 바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무엇보다도 이 ‘남은 자 교리’는 어떤 특정한 시대나 특정한 그룹의 사람에게만 한정된 사상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원합니다. 도리어 이 ‘남은 자’교리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의 구원’이라는 성경의 중요한 주제와 밀접하게 연결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라는 큰 그림에서 이해되어지는 교리인 것입니다. 개인이나 혹은 민족의 삶이 비록 어둡고 절망적이라 할찌라도, 베어내고 남은 나무의 그루터기처럼 남은 자로 남겨 두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닫고 감사와 소망이 넘치는 시간되기를 기대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 (사. 1:9) 라는 이사야의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 남은 자에게 허락하신 주의 은혜와 믿음의 능력으로 이 어두운의 시대를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먼저, 저는 ‘남은 자’의 개념과 그것과 관련한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웨스터 민스트 신학사전>에서 보면 ‘남은 자’ (remnant)는 [원래 (=전제)그룹에서의 한 부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볼 때,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남게 된 자]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은 자’라는 사상은 사람에 따라 그 강조점이 다소 다를 수는 있지만 대부분 공통되는 점은 ‘하나님의 은혜로 남겨둔 자’ (롬. 11:5)가 남은 자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남은 자’의 사상은 곧 ‘구원받은 자’에 대한 교리요 또한 ‘하나님의 구원역사’라는 큰 그림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이스라엘과 기독교회의 전체역사에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구원과 믿음의 역사에서 성경은 우리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서 출발해야 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데로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서 이방 우상을 만들던 아비 집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셔서 ‘복의 근원’ 곧 믿음의 조상이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증거로 그의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셀 수 없이 많게 하셔서 허락하신 가나안 땅에서 번창케 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허락하신 것인데, 그냥 말 한마디로 끝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75세에 그를 이끌어 내시고 25년의 기간동안 구체적으로 그를 훈련하셔서 그가 100세가 되었을 때 드디어 약속의 아들 이삭을 주셨으며, 10여년이 흐른 후에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 번제로 드리라” (창. 22:2)는 명하심을 통해 마지막 믿음의 시험을 치루게 하시고 그 시험을 통과한 후에 그를 다시 한번 복주시고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후 이어져 내려오는 역사가 곧 성경 대부분에서 보게 되는 약속하신 그의 후손에 관한 기록인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의 육적 후손이라 할 수 있는 이스라엘 민족과 관련한 구원의 역사가 구약성경이라면, 그의 영적 후손인 우리 그리스도인에 관련한 구원의 역사가 신약성경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에 그의 자손 이스라엘민족이 어떻게 살았는지 하는 것은 구약성경이 적나라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 기록이 바로 <창세기> 중반 이후에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서 출발하여 구약성경 마지막 책인 <말라기서>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까지 대략 2000여년 동안 이어지는 이스라엘 민족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들 유대인들의 믿음을 어떻게 평가하시는 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그들의 믿음을 평가하셨습니까? 안타깝게도 그들의 믿음은 학점으로 표현한다면 ‘F 학점’입니다. 낙제점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민족의 믿음 없음과 불순종에 대해 질책하셨듯이,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결코 살지 못했습니다. ‘결혼한 아내가 남편을 향하여 응당 순결을 지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우상숭배와 육체적 타락을 끝없이 일삼으며 신랑 되신 하나님께 대한 영적인 순결을 지키지 않고 불순종하여 영적으로 그리고 육적으로 타락한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런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을 보내셔서 그의 자녀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시고 그 죄에서 회개함으로 그분께 돌아올 것을 촉구하는 심판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선포하는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스라엘의 긴 역사 가운데서도 특별히 하나님께서 그들의 심각한 죄를 강하게 책망하시고 엄중히 심판하실 것을 여러 선지자를 통해 집중적으로 선포하신 시기를 볼 수 있습니다. 그 때는 바로 앗시리아에게 북 이스라엘이 멸망 (BC 722년)당하고 대략 130년이 지난 후 남 유다 왕국이 역사상 가장 강대한 나라의 하나로 불리는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당하게 되는 사건 (BC 586년)을 뜻합니다.

에스라, 느헤미야,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스바냐, 오바댜, 나훔, 하박국 등과 같은 여러 선지자들이 거의 동시대에 하나님의 이런 엄중한 심판을 예언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 인 것 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관심 가질 점은 하나님은 이런 엄중한 심판 가운데서도 불구하고 그들을 완전한 멸망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은혜로 유다 민족 중 얼마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를 영적으로 함축한 것이 바로 ‘남은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멸망하는 이스라엘 가운데 남은 자를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남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된 후에 70년이 지나고 나서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남은 자를 통해 포로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가나안 땅으로 감격적인 귀환 (BC 538년)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은 그 은혜를 따라 남은 자를 통하여 그 깊고도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사. 10:21~22)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께서 ‘남은 자’를 남겨 주신 것이 진정으로 감사와 은혜가 되는 이유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두지 아니 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을 것)” (사. 1:9)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만약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하신다면 우리는 모두 멸망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귀환 이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까지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속해서 도전하는 한가지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약속의 말씀을 의심케 하는 시대상황을 믿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닷가의 모래 같은 자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남은 자로 남을 것인가? 하는 중대한 ‘남은 자’에 대한 도전인 것입니다.

이것이 대략적인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이어져 내려온 ‘남은 자’에 관련한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이 ‘남은 자’의 교리가 주는 중요한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이제 어떻게 우리는 남은 자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How may we become a remnant?) 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여호와께로 돌아옴으로” (By returning to the Lord) 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v. 21) 고 말입니다. ‘남은 자란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하나님은 ‘그는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 라고 ‘남은 자’를 정의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무엇이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뜻일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내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돌아왔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내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인 크리스챤이 되었다고 다 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비록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또한 <시편 51편>에서 보듯이 자신이 지은 죄악을 하나님 앞에서 눈물과 통회함으로 고백했음을 보게 됩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 511)라고 다윗은 그분의 얼굴을 구하며 정직하고 깨끗한 영을 회복하기를 구했던 것입니다. 남은 자로 살아가는 그 첫 걸음은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분을 경외함으로 그의 얼굴을 구하며 자신의 죄를 회개함으로 하나님 앞으로 돌아 가고자 하는 영적 자세일 것입니다.

둘째, “마음의 할례를 받음으로” (By receiving circumcision of the heart) 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 9장>에서 ‘누가 과연 진정한 이스라엘인가?’를 설명하면서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롬. 9:6,8)는 참된 이스라엘에 대한 영적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육신적으로 유대부모에게서 태어났거나 육신의 할례를 받았다는 것이 참된 이스라엘의 자격이 아니라, 약속의 자녀로 여기심을 받게 되는 자가 영적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 그 자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이스라엘 즉 ‘영적 이스라엘은 누구일까요? 사도는 이미 <로마서 2장>에서 분명하게 이점을 설명한바 있습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참 유대인이 아니며 육체에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참 할례가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에 참된 변화를 받은 사람이라야 참 유인인이며 기록된 율법이 아닌 성령님에 의한 마음의 할례가 진정한 할례입니다” (롬. 2:28~29/ 현대인의 성경) 라고.

어떤 분들은 이러한 사도 바울의 주장은 구약에서의 율법의 요구가 아닌 단순히 우리 기독교인들 만의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육체에 할례가 아닌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는 것은 유대인들이 생명처럼 지키는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을 그들 조상들에게 주었을 때 이미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 (신. 10:16)고 선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할례는 육체에 행하기 전에 마음에 행하는 것임을 율법을 주신 그 첫 순간부터 명하셨지만 그들은 그것을 무시했거나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마음에 행하는 할례입니까?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야 말로, 참으로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빌. 3:3)라고 사도는 마음에 할례를 정의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 드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며, 내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성도가 마음의 할례를 행한 자입니다. 여러분은 마음의 할례를 행했습니까?

셋째, “하나님께 은혜 받음으로” (By receiving the grace of God) 입니다: 우리는 지금 ‘누가 남은 자인가?’ 그리고 ‘어떻게 남은 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말씀을 마무리해 가면서 ‘남은 자’에 대해 이해해야만 하는 사실은 ‘남은 자가 되게 하는 주체가 우리 자신이 아니다’는 점입니다. 그 주체는 하나님이라고 성경은 너무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데로 사도 바울은 <이사야서 1:9> 말씀을 인용하여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 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롬. 9:29) 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남김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행위로 말한다면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할수 밖에 없지만, 오직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르고 남은 그루터기처럼 남김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구약시대에나 초대교회 시대에나 현세대에나 그 어떤 시기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음으로 남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롬. 11:5)는 바울의 선언은 ‘내가 남은 자, 즉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이 결코 나의 행위에 있지 않고 오직 그분의 택하신 은혜에 있음’을 겸손이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 (엡. 2:8)이요,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 (고전. 15:10)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남은 자의 합당한 믿음으로 날마다 그 분께로 돌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육신에 행하는 할례가 아니라 성령으로 마음에 행하는 할례를 받음으로 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고 자신의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아브라함의 합당한 영적 후손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런 여러분의 성령의 열매 맺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이 어둡고 혼탁한 세상 가운데서 오직 그분의 은혜로 믿음으로 승리하는 남은 자로 삶을 살수 있게 되었음을 증거하는 복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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