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30, 2020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Unless you bless me)

Preacher:
Series:
Passage: 창세기 (Genesis) 32:24~26
Service Type: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Unless you bless me)

8-30-20

본문말씀: 창세기 (Genesis) 32:24~26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So Jacob was left alone, and a man wrestled with him till daybreak.)

25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When the man saw that he could not overpower him, he touched the socket of Jacobs hip so that his hip was wrenched as he wrestled with the man.)

 26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Then the man said, “Let me go, for it is daybreak.” But Jacob replied, “I will not let you go unless you bless me.”)

 

[설교 요약]

야곱은 성경에서 가장 극적인 삶의 변화를 가져온 사람의 한 명 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서 그가 경험한 사건을 통해서 입니다. 우리가 특별히 <창세기 32장>을 읽어 나가면서 야곱이 ‘어떤 사람과 밤이 새도록 씨름했다’ 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야곱이 그 사람을 붙들며 간구했을 때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었는지? 에 대해 궁금해합니다.

이제 우리는 함께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기 하루 전날밤, 얍복 강가에 홀로 남아 보냈던 그 시간에 무슨 일을 경험한 것인지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질문할 것은 이것입니다. 과연 야곱은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일까요?” (How is Jacob able to get blessing from God?) 라고 말입니다.

첫째, “홀로 섬으로” 가능합니다 (By standing alone himself in front with God):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v. 24a) 여기서 야곱이 ‘홀로 남았다’는 것은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를 한사람 한사람 홀로 만나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군중 가운데서나, 무리 가운데서나 아니라, 홀로 선 단독자로 그분 앞에서 단독자로 만나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씨름함으로” 가능합니다 (By wrestling with God): 계속해서 <24절>은 “~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v.24b) 라고 그 상황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신학자들은 그 사람은 천사 혹은 성자 하나님이며, 야곱이 밤새도록 씨름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 치열하게 기도한 것이라고 주석합니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 홀로 섰을 뿐 아니라, 치열하게 그분 앞에서 기도로 영적 씨름을 한 것입니다.

셋째, “환도뼈가 부러짐으로” 가능합니다 (By being wrenched his hipbone by God): <25절>에서 “그 사람이 ~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v. 25)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환도뼈를 치셨다’는 것은 ‘야곱이 의지하고 자랑했던 그의 자아, 그의 인간성을 치셨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 환도뼈가 부러져야만 이스라엘로 변화될 수 있고,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 앞에 홀로 서서, 치열한 기도 가운데, 내가 의지하던 환도뼈가 부러짐으로 하나님의 참된 복을 날마다 누려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성경에 보면 한사람의 삶이 매우 극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순간이 드라마틱하게 묘사된 장면들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청년사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사도 바울로 변화되는 사건이 그 대표적인 사건일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서 오늘 본문의 야곱의 삶이 그러함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얍복 강가에서 홀로 남았다가 신비스럽게도 어떤 사람과 씨름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으로 부터 ‘이스라엘’ 즉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 혹은 ‘하나님의 황태자’라는 놀라운 새이름에서 상징되는 본질적인 변화를 그는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야곱>을 <이스라엘>로 변화시키신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지를 더욱 분명히 이해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이를 깨닫아 나감으로 하나님만이 그분의 방법으로 주실 수 있는 진정한 복을 간절히 구하며, 날마다 더욱 구체적으로 응답받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저는 성경에서 거듭난 성도라면 반드시 누려야 할 중대한 영적 경험이 오늘 본문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말씀은 매우 신비롭고 그 정확한 상황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데로,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창. 25장>에 보면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오랜 기다림 끝에 아기를 갖게 되었는데, 아이는 쌍둥이였습니다. 이들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싸웠고 하나님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창. 25:23)고 그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은 태어났고, 먼저 태어난 아이는 온 몸이 갑옷처럼 붉은 털로 덮었다고 해서 ‘에서’라고, 나중에 태어난 아이는 형의 발꿈치를 움켜잡고 태어났다고 해서 ‘야곱’이라 이름 지어졌습니다.

형 에서는 ‘들 사람’이 되어 밖으로 나가 활발하게 짐승을 사냥하였고, 그가 잡아온 짐승의 고기를 좋아하는 이삭은 에서를 좋아했습니다. 반면 야곱은 ‘마마보이’처럼 요리하고 집안 일하는 엄마 리브가 주위를 맴돌며 ‘집사람’ 이 되었는데, 엄마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외모나 성격이나 기질이 아니라, 영적 상태인 것입니다. 이 두 쌍둥이 형제의 삶이, 다시 말해 ‘영적 삶’이 극명하게 갈라지게 되는 2가지 사건을 성경은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이들의 삶이 어떻게 갈라지게 될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팥죽 한 그릇 사건>입니다. <창. 25장>에서 이것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창. 25:29~34 (읽기)” … <창. 25:29>을 보면, 야곱이 의도적으로 형의 장자권을 빼앗고자 형이 배고픈 뜸을 기다려 팥죽을 쑤었는지, 아니면 그가 팥죽을 끓이고 있을 때 때마침 형 에서가 허기진 상태로 집에 오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야곱은 장자권의 가치를 매우 귀하게 여기고 그것을 소유하기 원한 반면, 에서는 장자권을 가볍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이런 에서의 영적 상태를 “망령되다”고 평가하심에 우리는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히. 12:16) 고. 이 팥죽사건을 통하여 야곱과 에서의 영적 상태가 어떠한가를 상징적으로 밝혀주고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둘째는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는 사건>(창. 27장)입니다. 사실 이 사건은 야곱과 어머니 리브가가 합작하여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그로부터 장자권의 축복을 받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이것만 따로 떼내어 생각해본다면, 당연히 야곱과 리브가가 잘못된 행동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리브가가 ‘에서와 야곱’을 임신했을 때, 하나님께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창.25:23) 고 아무리 말씀했다고 할찌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팥죽사건’이 발생하고 나서 ‘장자권 축복사건’이 벌어지는 기간 사이에 에서가 어떠한 삶을 지속해서 살았는지를 짐작케 하는 <창. 26장> 마지막절 (v.34~35)의 짤막한 설명이 의미심장 합니다. “에서가 사십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취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의 근심이 되었더라”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야곱이 엄마와 동조하여 장자의 축복을 빼앗은 것은 어떤 것으로도 변명될 수 없는 잘못된 행동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 에서는 장자권을 팥죽한그릇에 팔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금하시는 이방여인에게 장가들며 장자권을 받기에 합당한 영적 조건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삶을 계속해서 살아왔음을 우리는 안타깝게 목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찌됐건,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여 장자의 축복을 받았음을 뒤늦게 알게 된 에서는 야곱을 죽이고자 결심하게 되고, 이것을 눈치챈 엄마 리브가가 야곱을 외삼촌 라반 집에 형의 노여움이 수그러 들때까지 잠시 피해 있으라고 보냅니다. 그러나 결국 야곱은 어머니가 죽고 20년이 지난 뒤에 비로소 다시 고향집으로 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략적으로 살펴본 오늘 본문말씀의 배경이 되는 스토리가 됩니다. 야곱은 그의 ‘야곱’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외삼촌 라반 집에 있는 20년 동안 11명의 자식들과 수많은 가축 떼를 빼앗고 쟁취하여 이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고향을 떠난 지 20년만에 돌아오는 것이건만 여전히 바뀌지 않은 사실이 있다는 점입니다. 형 에서가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복수심에 불타 있다는 사실입니다. 형이 400여명을 거느리고 자신에게 달려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32:6). 야곱은 (하나님께 먼저 기도한 후에) 형의 마음을 누르러 트리고자 선물로 줄 짐승들을 세 떼로 나눠 보내고 또한 정확히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자기의 모든 소유물과 아내와 자식들까지도 먼저 강 건너 보내고, 홀로 남아 밤을 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비롭게도 오늘 말씀에서 보는 것과 같이 어떤 사람과 밤이 새도록 씨름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날이 밝아 오고자 할 때 그 사람이 “나로 가게 하라” (v.26a) 말했을 때, 야곱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v.26b) 라고 그에게 매달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에게 축복하시는 놀라운 장면을 보게 됩니다 (v.29).

이제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기 하루 전날, 얍복 강가에 홀로 남아 보냈던 그 시간에 무슨 일을 경험한 것인지에 대해서 함께 묵상해 보겠습니다. 이 신비스럽고도 제가 앞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거듭난 성도라면 경험해야 마땅한 중대한 영적 순간을 야곱은 어떻게 경험하게 되는 것일까요? 과연 야곱은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일까요?” (How is Jacob able to get blessing from God?)

첫째, “홀로 섬으로” 가능합니다 (By standing alone himself in front with God):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야곱이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v.24) 라고. 여기서 야곱이 ‘홀로 남았다’는 것은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야곱의 경우에서 본다면, 부모 형제를 떠나 홀로 된 순간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앞에서 잠시 살펴본 데로, 그가 형 에서의 노여움을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는 여정이 그것이었습니다. 홀로 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순간이 아니지만, 그가 홀로 빈 광야에서 돌 베개하고 잠을 잤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천사들을 보내셔서 ‘하늘의 문’, 즉 ‘벧엘’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어디에 가든지 그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함께 하시며, 고향 땅으로 반드시 돌아오게 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창. 28:10~22).

이와 같이 야곱은 형을 피해 홀로 고향을 떠났고, 이제 20년이 지난 후 또 다시 하나님 앞에 홀로 단독자 (單獨者)로 서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홀로 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홀로 선다는 것은 외롭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홀로 서는 모습에서 우리가 깨닫아야 하는 것은 이것이 진정한 크리스챤이 되는 첫 걸음이라는 사실입니다. (가족이 크리스챤 가정이라고 내가 크리스챤 x) 그렇다면, 왜 우리가 홀로 선다는 사실이 중요할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인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단독자로 만나기 원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공예배와 기도모임을 통해 함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 뿐 만 아니라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따로 만나기 원하십니다. 지극히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만나서 그분과 교제하고 더 깊은 대화를 나누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을 홀로 만나고 있습니까? 군중 가운데서가 아니라, 무리 가운데서가 아니라, 단독자로서 홀로 하나님과 만나고 있습니까?

둘째, “씨름함으로” 가능합니다 (By wrestling with God): 제가 오늘 말씀을 전하면서 여러 번 ‘신비하다’고 표현한 이유는 <24절>에서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했다)” (v.24b) 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여기서 ‘어떤 사람’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이며 ‘날이 새도록 야곱이 그 사람과 씨름했다’는 것은 또 무슨 의미일까요? (천사/ 간절한 기도의 씨름….) 많은 신학자들은 그 사람은 ‘하나님의 천사’ 라고 지적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학자는 그가 언제나 하나님의 앞에 있는 천사 (사. 63:9), 즉 ‘세키나’ (Shechinah)라고 하고, 또 다른 학자는그가 천사장 ‘미가엘’일 것이라고, 그리고 어떤 학자는 그 사람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 전의 ‘성자 예수님’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야곱이 밤새도록 씨름한 그 사람은 바로 ‘하나님 자신’임을 알 수 있다는데 그 신비함과 놀라운 영적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압니까? 야곱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창. 32:30) 라고 말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도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심을 이렇게 영적으로 설명합니다.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 (호. 12:3~4) 라고. 그렇다면 무엇이 ‘어떤 사람과 씨름했다’는 의미일까요?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야곱이 밤새도록 씨름했다’는 성경의 표현은 ‘그가 밤새도록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솔직히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부족한 것 중의 하나가 ‘기도’아닌가요? 그것도 오늘 얍복 강가의 야곱과 같이 밤을 새우며 ‘하나님과 씨름’했다고 표현될 정도로 어떤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한 분 앞에서 치열하게 그 분만이 주실 수 있는 진정한 축복을 주시기를 생명을 걸고 기도하는 자세가 우리에게 있나요?  하나님은 야곱 한사람만이 아니라, 그의 모든 자녀들이 그분 앞에 나아와서 치열한 기도 가운데 그분과 씨름하기를 원하심을 저는 믿습니다. 그 때 우리의 아버지는 이렇게 여러분과 저에게 이렇게 기도의 응답을 주실 것입니다. “네가 나와 더불어 겨루어 이겼다”라고 말입니다.

셋째, “환도뼈가 부러짐으로” 가능합니다 (By being wrenched his hipbone by God): 야곱이 어떤 사람과 밤새도록 씨름했다는 사실뿐 만 아니라, 그 씨름의 전개상황 또한 흥미롭습니다. 제 말씀은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 되었더라” (v. 25) 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야곱과 씨름한 그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그는 천사 혹은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한 천사나 심지어 성자 하나님께서 야곱 한사람과 씨름해서 이기지 못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는 이런 상황 설명을 인간적인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이 씨름이 단순히 전국 장사씨름대회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치열한 기도의 영적 모습이라는 점을 우리의 깨닫았을 때 <25절>을 즘 더 분명하게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람이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를 이기지 못하여서 야곱의 환도뼈를 쳤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 힘이 부족했다는 의미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냥 겉으로 보기에는 그 사람이 야곱에게 지는 것처럼 보이는 그 상황에서 그가 야곱의 환도뼈를 쳤다는 것은 영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야곱을 최종적으로 돕고 있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은 ‘야곱이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을 받기 위해선 환도뼈가 부러져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환도뼈는 무엇입니까? 환도뼈는 인체 구조적인 측면에서 볼 때, <대퇴부와 상반신을 연결시켜 주는 뼈>로써 온 몸을 지탱해 주는 역할을 하는 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환도뼈를 치셨다는 것은 야곱을 의지하고 지탱하고 있던 것을 치신 것입니다. 그것은 ‘야곱이라는 이름으로 상징되는 인간성’을 치신 것입니다. 바로 ‘자신의 목적을 쟁취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움켜잡고 빼앗는 야곱이라는 인간성’을 치신 것입니다.

야곱은 사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의 삶 중심에 여전히 자신의 육신의 기질을 자랑하고 의지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목표설정과 치밀한 계획, 부지런 함과 강한 추진력을 통해 그 목표를 쟁취하는 자신의 자아, 즉 ‘야곱’이라는 인간성을 자랑하고 의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을 이스라엘 즉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하나님의 황태자’라는 놀라운 축복을 주시고자 반드시 그가 의지했던 환도뼈를 치셔야 했던 것입니다. 바로 ‘야곱이라는 인간성’을 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비로소 하나님은 그의 존재를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성도 여러분이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는 간절한 기도의 제목은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에게 주시기 원하는 진정한 축복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오늘 본문 <창. 32장>에서 야곱이 홀로 남아 어떤 사람과 씨름한 사건은 정확히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을 받는 과정을 뜻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만이 그분의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주실 수 있는 진정한 축복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수 믿어 거듭났다고 믿음이 자동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다고 했습니다. 브루스 윌킨슨의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에서 소개되듯이, 천국에 간 존은 사도 베드로가 보여주는 한 <선물 창고>에서 자신 앞으로 보내졌던 그 많은 선물들이 뜯기지 않고 그대로 선반위에 놓여져 있는 것을 그는 뒤늦게 안타까움으로 바라 보아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 선물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축복인 것입니다. <역대상 4:9~10>에 등장하는 야베스가 평생을 통해 하나님께 구했던 것이 바로 그분의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받았던 축복입니다. 그분 앞에 홀로 섬으로서, 치열한 기도 가운데 그분과 씨름함으로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직접 내가 의지해고 자랑했던 환도뼈를 치심으로서 비로소 받게 되는 축복인 것입니다. 이런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을 간절히 사모하며 그분의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받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