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 14, 2024

“고침을 받을 만한 믿음” (Faith To Be Healed)

Preacher:
Passage: 사도행전 (Acts) 14:8~10
Service Type:

“고침을 받을만한 믿음”

(Faith To Be Healed)

4-14-24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14:8~10

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In Lystra there sat a man crippled in his feet, who was lame from birth and had never walked.)

9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고침을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He listened to Paul as he was speaking. Paul looked directly at him, saw that he had faith to be healed)

10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and called out, “Stand on your feet!” At that, the man jumped up and began to walk.)

[설교 요약]

            우리는 계속해서 사도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을 함께 살펴가고 있습니다. 이제 <사도행전 14장>을 시작하면서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에 도착하여 복음을 증거하고, 표적과 기사를 행했을 때 많은 유대인과 헬라인,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곳 역시 성령을 순종치 않고 거스리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두사도를 핍박하게 했을 때 그들이 ‘루기오니아’에 있는 <루스드라>와 <더베>로 가서 힘있게 복음을 전함으로 제자를 많이 삼았습니다.

이것이 <14장>의 주된 내용인데, 그 중에서 두사도가 ‘루스드라’에 가서 복음을 전했을 때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한 사람에게 ‘고침을 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바울이 주목하고, “네 발로 일어서라” (v.10)고 소리쳤고, 그가 곧 ‘벌떡 일어나 걷게 되는 표적’의 역사가 벌어졌습니다.

이제 저는 오늘 말씀에서, 무엇이 고침 받을 만한 믿음인지? 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첫째, “구원받을 만한 믿음” 입니다: 사실 본문말씀 <9절>에서 <개역 한글>성경은 “구원받을 만한 믿음” (v.9b)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번역은 원문에 가장 가까운 <흠정역> (KJV)의 “고침을 받을만한 믿음” (faith to be healed)과 같은 직역은 아니지만, 의역 (영적 해석)을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침받을 만한 믿음은 먼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구원받을 만한 믿음’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엡. 2:8)

둘째, “발과 발목에 힘을 주는 믿음” 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에게서 ‘고침 받을만한 믿음’이 있음을 확신했을 때, 그의 손을 잡고 억지로 일으켜 세우려 하지 않고, 대신 큰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v.10a)라 외쳤습니다. 이 점이 중요한 것은 단순히 ‘육체적 장애 뿐 아니라, 영적 장애’를 앓는 많은 성도들의 문제점은 스스로 일어서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자녀가 믿음을 적용하여 발고 발목에 힘을 주고,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세워 일어나기를 원하십니다 (히. 12:13).

셋째, “인내하는 믿음” 입니다: 두사도는 루스드라에서 더베로 이어지는 사역지를 다니며 많은 제자를 삼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v.22b)고 그들에게 도전합니다. 이처럼 ‘고침을 받는 믿음’은 끝까지 인내함으로 마침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오늘 이 시간부터 나의 ‘연약과 부족’ 그리고 ‘상처와 아픔’을 주께 맡길 때 성령을 통해 고침을 받을 것을 믿는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성령의 능력으로 여러분의 모든 상처와 아픔이 회복되고, 그 상처가 도리어 미래에 비옥한 거름으로 사용되어지는 복된 인생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계속해서 사도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을 함께 살펴가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 <사도행전 13장>에서 사도 바울과 바나바일행이 처음 수리아 안디옥교회에서 파송되어 구브로섬의 <살라미>라는 항구도시에서 바보를 거쳐 다시 배 타고 ‘밤빌리아’지역에 있는 <버가>에 들렀다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설교했던 내용을 부활절 메시지로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이 과정속에서 구원받은 주의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고, 이것이 개기가 되어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은 ‘이방의 빛’된 주의 제자들을 통해 충성되고 충만하게 만방 가운데로 퍼져 나간 것입니다. 이제 이어지는 <14장>을 통하여 우리를 살리는 복음을 통해 영적 생명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상처와 연약함까지도 온전케 하시는 주의 성령의 역사를 함께 묵상하길 원합니다. 그리고 이런 ‘고침 받을만한 믿음’이 우리에게 있는지 각자 돌아보며, 믿음 가운데 적용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기대합니다.

이제 <사도행전 14장>을 시작하면서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에 도착하여 그곳에서도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증거했을 때, 많은 유대인과 헬라인,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곳 역시 성령을 순종치 않고 거스리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한 감정을 품게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의 성령께서 강력하게 두사람에게 역사하셔서 그들이 담대히 복음을 전하고, 표적과 기사를 행하여 주의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게 하셨을 때, 그 성에서 무리가 둘로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들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v.3-4). 이러는 가운데 유대인들이 이방인과 그 관원들을 선동하여 두사도를 핍박하고 돌로 치려 했을 때, 저희가 그 사실을 파악하고 ‘루기오니아’지역에 있는 두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피해서 그 곳에서도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고니온>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 폭도들의 핍박을 피해 <루스드라>로 온 두사도들은 그곳에서 ‘발을 쓰지 못하고, 나면서부터 평생을 앉은뱅이>로 살아가던 한 지체장애자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바울이 복음 전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의 그 모습을 자세히 주목하여 본 바울은 병고침 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에게 크게 소리쳐 말했습니다. “네 발로 일어서라” (v.10)라고. 그 때 그는 즉시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8~10절>의 내용인데, 이런 믿기지 않는 기적을 목격한 이방인들은 심히 놀라며, <루기오니아>방언으로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v.11)라고 소리쳤던 것입니다. 그들은 풍채가 좋았던 바나바를 “쓰스” 곧 “제우스”라고 부르고, 바울은 말하는 자였음으로 <전령/메신저의 신>이었던 “허메” 곧 “헤르메스”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 밖 제우스신당의 제사장들이 소와 호환을 가지고 성문 앞에 가져와 무리와 함께 이들에게 제물로 바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본 두사도는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 급히 그들을 제지했던 것입니다.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 (v.15)고 소리쳤던 것입니다. 여기서 ‘옷을 찢는 행위’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신성모독’ 곧. ‘하나님께 대한 불경스럽고 모독적 행위’를 목격했을 때 보이는 반응인 것입니다. 지난 부활절 예배 때 제가 언급했듯이, 대제사장이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대답하시고, ‘인자가 장차 하늘 구름을 타고 다시 올 것이라’ (막. 14:62) 말씀하셨는데, 그때 대제사장이 자신의 옷을 찢고, 주님을 신성모독의 죄목으로 판결했던 것이 바로 그 이유라는 것입니다.

이러하여 두사도는 가까스로 무리들을 말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못지않게 황당한 사건이 이 다음절에 이어집니다. <19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v.19)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조금전까지 바울이 행한 이적에 놀라며 ‘신’으로 생각하고 우상숭배하고자 했던 자들이, 유대인들이 충동하는 몇마디 말에 금방 부화내동하여 이제는 그를 돌로 쳐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깃털처럼 가볍고, 경거망동하는 무리들의 단면을 봅니다. 이와 같이 아침 저녁으로 변하는 것이 바로 ‘군중심리’요, ‘세상민심’의 속성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사건에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도 바울은 돌에 맞아 죽었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도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그는 그 다음날 제자들이 둘러섰는 가운데 일어나, 성에 들어 갔다가 그 다음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떠난 것입니다.

이제 저는 오늘 말씀에서 바울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로 소망 없이 살아가던 한사람에게 ‘고침을 받을만한 믿음’이 있음을 보고 일어나 걷게 하는 사건에 대해 함께 좀더 더 깊이 생각 (묵상)해 보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고침 받을만한 믿음일까요? 그것은

첫째, “구원받을만한 믿음” 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말씀 <9절>은 제가 가지고 있는 <개역 한글>성경책에는 “구원받을만한 믿음”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한국에서 이 본문을 설교하는 많은 설교자들도 ‘구원받을만한’이라고 표현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러나 가장 원어에 가까운 번역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 <흠정역>뿐만 아니라, <표준새번역>과 <우리말성경>버전 모두에서는 이부분을 “고침을 받을만한 믿음”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문성경 <KJV>과 <NIV>에서도 모두 “faith to be healed”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 <9절>의 부분을 의도적으로 원어에 가까운 ‘고침을 받을만한 믿음’ (faith to be healed)이라고 번역한 버전을 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다른 한편으로 묵상해볼 때, <개역한글>버전의 “구원받을만한 믿음”이라는 번역의 의미도 상당히 크고, 우리가 놓쳐서는 안된다고 저는 이해하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의 번역이라기 보다는, 영적으로 해석할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구원받을만한 믿음’이라는 뜻일까요?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분명히 이해해야 할 것은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한 앉은뱅이를 주목하고 나서 ‘고침을 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음을 바울이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로 보건데, ‘그가 고침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이런 저런 육체적인 어떤 질병이나 장애가 치유함을 받는다는 말이 아님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침을 받는 믿음’이란 궁극적으로 ‘구원을 전제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앉은뱅이가 고침 받은 이유는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라는 결론이 아니라, 그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속에 믿음을 허락하신 결과로 병고침의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도가 그를 주목했을 때, <그가 구원받을 정도의 믿음의 경지에 있음을 확인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믿음을 주셔서 구원을 선물로 허락하셨으며, 그 믿음을 통해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했다>라고 우리는 먼저 이 구절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성령께서 이것을 바울에게 순간적으로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에베소 성도에게 이렇게 편지하는 이유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 그 누구도 구원을 자신의 믿음이 좋아서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출발이 하나님의 선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앉은뱅이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구원받을만한 믿음 있음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목격한 것입니다.

둘째, “발과 발목에 힘을 주는 믿음” 입니다: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사도가 이 앉은뱅이에게 ‘고침 받을만한 믿음’이 있음을 확신했을 때, 취한 행동입니다. 그는 손이나 팔을 잡고 그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큰소리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v.10a)라고. 그 때 그는 즉시 벌떡 일어서 걷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오늘 본문의 사건을 ‘어떤 육신적으로 장애를 앓던 한사람이 성령의 기적적인 능력으로 고침받았다’는 식으로만 이해하고 그쳐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히브리서 12장>을 보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를 징계하시는 이유에 대해서 영적으로 잘 밝히고 있음을 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그의 자녀를 사생아처럼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 이니라” (히. 12:6)는 것입니다. 삶 가운데 예상치 못한 고난과 역경이 찾아올 때, ‘이런 이유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에게 무관심하거나, 나를 미워하심’이 아니요, 도리어 ‘나를 그분의 사랑받는 아들과 딸로 여기시기 때문’이요, ‘지혜로운 부모가 그러하듯 하나님은 이런 징계를 통해 우리를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지지 않을 정금같이 우리를 단련하고 훈련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중요한 것은 이런 고난의 시간이 닥칠 때 우리는 좌절하거나 낙심하여 넘어져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발과 발목에 힘을 주고 있어나 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히. 12:13)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들을 격려하고 도전합니다. 이와 같이 고침 받는 믿음은 ‘누가 고쳐 주기를 바라는 믿음’이 아니라, 주의 말씀을 날마다 받아먹고, 주의 영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능력을 힘입어 발과 발목에 힘을 주고 스스로 일어서는 믿음입니다.

셋째, “인내하는 믿음” 입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유대인들에게 충동함을 받은 무리들에 돌로 맞아 거반 죽다 다시 살아난 사도 바울은 그 이튿날 일어나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이동했던 것입니다. <루스드라>에서 <더베>까지의 거리는 대략 30마일로, 50km에 해당하는 거리인 것입니다. 돌아 맞아 죽다가 살아난 사람이 그 다음날 다시 50km의 거리를 걸어서 이동해 갔다는 것은 그의 체력이 좋다거나, 정신력이 좋다는 것 정도로는 이해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성령님의 강력한 지키심과 보호하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두사람이 더베 성에서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고,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v.22a)고 권면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v.22b)고 도전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일이 잘 풀릴 때는 열심히 믿다가, 어려움이 닥치면 중도 포기하는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이 믿음은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 1:6)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 속에 이루실 착한 일, 곧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성화시켜 나가실 것>을 믿는 믿음이요,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 2:12b)는 말씀과 같이 끝까지 구원을 완성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며 생각할 이 ‘끝까지 인내하는 믿음’은 마지막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영생의 구원으로 확증될 믿음일 뿐 아니라, 역설적으로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그 삶의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그 믿음을 작동함으로써 나의 <연약과 부족>이 강건함을 입고, 나의 <상처와 아픔>이 고침을 받고 회복을 경험하는 실제적인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인내함으로 내 속에 있는 낙심과 절망을 소망으로 바꿔주시고,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실 성령님의 역사를 신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 자신을 향해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시. 42:5)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난 금요일 ‘찬양과 기도의 밤’을 함께 가졌습니다. 그때 <비젼>이란 주제로 하나님을 뜨겁게 찬양했고, 서로의 기도제목을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전심으로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청년이라도 피곤하며, 장정이라도 지치며 넘어지지만,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것입니다. 그의 새 힘은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며, 달려가도 지치지 않고 걸어가도 피곤치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곧 ‘구원받은 자의 삶’이요, ‘고침 받을 자의 삶’인 것입니다. 바라기는 주의 성령의 권능의 손으로 여러분의 모든 상처와 아픔이 회복될 뿐 아니라, 도리어 그 아픔이 미래에 성도 여러분의 인생을 풍요롭게 할 비옥한 거름으로 성령께서 사용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주를 향한 굳센 믿음으로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거두고 주와 함께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