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 21, 2024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Unless You Are Circumcised)

Preacher:
Passage: 사도행전 (Acts) 15:1~2
Service Type: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Unless You Are Circumcised)

4-21-24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15:1~2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Some men came down from Judea to Antioch and were teaching the brothers: “Unless you are circumcised, according to the custom taught by Moses, you cannot be saved.”)

2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 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This brought Paul and Barnabas into sharp dispute and debate with them. So Paul and Barnabas were appointed, along with some other believers, to go up to Jerusalem to see the apostles and elders about this question.)

[설교 요약]

            <사도행전 15장>은 <제 1차 예루살렘회의>가 열린 이유와 그 회의결과를 기록되어 있습니다. <15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v.1)라고.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갈라디아서’와 여러 서신서에서 언급된 ‘할례를 행해야 구원받는다’고 잘못되게 가르치는 거짓선생들을 말합니다.

이로 인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이들 유대주의자들 사이에 적지 않은 다툼과 논쟁이 벌이지게 되었고, 결국 이런 논쟁은 <예루살렘교회>에 사람들을 보내어 교회지도자들에게 이 문제를 처리해 줄 것을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예루살렘회의를 통해 드러난 구원의 진리일까요? 그것은

첫째, “우리 모두는 편견과 선입관을 가진 존재”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하나님은 베드로의 편견과 선입관을 없애기 위해 ‘부정한 짐승이 담긴 보자기 환상’을 보여주시고, 그에게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행. 10:1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이방인에게 할례를 주장하는 거짓교사들의 문제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앞서 설명한데로 베드로가 ‘부정한 짐승의 보자기 환상’을 보고나서, 이방인 고넬료를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 구원한 사건을 듣고, 예루살렘성도들이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행. 11:18)라고 놀라워했습니다. 구원의 복음은 하나님의 차별하지 않으시는 은혜를 선포합니다.

셋째, “구원은 율법으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며,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라고 선언합니다. 이 말은 ‘할례를 포함한 그 어떤 행위가 아니라,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거져 주시는 선물임을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민족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오직 믿음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십니다. 이런 구원받은 자로서 합당하게 죄와 육신과 싸워 승리하는 성도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오늘 <사도행전 15장>의 본문말씀은 기독교회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제 1차 예루살렘회의>가 열린 이유와 그 회의결과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예루살렘 회의의 핵심 쟁점은 ‘하나님의 구원은 <율법>으로부터냐? 아니면 <은혜>에 의해서냐?’는 것입니다. 제가 <사도해전 15장>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놀라움과 감사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이미 사도행전이 처음 시작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성령충만을 통해 땅 끝까지 이르러 주의 증인이 되는 제자들’을 지켜 주시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오늘 15장 말씀에서도 그분의 몸된 교회에서 함께 하셔서 기독교회 2천년 역사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신앙의 쟁점을 결정 내린 사건의 하나인 첫 교회회의에서 성령의 임재와 강권적인 도우심 가운데 사도들을 통해 구원의 진리를 선포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우리 각자의 구원을 되돌아보고,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를 더 깊이 묵상하고, 율법과의 관계를 영적으로 깨닫아 감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의 날까지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하는 축복된 성도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사도행전 15장>은 시작하면서 문제의 발단이 된 개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v.1)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상황일까요? 우리가 사도 바울이나 사도 요한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서들을 읽어보면 계속해서 언급되는 ‘거짓교사 (거짓선생)이 바로 이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초대교회가 태동하면서부터 나타난 이런 거짓교사들은 다양한 형태로 오늘날까지 독버섯같이 악한 세력을 떨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율법주의’와 ‘영지주의’가 그 대표적인 거짓교사들의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영지주의자들’의 거짓된 가르침에 대해서는 사도 요한의 서신서에서 자세히 경고하고 있고, ‘율법주의자들’의 잘못된 사상은 사도 바울의 로마서와 여러 서신서에 또한 자세히 경고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갈라디아교회>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의 할례를 강요하는 이런 율법주의자들의 대한 분명한 경고와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이 편지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갈라디아교회 안에 들어온 거짓교사들의 가르침을 경고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 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함이라” (갈. 1:6-7)라고. 이들은 ‘가만히 교회 공동체 안에 들어와서’ (갈. 2:4) 거짓 가르침을 일삼고, 교회를 분열시키고, 거짓사상으로 미혹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이것을 종합해 볼 때, 이들 거짓 교사들은 그 주된 거짓 가르침의 핵심은 ‘율법을 지킴으로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이 유대인들로서 ‘유대 전통의 율법준수’를 그 성장배경으로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점을 통해 우리가 다시 한번 이해하게 되는 것은 우리 모든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요, 자신이 자라온 ‘성장배경’과 고정화된 ‘가치관’에 따라 서로 다른 스펙트럼을 통해 사물 (세상)을 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신실한 성도들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유대지역에서부터 어떤 자들이 바나바와 바울이 사역했던 첫 이방교회 <수리아 안디옥교회>에 와서 형제들을 가르쳤는데, 이들의 가르침이 매우 심각한 교회의 분열을 초래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율법준수’를 신앙의 우선순위로 여기며 성장해온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서, 안디옥교회 성도들에게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v.1b)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교회의 분열을 가져오고, 복음의 진리와 부딪히는 지는 제가 새삼 강조할 필요조차 없는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이들 유대주의자들 사이에 적지 않은 다툼과 논쟁이 벌이지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런 논쟁은 그 당시 여러 흩어져 있던 초대교회의 모교회이자, 예수님의 사도들이 섬겼던 <예루살렘교회>에 몇 사람을 보내어 사도들과 정로들에게 이 문제를 처리해 줄 것을 요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이와 같은 거짓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첫 회의가 열렸다고 말씀드렸는데, 그 핵심쟁점은 ‘하나님이 구원은 <율법에 의해서냐?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냐?’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톡별히 이 문제의 초점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이방인’인 점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사도행전 15장>이 쓰여질 이 당시, 사도들과 장로들과 같은 교회의 대표적인 리더들까지도 명확하게 분별하지 못한 구원의 핵심적인 사안의 한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이방인들에게는 어떻게 구원이 주어지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으로 이제 복음이 세상 만방으로 퍼져가는 그 첫 시작점에서 ‘이방인에게 생명의 구원을 가져오는 복음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라는 점을 분명히 이해하고, 전도자들이 확신가운데 증거하는 것이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지역에서 온 몇 명의 유대주의 교사들의 주장처럼 ‘율법준수를 통해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 올바른 주장인가?’를 분명히 성경말씀에 비추어,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바로 깨닫고 이해하는 것은, 단지 안디옥교회 뿐 아니라, 모든 교회에 있어서 ‘구원’에 대한 교리에 있어서 중대한 시금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는 가 하는 것이 기독교 2천년 역사를 통해 ‘교회의 정체성과 복음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결정하는 순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감사하게도 이런 순간에 하나님은 그의 성령의 충만하심으로 사도들과 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지키시고 하나되게 인도하셔서 ‘진정한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를 교리적으로 분명하게 깨닫고 결정하는 은혜를 교회 공동체에게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이런 첫번째 <예루살렘회의>라는 교회사의 중요한 이정표를 남긴 회의를 통해 우리가 영적으로 깨닫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과연 무엇이 예루살렘회의를 통해 드러난 구원의 진리일까요? 그것은

첫째, “우리 모두는 편견과 선입관을 가진 존재다”는 것입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먼저 <제 1차 예루살렘회의>가 열리게 된 동기를 살펴보면서, 우리 모든 인간은 각자 성장한 배경과 살아온 삶의 방식에 따라 형성된 편견과 선입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임을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나는 남들과 다르다’라고 우리가 확신하는 순간, 우리는 어쩌면 ‘나 자신이 만들어 놓은 율법’을 자랑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충만하다고 자랑하고, 확신했던 유대인들처럼, 어쩌면 성령을 대적하는 자리에 설 수 있음을 우리 각자는 겸손히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잘 드러낸 말씀의 하나가 바로 <사도행전 10장>말씀인데, 주께서 경건한 이방인인 백부장 ‘고넬료’를 생명의 복음으로 구원케 하고자, 베드로에게 ‘부정한 짐승이 담긴 보자기 환상’을 보여 주시고, 성령께서 직접 그에게 지시하심으로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문이 열렸음을 확인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하늘의 음성과 같이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행. 10:15)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율법의 잣대로 이방인을 속되다고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비록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요, 초대교회의 가장 신실한 성도의 한명 이었지만, 그 역시 유대인으로 성장해 왔기에 유대주의 전통에 따라 그 정결의식이라는 율법의 틀 안에서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으로 마음이 갈라져 있었고, ‘할례’의 문제에 있어서도 ‘할례 받았느냐, 아니냐?’에 따라 <정한 자와 부정한 자>로 사람을 평가했던 것입니다.

이런 연약은 베드로가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중에서도 주님을 가장 뜨겁게 사랑했던 사도 바울의 지난 날의 모습이 또한 그랬습니다. 만약 부활하신 예수님이 유대종교의 잘못된 열심으로 살아가던 청년 사울을 다메섹 언덕에서 만나 주시지 않으셨다면, 그는 분명 기독교 역사에 남을 그리스도인들을 가장 심하게 핍박하고 성령을 대적한 사람의 한명이 되어, 불행한 인생을 살았을 것을 저는 의심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만나기까지 그의 눈에 편견과 선입관이라는 눈꺼풀이 벗겨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성도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각과 관점이 편견이나 선입관 없이 올바르다고 확신합니까? 바라기는 우리 각자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나의 잘못 형성되고, 굳어버린 가치관과 비뚤어져 버린 고정관념의 눈꺼풀을 주님의 은혜로 벗겨지기를 구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는 어떤 유대에서 내려온 형제들의 가르침이 성령의 충만함으로 부흥을 경험하던 <수리아 안디옥교회>를 다툼과 분열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5장>의 오늘 본문에 이어서 기록된 <3절>에서 <21절>까지의 내용이 바로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이 함께 논의한 내용’입니다. 처음에 회의가 시작되었을 때, 먼저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v.5)라고. 바로 앞에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v.1)는 주장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주의’를 신봉하는 유대인들이 핵심적인 주장인데, 그들의 이런 주장으로 인하여 많은 논쟁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모인 자들을 향해 입을 엽니다.

제가 앞서 주께서 베드로의 편견과 선입관을 깨기 위해 ‘부정한 짐승이 담긴 보자기’ 환상을 보여 주셨고, 성령께서 지시하심으로 로마군대 백부장이었던 이방인 고넬료를 구원케 하셨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을 향한 이런 놀라운 구원의 사건이 있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 베드로가 예루살렘교회에 돌아 갔을 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서 함께 먹고 교제한 것’이 유대인의 율법을 어긴 것임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상세하게 하나님께서 ‘부정한 짐승의 보따리’ 환상을 보여주셨고, 성령께서 고넬료의 집에 갈 것을 명하셨음을 사실 그대로 증언했던 것입니다. 그랬을 때,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행. 11:18)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베드로의 고넬료가 구원받은 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듣은 유대인 크리스챤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무엇을 뜻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 유대인처럼 이방인들 또한 차별치 않으시고 생명 얻게 하는 회개를 허락 하셨도다’는 것이 아닐까요?

이 고넬료의 구원사건을 통해 이들은 하나님의 차별하지 않으시는 구원의 은혜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 대부분의 크리스챤들은 이런 민족과 지역을 차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의심치는 않습니다. 그러나, 특히 먼저 믿은 우리 크리스챤들은 마음 속으로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허락하신 이 구원의 선물을 마치 구약의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이 나를 특별히 사랑하셔?!’라고 하며, ‘선민의식’속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건강한 자기사랑은 나를 세워 주지만, ‘선민의식’과 같은 이기적인 자기사랑은 ‘외골수와 왕자병 (공주병)’의 주범임을 우리는 직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구원은 율법으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이다”는 것입니다: 복음서 중의 복음서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사도 바울은 ‘복음에서 드러난 의가 어떻게 우리 인간을 살리는지?’를 이렇게 선언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라고. 여기서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게 되는 근거는 그 어떤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요, ‘그 어떤 인간의 행위’에는 ‘율법을 행하는 행위’도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로마서의 주제라고 일컬어지는 <롬. 1:17>에서 사도 바울이 선포하는 요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인간이 구원받게 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이요, 따라서 어떤 우리 인간의 행위, 심지어 선한 율법의 요구를 지키는 행위조차도 그 행위로서 구원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든 율법의 요구를 다 지켜 행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로마서의 핵심일 뿐 아니라, 신구약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제가 앞서도 감사하다고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은 성령의 충만하신 임재와 이끄심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적 리더였던 사도 베드로와 야고보의 영적 가르침을 통해 <예루살렘교회>의 첫번째 회의에서 ‘복음의 순수성과 교회의 정체성’을 유지시키고, 올바른 교리로써 확정하셨음을 저는 믿습니다. <베드로>를 통해서 이미 그에게 역사하셔서 그의 유대인으로써의 고정관념을 깰수 있도록 환상과 성령으로 그를 깨우쳐 주심을 통해 그는 성도들에게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v.10)고 그들을 깨우쳤습니다. 또한 <야고보>도 ‘아모스’선지자의 예언의 말씀 (암. 9:11-12)의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v.16)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를 통해 ‘모든 이방인이 주께로 찾아오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뜻임을 예언의 말씀으로 성도들에게 설명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럼으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v.19)라고 말하며, 베드로와 같이 ‘이방인을 억지로 할례 받게 하여 유대인화 해서는 안됨’을 분명히 했습니다. 왜냐하면, 거짓교사들의 가르침처럼 ‘할례’와 그 어떤 율법을 행함으로서 구원받는 것이 결코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곧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이라는 선물을 믿음’으로 구원받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구원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받은 구원은 어떻게 주어졌다고 믿으십니까? 하나님은 오늘 본문이 포함된 <사도행전 15장> 말씀을 통해 복음이 처음으로 이방민족들에게 증거되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하나님의 구원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으심’과 ‘이 구원은 할례를 포함한 그 어떤 율법을 행함으로써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깨닫고, 분명한 교리로 가르치도록 성령의 도우심으로 확정하셨습니다. 혹시 성도 여러분 안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순간 순간 나 자신의 행위와 기분과 판단에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선지자 미가는 무엇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자녀의 삶인지를 이렇게 선언합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서 6:8)라고. 바라기는 한번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주님으로 인격적으로 영접했다면 이제는 그 받은 구원을 감사하며 확신가운데 살아가시고, 이제는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합당한 영적 성장을 위해 성령을 의지하여 날마다 육신의 소욕과 죄와 싸워 이겨 나가는 행함과 실천의 삶을 살아가는 복된 성도의 삶 사시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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