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 7, 2024

“이방의 빛으로” (A Light For The Gentiles)

Preacher:
Passage: 사도행전 (Acts) 13:47~48
Service Type:

“이방의 빛으로”

(A Light For The Gentiles)

4-7-24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13:47~48

47 주께서 이 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For this is what the Lord has commanded us: “I have made you a light for the Gentiles, that you may bring salvation to the ends of the earth.”)

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When the Gentiles heard this, they were glad and honored the word of the Lord; and all who were appointed for eternal life believed.)

[설교 요약]

            우리는 지난 시간 사도 바울이 “1차 선교여행”중에 <비시디아 안디옥>지역에서 행한 설교내용 (행. 13:16~41)을 살펴보았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의 메세지를 듣고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 복음의 말씀을 기뻐하고 계속해서 듣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를 고집하는 유대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시기하고 대적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사도 바울일행은 발에 티끌을 털고 <이고니온>으로 떠나며 “하나님의 말씀을 ~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v.46)고 선언합니다.

이것을 개기로 이후의 <사도행전>에서 복음전파의 대상은 ‘이방민족’이 됨을 보게 됩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구원의 촛대가 유대인에게서 이방민족에게로 옮겨졌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큰 그림에서 과연 무엇이 이방민족의 구원에 담긴 뜻일까요?” 그것은

첫째,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선지자들의 예언의 글을 부지런히 읽고 심지어 안식일마다 암송까지 했지만, 그들의 굳은 마음과 성령을 대적함으로 복음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방인을 향한 복음전파의 직접적인 개기가 되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복음은 차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인 <47절>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v. 47)라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49장 6절>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700여년전에 이방인에게 차별없이 구원 베푸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아니 복의 근원자로 택하신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실때, 이미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창. 12:2~3)라고 모든 족속을 향한 차별없는 구원의 역사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셋째,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왜 유대민족이 구원에서 제외되었는지?’를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롬. 9:27)라고 영적으로 밝힙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복음이 땅끝까지 증거되어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게 되었을 때, 비로소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는 회심의 대역사를 예언합니다 (롬. 11:25~26).

실로 깊고도 경이로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입니다 (롬. 11:33). 예루살렘에서 출발한 그리스도의 복음의 역사는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루살렘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의 진리를 깨닫은 만큼 성령의 능력으로 주의 충성된 증인들 모두 되시길 기도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지난 시간 사도 바울이 “1차 선교여행”중에 <비시디아 안디옥>지역의 유대인회당에서 행한 <사도행전 13장>의 설교내용을 중심으로 ‘부활절 메시지’를 나누었습니다. 먼저 <사도행전 13장>이 시작되는 상황을 잠시 기억해 본다면, 첫 이방인 교회인 수리아 안디옥교회는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바나바를 포함한 다섯명의 리더들이 하나가 되어 영적 부흥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도들이 주를 섬겨 금식할 때 성령께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명하셨고, 그들은 금식하고 기도하며, 두사람에게 안수하여 그들을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한 것입니다.

이것이 시발점 (출발점)이 되어 우리 주님의 명령이자 동시에 축복된 약속처럼 ‘성령충만을 받음으로’ 이제 주님의 제자들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땅 끝까지 이르러 그의 증인으로 힘있게 나아가는 복음의 대장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신실하며, 실제적인 사실로 증명되느냐 하면, 그 복음이 전파된 지 2천여년이 지난 지금 여기 있는 여러분과 제가 이 복음전파의 열매인 것으로 충분히 입증되는 것입니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우리 자신이 ‘안디옥교회’에서 시작된 복음의 실제적인 열매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계속해서 성도 여러분과 함께 ‘사도행전’의 펼쳐지는 말씀을 나누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함의 중요성과 강력한 능력이 무엇인지를 함께 주께서 깨닫게 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바라기는 오늘 말씀 가운데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v.47)는 주님의 가슴 벅찬 약속이 사도 바울 한사람만이 아니라, 우리 성도 모두에게 주께 받은 가슴 떨리고 감격스러운 비젼의 약속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제가 앞서 언급했듯이 오늘 본문을 포함한 사도행전 13장에서 14장에까지 이어지는 내용이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중심으로 한 동역자들의 <1차 선교여행>인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과 동역자들이 출발한 1차 선교여행으로 배 타고 건너간 첫번째 지역이 구브로 (바나바의 고향/ 바울의 고향, 다소와도 가까움)에 있는 <살라미>라는 지역이었습니다. 이들은 이곳 ‘살라미’의 여러 유대인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그 당시 ‘살라미’는 중요한 항구도시로서 항해하는 선박들의 요충지였고, 상업적으로 발전한 구브로 지역의 최대 도시였기에 많은 유대인들이 이곳에 거주했던 것입니다.

그 이후에 바울일행은 살라미에서 온 섬 가운데를 지나 <바보>에 이르러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엘루마’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그 지역 총독이었던 서기오 바울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바울 일행을 대적했을 때 바울이 성령충만 함으로 그가 잠시동안 ‘앞을 보지 못할 것’을 선언합니다. 이 일로 인해 총독이 이렇게 된 것을 놀랍게 여기고, 주의 복음을 받아들여 믿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가 <행. 13:4~12>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 바울 일행은 다시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를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그곳 유대인 회당에서 주의 복음을 증거했던 것입니다. 그 내용이 바로 지난 부활주일에 살펴본 <16~41절>말씀인 것입니다.

저는 지난 주일 에 바울의 성경에 기록된 첫번째 ‘복음설교 메시지’를 살펴보면서 이 메시지의 핵심은 ‘나사렛 예수는 선지자들의 예언의 성취이자, 유대인들이 간절히 기다려온 메시아이다’ 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구약의 수없이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예언을 다 이루신 메시아시며, 기록된데로 나무위에 다리셔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담당하시고 죽으셨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심으로 그를 믿게 될 때, 죄사함 받고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어 구원받게 된다>는 뜻이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바울이 강력한 복음의 메시지를 증거했을 때, 말씀을 듣은 자들이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전하라” (v.42)고 원했고, 예배가 마친다음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경건한 이방인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았습니다. 이때 이들은 말씀과 주의 사랑으로 그들과 교제하며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v.43)고 그들을 권면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주의 복음의 말씀으로 유대인들과 경건한 이방인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는 것을 보고 율법주의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이 시기함이 가득하여 바울의 말을 논박하고 비방하여 대적했던 것입니다. 이럼으로 두사람은 담대하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v. 46)고 말입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을 향해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먼저 받고, 그분의 택한 민족인 너희들에게 마땅히 그리스도이 복음의 말씀을 먼저 전하고자 했지만, 너희가 거부 했도다. 그럼으로 우리는 이방을 향해 복음을 전 하겠노라’는 것입니다. 이제 시기가 가득한 유대인들은 그 성에 있는 유대인 귀부인들과 영향력 있는 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여 쫓아냈고, 두사람은 발에 티끌을 떨고 <이고니온>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13장>은 끝이 나면서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v. 52)고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어떤 핍박과 복음을 대적하는 세력 가운데서도 주님의 공동체는 기쁨과 성령충만으로 아름답게 열매 맺는 것입니다.

이제 이와 같은 유대인들의 복음에 대한 거부와 주의 제자들을 대적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그 촛대가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사도들의 이방을 향한 복음증거의 중대한 전환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큰 그림에서 볼 때 과연 무엇이 이방민족의 구원에 담긴 뜻일까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유대인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거부에 대해서는 지난 주 부활절에 상세하게 말씀 드린바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데로 유대인들의 그 긴 역사를 통해 하나님은 수없이 많은 그의 종들을 보내셔서 그들을, 아니 온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를 보내 줄 것을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대인들은 그들 가운데 오신 메시아를 거부하고 미워함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자신들을 구원하러 오신 구원의 주를, 다시 말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함으로 그분을 거부하고 못박아 죽인 것일까요?’ 물론 이것을 간단히 말한다면, 지난 주에 나누었듯이 ‘그들이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걸음 더 나아가 ‘왜 유대인들은 오실 메시아에 대한 이런 풍성한 예언의 말씀을 듣고도, 읽고도 심지어 안식일마다 암송까지 하면서도, 올바로 깨닫지 못한 것인가?’라고 누가 질문한다면, 성도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답 하시겠습니까?

이것이 곧 눈으로 보고도 보지 못하고, 귀로 듣고도 듣지 못하는, 영적 맹인과 귀머거리의 상태인 것입니다. 바로 우리 주님이 이런 유대인들의 영적 불구상태를 이렇게 도전적으로 밝히셨던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마. 11:15)라고 말입니다. 귀가 있으되, 소리는 들리나, 그 뜻은 깨닫지 못하는 영적 귀머거리인 것입니다. 바로 그들의 목이 곧고, 성령을 대적하는 죄악이 이런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영적 암흑의 상태를 초래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서 유대인의 영적 문제를 자세히 다루는데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어리석음을 단순히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유대인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 보고하 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과 제가 이미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면, 우리는 과연 이런 구원자 예수님을 마음의 문을 열고 나의 주님으로 올바로 모시고 성령님의 이끄심에 순종하여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미 받은 말씀을 날마다 열심과 즐거움으로 묵상하고, 성령의 이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더욱 자라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둔 소아시아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과 같이, 말씀을 보기는 하고, 듣기는 한다고 하면서도 영적 귀머거리와 맹인이 되어 성령을 근심시키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불행한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문 밖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0)고 말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복음은 차별이 없기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인 <47절>에서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유대인들을 향해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이 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v. 47)라고. 그런데 여기서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는 말씀은 구약의 <이사야 49장6절>을 인용한 말씀인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조용히 묵상하며 다시금 놀라움을 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흔히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든 이방민족에게 활짝 열어 구원의 은혜를 차별없이 허락하셨지만, 구약시대는 마치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민족에게만 허락된 것처럼 우리는 잘못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예수님이 오시기 700여년 전에 구약의 대표적인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자신의 무한하신 구원의 은혜를 먼저 택한 유대민족 뿐 아니라, 이방민족에게도 자신이 세운 종들을 통해 ‘이방을 비추는 빛’과 같이 복음의 전도자들을 삼을 것이라 밝히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신약시대에서 오늘말씀과 같이 ‘사도 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하나님께서 복음의 증인으로 세우시기 훨씬 이전에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들를 동일한 구원의 증인(전도자)으로 세우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사. 49:6)

그러나, 문제는 먼저 택함 받은 유대인들은 이런 하나님께 선택받은 은혜를 자신들만 독식하고자 원했다는 것입니다. 소위 스스로를 ‘선민’ (the chosen people)이라는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다른 이방민족을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경멸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억지로 <자기들만 영원토록 독식하는 특권>으로 가두어 두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이방을 향한 구원의 복’이라는 하나님의 원대한 뜻은 심지어 유대인들이 자신의 진정한 조상 (시조)이라고 인정하는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처음 부르셔서 축복하시는 말씀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창. 12:2~3)라고. 물론 하나님은 그분의 주권과 구원의 경륜을 통해 이스라엘민족을 먼저 택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구원이 이스라엘만 누리라는 뜻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민족은 안타깝게도 그것을 원했고, 그렇게 고집했던 것입니다. 제가 앞에서 함께 살펴본 것처럼 사도 바울일행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주의 복음을 증거했을 때, 이 복음을 강력하게 반발하고 시기했던 유대인의 핵심되는 이유는 ‘자신들이 먼저 받은 율법을 포기할 수 없다’는 이유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이방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사도 바울이 증거하듯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가 아니라, 그들이 지금까지 해왔듯이 자신들처럼 ‘할례’를 받고 유대인들로 개종하여 구약의 모든 율법을 행함으로 주어진다는 그 율법주의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안타깝게도 이사야 선지자 뿐 아니라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에 의해 하나님의 그 선하신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차별없이 이방인에게로 퍼져 나간다는 예언의 말씀을 거부했고, 그렇게 되는 것을 시기 질투했으며, 예수님을 향해 그러했듯이 주의 제자들을 향해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지 못하도록 온갖 핍박과 방해를 일삼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셋째,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로마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9장을 시작하며 사도 바울이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민족이 구원에서 제외된 것을 가슴 아파하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저주를 받는 것까지도 감내하고자 하는 애끓는 심정을 토로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로마서 9~ 11장>에 이르기까지 동족 이스라엘에 대한 매우 중요한 질문, 곧 ‘무엇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인가?’에 대한 자신의 질문 (궁금함)에 대해서 성령을 통해 그 뜻을 깨닫고 이렇게 선언합니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롬. 9:27)라고. 또한 <로마서 11장>에서도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롬. 11:5)고 말입니다. 이것을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은 어느 시대, 어느 상황 가운데서도 믿음을 통해 구원받는 남은 자를 남겨 놓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는 이스라엘이 모두 망하는 것처럼 보일찌라도, 엘리야 시대에 바알에 무릎을 꿇지 않은 7,000명을 남겨 놓았듯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구원받기에 합당한 남은 자를 남겨 두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더욱 중요한 사실은,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바시디아 안디옥>지역 유대인들의 강팍한 마음으로 인하여 이제 생명의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향하게 되어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 곧 “이방인의 충만한 수” (롬. 11:25)가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강력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짐을 보고 유대인들이 시기함을 가지고, 이것이 점점 더 영적 깨닫음을 가져와 때가 되었을 때 그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대회심’의 사건이 있을 것을 바울은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롬. 11:26)고 성령충만을 통해 예언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동족 이스라엘에 대해 품었던 슬픔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의문이 풀리고 놀라운 구원의 비밀을 점점 더 깨닫아 감으로서 이렇게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비밀을 감탄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롬. 11:33~36)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은 누구도 판단치 못하고, 그분의 지혜는 측량치 못하는 것입니다. 구원이 이스라엘에게서 시작되어 이방민족의 충만한 수를 채우고 나서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옴을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이자 지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라기는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약속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가 성도 여러분과 늘 함께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으로 쓰임받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또한 우리 아포슬 공동체를 통해 이곳 아틀란타 지역에 있는 많은 한인 학생들과 교민들을 주께로 인도하고,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모든 영혼들에게 주의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주의 제자로 훈련하고, 세상의 빛으로 파송하는 소망스런 사역에 쓰임받는 우리 믿음의 공동체 될 수 있기를 손모아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