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mber 1, 2020

“참된 예배” (II) (The True Worship)

Preacher:
Series:
Passage: 요한복음 (John) 4:23~24
Service Type:

“참된 예배” (II)

(The True Worship)

11-1-20

본문말씀: 요한복음 (John) 4:23~24

23 아버지께 참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Yet a time is coming and has now come when the true worshipers will worship the Father in spirit and truth, for they are the kind of worshipers the Father seeks.)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God is spirit, and His worshipers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설교 요약]

            우리는 지난 주에 이어서 무엇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인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무엇이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예배인지?’에 대해 부정적 의미의 <네가지 잘못된 예배>를 점검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무엇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인가? 라는 긍정적 의미의 예배를 묵상해 보겠습니다.

사실 성경에는 수없이 많은 <영적 예배>에 관련된 말씀들이 있지만, 저는 그 중에서도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장>을 시작하면서 성도들에게 도전한 말씀이 그 중심적인 말씀이라 믿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1~2)

사도는 여기서 우리 크리스챤이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께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인지를 탁월하게 영적으로 밝히고 지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크리스챤의 성화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잘 설명하고 있으며, 이와 같이 성도가 살아가는 하루 24시간, 일년 365일이 모두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 (=제사)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몇 가지 점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첫번째는,

  • ‘산 제사’ (a living sacrifice) 입니다. 산제사가 의미하는 것은 구약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렸던 제사는 짐승을 죽여 ‘희생제물’ (sacrifice offering)으로 드렸지만, 이제는 우리의 몸을 삶을 통하여 계속해서 드린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Do not conform any longer to the pattern of this world)는 것입니다. ‘이 세대’라는 말은 ‘이 시대의 풍조요 가치관’라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이 추구하는 ‘돈과 섹스와 권력’이라는 풍조에 휩쓸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바리새인들이 보였던 것처럼, 스스로 높아지고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삶 까지도 본받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이 모두 세상을 좇아왔기 때문입니다.
  •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는 것입니다 (But be transformed by the renewing of your mind)는 것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뜻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새롭게 결심한다’ (make up our minds)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 인격적 변화’입니다. ‘내 심령과 사고방식 전체의 변화’입니다. 주께서 ‘팔복’에서 말씀하신 심령의 변화입니다 (마. 5:3~12). 그리고 이 변화는 하나님을 온 마음과 뜻을 다해 사랑하고, 그로 말미암아 그분을 더욱 알아감으로 약속하신 성령께 순종함으로 열매 맺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을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그의 자녀를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더욱 알아 나가고, 알아 나가는 만큼 그분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를 여러분 자신을 드리는 영적 예배를 올려 드리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지난 시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진정한 예배가 어떤 것인지를 함께 묵상해 보았습니다. 특별히 무엇이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예배인가에 대해 <4가지 잘못된 예배들>을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서 역설적으로 무엇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인지를 이해해 나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예배자가 될 수 있는 자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만이 가능함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모든 구원받는 자가 진정한 예배자는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요한복음 본문말씀에서 사마리아 여인 한사람 뿐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를 향해 진정한 예배자로 살아갈 것을 도전하시고 초청하시는 이유일 것입니다. 바로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영과 진리로 예배 드리는 그의 자녀를 지금도 찾으시는 것입니다. 내가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하나님 아버지를 더욱 사랑함으로 그 분을 알아 나가며 그분을 알아 나가면 나갈수록 영과 진리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자로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배자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이 참된 예배인지?’ ‘무엇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인지?’를 좀 더 확장된 개념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예배가 단순히 주일 날 혹은 정해진 요일에 함께 모여 드리는 공예배가 전부가 아니라면, 이 예배는 보다 확장된 의미로 이해될 것이고, 또한 적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크리스챤에게 무엇이 진정한 영과 진리의 예배인지를 탁월하게 설명하는 말씀이 <롬. 12:1~2>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1~2)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구원의 진리를 차근 차근 치밀한 영적 논리와 충만한 성령의 감동을 통해 모두 밝히고 난 다음, 이제 <12장>을 시작하면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모든 선하심과 자비하신 구원의 진리를 설명하고나서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연결하면서 한가지로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우리 크리스챤이 드릴 ‘영적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영과 진리의 예배’요, 곧 ‘영적 예배’ (spiritual act of worship/ reasonable service)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집중해서 살펴 볼 것은 이것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인가?” (What is a living sacrifice, a holy, acceptable unto God?)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은 “산 제사” (a living sacrifice) 라는 단어입니다. 무엇이 사도가 여기서 의미하는 산제사의 의미일까요? 우리가 ‘산 제사’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선,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혹은 ‘예배’의 중심에는 ‘짐승의 생명을 바쳐 드리는 제사’ 즉 ‘희생제물의 제사’ (the sacrifice offering)가 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인류의 첫 조상 아담과 하와의 두 아들, 카인과 아벨이 제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잘 기억하듯이 하나님은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지만, 카인과 그 제물은 열납치 않으셨습니다 (창. 4:4~5). 그 이유는 크게 2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첫째>는 아벨의 제사는 ‘중심으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그러나, 카인의 제사는 ‘형식적인 제사’ 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히. 11:4)고 밝히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아벨은 믿음으로 드렸고, 카인은 믿음으로 드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아벨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를 드렸지만, 카인은 자기 방식 (=멋대로)의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지만, 카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창. 4:3~4). 그 결과 하나님은 아벨의 양의 제사는 받으셨으나, 카인의 곡물의 제물은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동물로 바치는 제사는 좋아하시고, 곡물로 드리는 제사는 싫어하신다는 뜻일까요? 결코 그렇치 않습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규례를 말씀하실 때 ‘감사제사’로서 <소제> (Grain Offering)와 같이 곡물을 불살라 드리는 제사에 대해 명령하실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께서 카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신 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어떤 제물을 좋아하시느냐?’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문제는 본질적으로 서로 통하는 ‘구약의 제사’와 ‘신약의 예배’에서 그 ‘제사’ (=예배)를 드리는 중심 목적의 하나는 ‘하나님의 구속하심’ (the redemption of God)을 기리고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자녀를 구원하신다는 것은 성경적 의미에서 “값을 주고 건져 낸다” 즉 “대속하다”는 것입니다. 영적 의미에서 죄는 죽음을 의미하고 그 죄를 사하기 위해선 대신 생명이 요구되었습니다. 바로 피의 희생 제물인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첫 제사였던 카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부터 시작되었는데, 아벨은 그 하나님의 죄 사하심과 구속하심에 합당한 양의 희생제사로 드렸지만, 카인은 그렇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잘못된 예배 4가지> 중에서 한가지가 ‘참 하나님께 예배하지만, 자기 방식의 예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론의 두 아들들이 하나님께 제사 드릴 때 향로의 불을 명령하지 않은 엉뚱한 곳에서 가져옴으로써 그들이 제사 드릴 때 불이 나와서 그들을 죽게 하셨음을 살펴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카인의 제사는 참 하나님께 예배 드렸지만 자기 스타일로 자기 마음데로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한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죄를 대속하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한 ‘희생제물’의 제사를 드리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곡물’로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데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는 곡물을 드리는 ‘소제’와 같은 감사제사도 있었지만, 반드시 우리 인간의 죄를 속죄하는 ‘대속제사’ 즉 짐승의 생명의 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희생제물의 제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카인은 자기 마음데로 자기가 편한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시고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도 바울은 이런 카인과 같은 자기 방식의 예배가 아니라, 아벨과 같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희생제물의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롬. 12:1>에서 “너희 몸을 ~ 산제사로 드리라”고 도전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우리 몸을 산제사로 드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앞서 살펴봤듯이, 구약에서는 ‘양과 염소와 같은 짐승’을 죽여 그 피로서 희생제물의 제사를 드렸지만, 사도는 ‘짐승대신에 우리 각자의 몸’으로 희생제사를 드리자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합당하게 받으실 ‘희생제사’를 드릴 수 있을 것인가? 가 사도가 도전하는 핵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다음 질문은 이것입니다. 무엇이 우리 몸을 산제사로 드리는 것일까? 입니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무엇이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이제 ‘참 예배의 성경적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드러난 참 예배의 진리를 가지고서 어떻게 삶에서 실천해 갈수 있을 것인가? 즉 믿음의 <적용>에 대한 질문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은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지식에서 자라나가며, 하나님을 알아 나간 만큼 어떻게 그를 영화롭게 하며 합당한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있을 것인가를 영으로 깨닫아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 성도들은 ‘영적 성숙’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하나님은 누구시며, 그 분이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는 무엇인지를 주의 깊게 묵상하고, 말씀의 가르침을 통해 깨닫아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크리스챤이 믿음으로 행하는 본질입니다.

이제 그 다음으로 해야 할 것이 그 깨닫은 진리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어떻게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릴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 요약되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서 깨닫은 진리를 어떻게 삶에서 적용할 것인가하는 문제는 성경의 진리를 깨닫아 나가는 것만큼 영적으로 중요하고 이해하기 힘들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 (마. 7:16) 라고 우리 크리스챤이 어떻게 삶을 살아가느냐?! 의 중요함을 도전하셨듯이, 우리 성도가 성경의 진리를 바로 깨닫았다면 올바른 적용을 통해 삶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빛을 잃어버리고, 소금이 그 짠맛을 잃어버릴 때 쓸모가 없듯이, 여러분과 제가 진리의 말씀을 알아가고 있다면 반드시 삶 속에서 올바른 적용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이 산제로 드리는 삶인지?’에 대한 적용에 대해 고민하고 묵상해야 할 중요한 이유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일까요?” (What is that we off our bodies as a living sacrifice, a holy, acceptable unto God?)

이미 앞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무엇이 예배인가를 정의함에 있어서 그것은 단순히 주일 혹은 특정한 요일에 모여서 드리는 공예배가 예배의 전부가 아님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예배는 우리 성도가 살아가는 하루 24시간, 일주일 7일 모두가 예배임을 우리는 잘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크리스챤이 살아가는 모든 삶속에서 적용되어질 예배의 의미를 모두 자세히 언급하기에는 한 두번의 설교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감사하게도 우리 성도들에게 “너희 몸을 ~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말하고는 끝내지 않고, 어떻게 거룩한 제사로 우리 몸을 드릴 수 있을 것인지를 다음 구절에서 핵심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Do not conform any longer to the pattern of this world, but be transformed by the renewing of your mind. Then you will be able to test and approve what God’s will is – His good, pleasing and perfect will.) (롬. 12:2); 사도는 우리 성도들이 삶 가운데서 ‘산 제사로 우리 몸을 어떻게 드릴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적용의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2가지 가르침을 이어지는 <2절>에서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본받지 말라” (Do not conform)는 것이고, 둘째는 “변화를 받아라” (Be transformed)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이 두가지 핵심 단어를 중심으로 어떻게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릴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적용의 문제를 다뤄보고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첫째,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 입니다 (Do not conform any longer to the pattern of this world): (‘conform’ & ‘transform’에 대한 원문의미 찾아볼 것!!!) 사도는 먼저 부정적 혹은 소극적인 권면으로 성도가 자기 몸을 어떻게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릴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엇을요?!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요! 이것을 <표준새번역>에는 “이 시대의 풍조”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 혹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거나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풍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돈, 섹스, 파워’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서 소망없이 살아가던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자랑하던 이스라엘민족은 애굽에 종살이하면서 이 시대의 악한 풍조를 따라 살아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십계명>에서 ‘제 4계명’“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제 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를 제외한 여덟 계명이 모두 ‘하라’ 가 아니라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 살인하지 말지니라. 간음하지 말지니라.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이것은 한마디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그분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쉬 세상의 풍습을 따라 악에 물들기 쉬운 존재인지를 깨닫아 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는데 그치지 말고, 저항하고 싸우라는 것입니다. 누구와 싸울까요? 바로 ‘육신에 속한 자아’입니다.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천사가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신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의 영광스러운 존재이지만, 죄가 거하는 육신의 장막을 입고 살아가기에 우리 성도들의 삶은 여전히 실수하고 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하는 이유임을 저는 여러 번 강조했습니다. 이것이 성도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육신의 소욕’과 ‘세상 주관자인 사단 마귀’와 더불어 피 흘리기까지 싸워 나가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것은 결코 쉬운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 타락한 육신의 본성을 입고 살아가는 인간이기에, 우리 성도들까지 세상을 본받고자 하는 강력한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저도 받고, 여러분도 받습니다. 심지어, 사단 마귀는 예수님까지도 유혹했습니다 (눅. 4:1~13). 그러나 주님은 말씀으로 물리치심으로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이 세대를 본받지 않을 수 있을까요? 여기에 대한 사도의 가르침이 이어지는 말씀이라 믿습니다. 그것이

둘째,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는 것입니다 (But be transformed by the renewing of your mind): 이솝우화에 보면,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떻게 본다면, 이미 결론은 다 내려졌고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두 인식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그 문제를 없애야 할지에 대한 방법을 찾지 못할 때 쓰는 말입니다. 이 세상의 가치와 가르침, 돈을 사랑하고, 육신을 사랑하고, 권력을 추구하는 이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지 않고, 그것을 거부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각자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길이라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바울은 이렇게 분명히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라고.

성도가 ‘산 제사’로 살아가기 위한 첫번째 단계가 ‘본받지 말라’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개념’에서 출발했다면, 두번째 단계는 ‘변화를 받으라’는 보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개념’으로 이어짐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가 우리 성도에게 도전하는 핵심은 “변화를 받으라” (Be transformed)라는 것인데, 이것은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by the renewing of your mind) 가능하다고 그는 역설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실로 영광스럽고 축복된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불신자들에게는 이런 은혜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여기서 의미하는 변화는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 믿고 성령을 통해 거듭난 성도의 삶에서만 경험되는 변화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도전한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저는 이것을 ‘전 인격적인 변화’라고 부르기 원합니다. 이것은 생각이나 사고의 한가지 변화가 아니라, ‘내 심령과 사고방식 전체의 변화’를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챤의 성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신앙을 방해하는 죄를 하나 하나 열거하여 없애 나가는 작업이 아니라, 내 인격 전체의 본질적인 변화를 통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변화를 경험한 성도의 마음상태를 가장 잘 묘사한 것이 주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팔복을 누리는 자’의 상태일 것입니다 (마. 5:3~12). 즉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의 심령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심령의 변화를 가져오는 전인격적인 변화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구원받은 자에게만 이런 변화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은 온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아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우리는 그 분을 더욱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통하여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사랑할 수 있도록 내 속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전적으로 순종함으로서 내 전인격의 변화는 가능하게 됩니다. 바로 성령의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을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그의 자녀를 찾고 계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심령의 변화를 받게 될 때 일어날 구체적인 예배의 모습을 모두 열거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 중에서 몇 가지만 살펴보자면, “<공동체 안>에서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예배” (로마서 14:18), “<불신자를 구원>하는 것이 예배” (로마서 15:16), “<빛 가운데 거함>이 합당한 예배” (에베소서 5:16), “<자족함>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빌립보서 4:18), “<중보기도>가 합당한 예배” (디모데전서 2:3),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합당한 예배” (디모데전서 5:4), 그리고 “<의로운 고난> 받는 것이 합당한 예배” (베드로전서 2:20)라고 성경은 우리 성도의 삶 전체가 예배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며 여러분에게 다시한번 도전하고 격려하기 원하는 것은 우리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그의 자녀를 찾고 그의 예배를 받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을 더욱 알아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가장 적극적인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더욱 알고, 아는 만큼 예배로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받으시는 합당한 예배,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를 올려드리는 복된 그의 자녀 모두 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