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난 중에도 즐거워” (Glory In Our Sufferings)
“환난 중에도 즐거워”
(Glory In Our Sufferings)
6-21-26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5:3~4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And not only so, but we glory in sufferings also: knowing that suffering works patience;)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And patience, experience; and experience, hope:)
[설교 요약]
사도는 <5장>을 시작하면서, <1~2절>을 통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 성도의 변화된 신분’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3~4절>에서 계속해서 우리 성도가 누릴 특권을 선언합니다. 그것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써, 그 자녀에 합당한 영적 승리의 삶을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가운데 누린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도가 묘사하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우리 ‘성도의 특권’에서 이해해야 할 것은,
-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비록 환난을 겪음에도 불구하고’라는 의미라기 보다는, ‘환난 중에 있기 때문에 즐거워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환난 자체가 가지는 엄청난 유익 때문입니다 (시. 119:67~71; 고후. 12:10; 약. 1:2~12; 벧전. 4:12~14)
-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셨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담대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주께서 이미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 ‘주를 위한 고난은 큰 상이 예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마. 5:11~12)라고 말씀하십니다. 불 같은 시험 뒤에 큰 상급과 하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벧전. 4:12~14)
이것이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 할 이유라면, <우리 안에서 환난을 통하여 역사하는 삶의 유익>을 3단계로 사도는 영적으로 설명합니다. 그것은
첫째) “환난은 인내를 (이룬다)”는 것: 이것은 <’환난’이라는 ‘인생의 고통과 어려움’을 매개체로 하여 믿음을 통해 참고 견디어 나간다>는 뜻이고,
둘째) “인내는 연단을 (이룬다)”는 것: <인내로 환난을 견디는 자들은 하나님의 위로를 크게 경험한다>는 의미이며,
셋째)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니라”는 것: <하나님께서 주시는 연단은 우리의 소망을 정금처럼 값지게 하는 불 같은 연단이며, 소망을 받쳐주는 버팀목>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럼으로 환난은 결국 구원받은 성도를 인내하게 하고, 연단을 통해 소망으로 까지 나아가게 하는 은혜의 통로임을 이해할 때, 이 고난을 통해 정금과 같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복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이제 성도의 깊어진 삶의 핵심에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환난과 연단의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5장>을 시작하면서 우리 크리스챤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아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자녀의 존재가 되었음을 선언하고 나서, 이제 믿음으로 서 있는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가고, 그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존재가 되었음을 <1~2절>에서 밝혔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어지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3~4절>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v. 3~4)라고. 전정한 우리 크리스챤의 승리와 축복은 ‘무사태평’하고 삶의 무풍지대 가운데 오는 것이 아니라, 삶의 ‘환난과 핍박’의 한 가운데서 고난의 깊은 골짜기를 거치며, 비로소 경험하게 (누리게) 됨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생의 고난이, 역경과 환난 가운데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도리어 성령의 능력으로 새 힘을 얻어 주와 함께 승리하는 복된 주의 제자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제가 사도 바울의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등 여러 다른 서신서들과 함께 ‘로마서’를 더 깊이 묵상하면 할수록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은, ‘사도가 언제나 성도들을 향해 편지를 쓰는 동기와 목적은 ‘목회자’로써 주께서 맡기신 양무리를 치는 목자의 심정으로 글을 쓰고 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복음서 중의 복음서’요, ‘성경 가운데서도 가장 빼어난 교리서’의 하나로 인정되는 <로마서>에서도 그런 사도 바울의 ‘목회자의 심정’을 잘 느낄 수 있는데, 오늘 본문이 그 대표적인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그동안 살펴본 것처럼, <5장>을 시작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우리 성도’가 누리는 변화된 신분의 특권, 곧 ‘하나님과 평화한 자녀의 신분의 특권’이요, ‘믿음으로 그분의 은혜 안으로 들어가는 특권’이며, ‘장차 누릴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특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한층 더 우리 성도가 매일 매일 경험하는 실제 크리스챤 삶의 내용으로 나아갑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v.3)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사도는 지금 ‘의롭다 하심’ (칭의)를 통해 변화된 성도의 구원받은 존재를 본질적으로 설명해 나가는 가운데, 믿음의 가장 ‘걸림돌/난제’가 되는 ‘환난과 고통’의 문제를 이제 본격적으로 다루는 것입니다. 들판에서 사나운 짐승들로 부터 양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실제문제점을 언제나 관심가지고 돌보는 선한 목자처럼, 사도는 이제 더 깊숙이 우리 성도가 실제 삶에서 부닥치고 걸려 넘어지기 쉬운 핵심적인 ‘난제’ (문제점)을 다루어 가며, 동일하게 이 믿음의 역사하는 능력이 무엇인지를 놀랍게 밝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환난’을 통과하면서 진정한 믿음은 더 견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구원을 누리게 되었다면, 앞서 살펴본 신분의 변화 뿐 아니라, 또 한가지의 우리의 ‘영적 상태’ 곧 ‘우리의<믿음의 자세>를 통하여 우리가 구원받은 존재임을 증명하게 되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환난’ (suffering)을 대하는 우리 성도의 태도와 상태가 결국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 우리는 정말 구원받은 존재인가 아닌가를 증명하는 기준이 된다고 사도는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환난’이라는 이슈를 다룸에 있어서 우리가 먼저 한가지 이해해야 할 것은, 이런 우리 성도에게 닥쳐오는 <환난과 고통의 문제>, 다시 말해 <’믿음의 시험’에 관한 문제>는 ‘로마서’를 위시한 사도 바울 서신서와 모든 신약성경 말씀의 핵심적인 메세지로써 ‘믿음으로 승리하고, 열매 맺기 위한 필요 불가결한 관문’과 같은 것으로 저자들은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신약성경에서 이런 ‘환난과 고통의 문제’를 가장 먼저 언급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은 복음서에서 이제 임박한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머지않아 그들에게 닥쳐올 환난과 핍박을 숨기지 않고 이렇게 밝히십니다. “이것은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 주님은 제자들이 복음과 자기 이름을 위하여 환난과 핍박을 당하게 될 것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이런 고난의 삶은 머지않아 분명히 닥칠 것이기 때문이요, 그 뿐만이 아니라 주님은 그 환난의 때를 맞아 제자들이 우왕좌왕하고, 실족하지 않고 그들도 주님 자신처럼 세상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도록 담대할 것을 약속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결코 두려워 떨거나 낙심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담대하고 기쁨과 확신 가운데 환난을 이겨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불 같은 환난 가운데 담대할 수 있고, 승리할 수 있는 근거는 주께서 이미 십자가 위에서 세상을 이기셨고, 그 승리의 주님이 그의 영, 성령과 더불어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을 읽거나 묵상하는 많은 성도들 중에는 “~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but we glory in sufferings also) (v. 3a)라는 말씀을 <’비록 우리가 환난 가운데 있을찌라도’라든가 혹은 ‘우리가 환난을 겪음에도 불구하고’ 즐거워한다>라고 이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도 바울이 이 본문에서 전하는 메시지는 그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는 그것이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 있음으로 (있기 때문에)’ 즐거워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말씀의 뜻은 본질적으로 ‘환난과 고통의 삶’은 우리 성도가 영적 성숙과 구원을 완성시켜 감에 있어서 반드시 없어서는 안되는 ‘성장통’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영적 아들인 ‘디모데’에게 가르쳤듯이,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딤후. 3:12)고 도전했던 이유입니다. 무릇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고, 참된 믿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핍박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승리의 면류관을 누리기 위해서 경기에 참여하는 모든 마라톤 선수들은 달려 나가는 가운데 극도의 고통과 난관을 극복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성숙된 삶의 자세요, 진리를 깨닫는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 크리스챤은 ‘핍박에도 불구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핍박 때문에 즐거워하는 것’인지?”에 대해 저는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원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있어서 ‘고난과 핍박은 참아내고, 극복해야 하는 것이기 이전에, 이를 통해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또한 매우 역설적이지만, 그분의 영광과 존귀를 깨닫게 하는 영적 각성제와 도구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고난이 가져오는 역설적인 유익’을 잘 설명해 주는 것이 <시편 119편> 말씀입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119:67,71)라고. 이처럼 고난과 역경은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고통스럽고 피하고 싶은 아픔의 순간이지만, 이 고난은 결국 <조개가 고통을 인내하는 가운데 아름다운 진주를 잉태하듯> 성도를 더욱 성숙시키고,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랑을 나눠 줄 수 있는 주의 복된 제자로 성장케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만약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환난을 당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뒤로 물러나 침륜에 빠질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신과 즐거움으로 담대하게 고난과 싸워 이겨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확히 우리 주께서 산상수훈에서 ‘누가 축복된 자인지?’를 가르쳐 주시는 <팔복>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마. 5:11~12)라고 말입니다. 주님의 약속처럼, 주님의 이름 때문에 우리 성도가 당하는 불과 같은 혹독한 박해와 고난의 시간은 낙심할 이유가 아니라, 기뻐하고 즐거워할 이유임을 주님은 분명히 밝혀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가 함께 하실 것이요, 장차 우리에게 예비된 하늘의 큰 상급을 물려 받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앞서 언급했듯이 신약성경에서는 수 없이 많은 고난과 역경이 가져오는 영적 의미와 승리로 가득 차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중의 하나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두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진술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고후. 12:10)라고 궁핍과 환란 가운데 자신의 삶을 도리어 더욱 강한 주의 제자가 될 수 있었음을 사도 바울은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의 젖동생 <야고보>는 고난의 시험이 찾아올 때 놀라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약. 1:2)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시험이 왔는데, 기뻐해야 할까요?’ 그 이유를 야고보는 계속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 임이니라” (약. 1:12)는 것입니다. 주께서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난에 대한 말씀 중에서 베드로의 조언을 빠트릴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험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벧전. 4:12~14)라고.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힘겹게, 참기 어려운 시험과 고난을 참고 이겨 나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환난과 고난이 우리 자신을 진실로 불 가운데 연단하여도 없어지지 않을 정금과 같은 믿음으로 빗어지고, 평강과 구원의 열매를 거두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히브리서 기자>의 핵심적 메시지입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한 자들에게는 그의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히. 12:11)고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분별해야 하는 것은 사도가 주장하는 ‘환난과 역경을 대하는 우리 크리스챤의 자세’와 일종의 ‘자기학대’ (masochism)이나 ‘믿음주의’ (Believism)나 ‘신앙주의’ (Fideism)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도가 선언한 오늘 본문의 후반절 말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v. 3~4)라는 말씀의 의미를 남은 시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환난은 인내를 이룬다”는 것은 <’환난’이라는 ‘인생의 고통과 어려움’을 매개체로 하여 믿음을 통해 참고 견디어 나간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 몸에 <예방주사>를 통해 소량의 병원균을 투입하여 몸의 면역세포가 병원균과 싸우게 될 때, ‘몸 속에 항체를 만들어 몸을 강건하게 만들어 더 센 세균을 물리치듯’ 인내는 환란을 거치면서 더욱 강하게 자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구원받은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거짓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시금석>이 바로 ‘이처럼 환란이 찾아왔을 때, 인내함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아니면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져 포기할 것인지’가 그것입니다.
한편 “인내는 연단을 이룬다”는 뜻은 <인내로 환난을 견디는 자들은 하나님의 위로를 크게 경험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인내는 ‘증명’을, ‘단련’을, ‘인정받는 것’을 이룬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곧, ‘인내가 우리를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석가 ‘매튜헨리’는 “환난이 우리를 테스트하고, 우리가 진정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에, 인내는 훌륭한 시금석이다”라고 주석합니다. 이처럼 인내는 훌륭한 ‘시금석’입니다. 그럼으로 베드로사도는 이렇게 우리 성도를 격려합니다. “~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도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1:6~7)라고. 이것이 청교도인들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참된 것인지 아니면 거짓된 것인지를 증명하고 시험하는 시금석이 이 인내를 통해서라고 강조했던 이유입니다.
마지막으로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니라”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연단은 우리의 소망을 정금처럼 값지게 하는 불 같은 연단이며, 소망을 받쳐주는 버팀목>인 것입니다. 욥이 불과 같은 시험의 과정을 통과하여 이렇게 고백했던 것이 바로 우리의 정금 같은 소망의 훌륭한 예가 될 것입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욥. 23:10)라고. 우리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볼 때, 수없이 많았던 기독교 이단 가운데는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큰 믿음을 가지면, 결코 시험과 어려움을 받지 않게 된다’라는 거짓된 가르침을 주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의 진리가 아닙니다. 복음의 진리는 ‘구원받은 성도는 반드시 환난을 거치며 그의 믿음을 증명할 뿐 아니라 더욱 깊은 영적 성숙으로 나아가게 하며, 이렇게 불과 같은 불시험을 통하여 모든 거짓된 불순물을 태워 제거함으로 정금과 같은 믿음으로 나아가는 축복을 경험하게 된다’고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만사태평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불 같은 고난과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 아버지께 징계를 당하는 그분의 모든 자녀들’에게 이렇게 도전과 격려를 줍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 이니라 ~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히. 12:6,8)라고. 물론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이유는 <나의 허물과 죄 때문도 있지만, 또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장차 모든 하늘의 유업을 상속으로 받을 그분의 자녀이기에 ‘훈련과 연단’으로써 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더 이상 ‘환난과 역경’이 찾아올 때 세상사람처럼 좌절하고, 뒤로 물러나 침륜에 빠지는 안타까운 삶을 살지 맙시다. 오늘 사도의 가르침과 같이 ‘이 환난 때문에 인내를 배우고, 연단을 통해 담대하게 소망으로 나아가는 구원받은 자녀의 증거를 펼쳐 보이는 복된 삶 살아가시기를 기대합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8)고 소리쳐 고백한 사도 바울과 같이, 우리 앞에 주어질 그리스도와 누릴 영광된 미래의 소망을 바라보며, 환난을 주와 함께 통과하며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지지 않을 정금과 같은 믿음으로 나아가는 사랑스런 하나님의 아들과 딸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