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과 그리스도” (Adam And Christ)
“아담과 그리스도”
(Adam And Christ)
7-5-26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5:12, 15
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 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설교 요약]
우리는 <5장>을 통해서 우리 구원받은 성도의 변화된 신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계속해서 함께 살펴보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런 우리 성도의 변화된 신분 곧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분의 확실성과 안정성을 ‘우리 마음에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v. 5)을 통해 놀랍게 선언하고 나서, 이제 오늘 말씀을 통해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국면의 요지는 ‘과거 우리가 아담 안에서 죄 아래 속한 것같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는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함을 통해 그 공통점과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먼저,
- ‘공통점’은 <대표성>입니다: 아담이 인류의 첫 조상일 뿐 아니라, 인류를 대표하듯이, 예수님도 우리 모두를 대표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의 보혈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v. 12-14)
- ‘차이점’은, 우리가 ‘아담’ 안에서 <죄에 속하여 사망에> 이르게 되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의에 속하여 생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을 반역하여 죄를 범함으로 자신뿐 아니라 모든 인류를 ‘죄와 죽음’으로 몰아넣었지만,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내어 주심으로 ‘의로움과 영생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것입니다 (v. 15-19/ 고전. 15:45~49)
결국 사도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의 비교를 통해,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In Christ) 그리스도께 속하여 살아가게 된 그 말할 수 없는 특권과 은혜가 큰 것인지를 영적으로 밝혀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 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v. 15)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성령을 통하여 폭포수처럼 부어 주시는 하나님 사랑’을 깨닫고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v. 5).
날마다 주의 말씀안에 거함으로 진리를 통해 자유케 되고, 주의 사랑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고 서로 섬기는 주의 몸된 공동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5장>을 통해서 우리 구원받은 성도의 변화된 신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함께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한 자녀’된 신분의 변화요, 그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서 있는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가는 변화요, 그럼으로 장차 누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소망의 변화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신분의 변화뿐 아니라, ‘환난’이라는 삶의 고통 가운데서도 뒤로 물러나 침륜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인내함으로 연단을 이루어 구원받은 믿음을 증명함으로서, 장차 주와 함께 누릴 영광을 바라고 소망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시간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v.5)라고 사도가 말하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거나, 실망스럽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심히 자랑스럽게 되는 이유는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이 우리를 그 어떤 고난과 핍박과 죽음까지도 굴하지 않고, 죄와 육신과 세상의 악한 영들과 싸워 반드시 승리함으로 영광스러운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런 우리 성도의 구원의 확실성과 안정성을 ‘우리 마음에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놀랍게 증명하고 나서, 이제 오늘 말씀을 통해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국면의 요지는 ‘과거 우리 인류가 아담 안에서 죄 아래 속한 것같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신분의 막연한 자랑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분별력 있는 우리 신분의 실제적 유익과 특권을 깨닫고 점점 더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므로’라고 선언하며 오늘 말씀의 국면전환을 시작합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v.12)라고. 여기서 ‘이러므로’는 영어로 <wherefore>로써 “왜냐하면/ 그 이유는/ 왜 그런가하면”이라는 뜻입니다. 이 <이러므로/wherefore>라는 단어는, 사도 바울 신학의 대표적인 용어인 <그러므로/ therefore>와 유사한 단어로써, 앞문장과 뒷문장을 연결하는 ‘접속사’인데, <’앞 문장’의 원인으로 말미암아 이어지는 ‘뒷문장’에서 논리적으로 어떤 결과가 벌어지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접속사>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왜 사도가 <12절>을 시작하면서 <이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하는지?’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앞절 <10절>의 한 단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주석에 저는 동의합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 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v.10)라는 10절에서 마지막 부분인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by His life)는 ‘그의 살으심 (=생명) 안에서’ (in His life)로 번역하는 것이 올바른 번역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in>이라는 ‘조사’는 ‘~의 범위 내에서 (in the sphere of)’ 혹은 ‘~의 영역 안에서 (in realm of)’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곧 우리가 ~ 더욱 그의 살으심 (생명) 안에서/ 영역에서”라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오늘 말씀의 <12절>은 앞절 <10절>에서 ‘우리 크리스챤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살으심 곧 생명 안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의 의미를 사도가 이제 좀더 본질적(본격적)으로 설명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5장>을 통해서, 아니 <로마서>전체를 통해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 변화된 성도의 신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우며, 그 한번 받은 신분은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의 힘과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바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폭포수처럼 우리 마음에 부어 주셨기 때문임을 우리는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도는 이어지는 <12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v.12)라고. 그렇다면, 사도가 언급하는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라고 했을 때, 이 <한사람>이 누구일까요? 그렇습니다. 그는 <아담>입니다. 아담이 누굽니까? 그는 인류의 첫 조상입니다. 사도가 이 국면에서 왜 아담을 등장시키는 것일까요? 이것이 제가 앞서 이미 언급했듯이, 사도는 자신이 앞절 <10절>에서 “~ 그의 살으심 안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고 선언했을 때, ‘그리스도의 살으심 곧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가 왜 그토록 확실하고 취소될 수 없는 것인지를 그는 근본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먼저, 짧게 결론부터 말하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고 죽음에 이른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핵심은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 주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한량없이 부어 주시는 사랑으로 우리의 구원을 지켜 주심이 왜 필요하게 되었는지를 그 첫 출발점 (근원)에서부터 사도는 이제 큰 그림에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동안 로마서를 함께 나누며 여러 번 <‘복음의 시작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에서 시작되었음>을 말씀드렸는데, 이런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오게 한 것이 바로 인간의 ‘불경건과 불의’ 곧 <죄>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 인간은 죄를 저지르는 것일까요? 왜 우리 인간은 단 한사람도 예외 없이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일까요? 이처럼 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죄에 속한 죄의 종이 된 상태가 된 것일까요? 이것이 바로 사도가 여기서 인류의 첫 조상 <아담>을 등장시키는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3장>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첫 인간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죄가 들어왔고, 그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모든 후손인 우리 인류는 단 한사람도 예외 없이 아담의 범죄로 인한 <원죄> (the original sin)을 물려 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담의 죄는 자기 한사람의 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죄가 그 모든 후손을 통해 유전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대표성’(representativeness)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창세기>를 통해 잘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아담을 처음 만드셨을때,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창조의 면류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자신의 형상을 따라, 모양을 닮은 심히 영광스런 피조물’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첫 인간 아담이 자기 자신뿐 아니라, 그에게서 태어날 모든 후손들에게 까지도 막대한 권한과 책임의 영향력을 미칠 ‘대표성’이 주어진 이유인 것입니다. 이처럼 아담은 인류의 첫 조상일 뿐 아니라, 아담과 하와를 통해 태어날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존재이기에, 아담 한 사람의 범죄는 그 한사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계속적으로 그 죄가 유전되는 끔찍한 재앙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사망에 이른 것같이, 그에게서 태어나는 모든 인류도 그처럼 죄를 유전 받고, 사망에 갇힌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12절>에서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v.12)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따라서 “~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 (a pattern/ the figure)이라” (v. 14)라고 사도는 정의합니다.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 (패턴/예시/원형)’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것이 아담 한사람의 강력한 영향력이요, 그 한사람의 범죄함이 가져온 전 인류에 미친 비극인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도가 이런 ‘아담의 원죄’를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지금 단순히 ‘아담’을 비난하고, ‘조상탓’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사도는 <현재 우리 성도의 변화된 존재는 얼마나 과거 우리가 변화되기 전 곧 ‘아담에 속해 있을 때’와 본질적으로 바뀐 존재가 되었는지!?>를 <12절>에서 시작하여 ‘5장’ 끝절인 <21절>에서 밝혀주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그것은 ‘아담이 첫 사람으로써 우리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범죄함으로 한 명도 예외 없이 우리에게 죄와 죽음을 가져오게 했듯이, 이제 우리 성도는 <둘째 아담/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께 속함으로 말미암아 죄와 죽음의 억압에서부터 자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앞서 <10절>을 통해 언급했던 것처럼, ‘우리 성도가 ~ 예수 그리스도의 살으심 곧 그분의 생명 안에서’ 이제 죄와 사망의 그 거대한 압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첫번째 편지인 <고린도전서> 15장, 곧 ‘부활장’이라 불리는 장에서 이렇게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조하고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고전. 15:45~47)라고. 이와 같이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고전. 15:49)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에 묘사된 것처럼,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권능의 손으로 완전한 인간, 곧 ‘죄가 조금도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이런 완전한 인간이기에 그 영향력은 심히 큰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담은 그의 후손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질 못하고, 죄를 범함으로 악한 영향력을 유산으로 남기게 된 것입니다. 바로 ‘죄와 죽음’이라는 그 누구도 원치 않는 유산을 남겨주게 된 것입니다. 이런 아담의 부끄러운 유산을 청산할 존재는 그 어떤 그의 원죄를 물려받은 인간도, 하늘의 천사도 아닌 것입니다. 왜냐면, 죄를 범하기 전의 완전한 인간이었던 아담과 같이 인류를 대표할 그 어떤 인간이나 하늘의 천사도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자격미달인 것입니다. 이것이 ‘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 이 땅에 오셨는지?’를 설명하는 정확한 이유인 것입니다. 그것은 앞서도 살펴봤듯이, 그만큼 하나님께서 처음에 창조하신 죄가 없는 ‘완전한 존재’였던 아담의 존재가 얼마나 영광스러웠는지를 역설적으로 웅변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공동점인 <대표성>인 것입니다. 바로 두 사람 모두, 우리 <인간을 대표하는 존재>의 공통점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 간의 명확한 차이를 사도는 서로의 비교를 통해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15절>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 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v.15)라고. 아담은 ‘죄와 사망’을 가져왔지만, 그리스도는 ‘죄용서의 은혜와 영생의 선물’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가 <그리스도와 아담>을 비교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두 사람 모두의 <공통점> 즉 ‘대표성’을 밝히고자 함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비교를 통해 두 사람의 매우 대비되는 <차이점>을 드러내고자 함인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아담 안에서’ <죄와 죽음>을 숙명적으로 경험하게 되었다면,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움과 생명의 은혜와 성령의 은사>를 우리는 이제 풍성히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생명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복음’을 ‘기쁜 소식’ (Good News)이라고 선포하는 이유라고 믿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의 주인공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약속하신 모든 은총과 생명의 은혜를 한량없이 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5절>에서 영광스럽게 묘사한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한량없이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거듭남’ (born again)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단지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 도로 들어가는 것’처럼 육신적으로 밖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와 같이 성령을 통한 <거듭남>의 진정한 의미는 오늘 <로마서 5장>의 말씀에서 비추어 볼 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임을 우리는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 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난 후에도 거듭나기 전과 같이 비록 겉모습은 여전히 같은 외모와 같은 지능을 지니고 살아간다 할찌라도, 이제 우리의 속사람은 완전히 새롭게 창조된 하나님의 자녀로 주와 함께 의와 거룩함을 입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 해전에 미국에 처음 왔을 때 책한권을 구입했는데, 그 책 제목은 ‘예수님짜리’였습니다. 저자는 한국 목사님이셨는데, 이 ‘예수님짜리’라는 표현에서 여러분도 느끼시겠지만, 뭔가 진지하다기 보다는 상당히 유머러스한 표현같이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무엇이 ‘예수님짜리’라는 뜻일까요? 그것은 ‘우리 크리스챤의 존재 가치’가 ‘예수님짜리’ 곧 ‘예수님처럼 가치롭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표현이 매우 성경적이요, 오늘 말씀을 영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제가 지난시간, 한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면서 ‘병들어 죽게 된 애완용 강아지’에 대한 그 사람의 가치기준은 결국 그 강아지를 살리고자 하는 그 사람의 자세에서 결정 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필요한 돈도 있어야 되겠지만, 그 강아지를 고치고자 100만원 쓰기도 아까워하는 주인이 있는가 하면, 10억을 들여서라도 고치고자 원하는 주인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그에게서 자신의 강아지는 돈으로 매길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럽고 가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과 저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 대한 가치를 어느만큼 두시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가치를 세상의 과학자나 진화론자처럼 우리를 물질적으로 혹은 우연의 산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심히 사랑스럽고 자기의 가진 전부를 모두 바쳐 우리를 사랑하는 존재로 여기심을 믿습니다. 제가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의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여러분을 대신하여 죽게 할 만큼 당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정확히 사도가 <로마서 8장>에서 이렇게 선언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 (롬. 8:8)고 말입니다. 사도의 표현처럼,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만큼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과연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여러분을 살리고자 내어 주실 수 있었을까요? 이런 엄청난 결정을 하실 수 있었을까요?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으로 저는 이것이 여러분과 제가 정확히 ‘예수님짜리’라고 우리 스스로 감히 인식하고, 또한 고백하고 감사하며, 그로 말미암아 ‘오직 십자가와 예수님 만’을 자랑할 이유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을 누리는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신분의 변화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실제 삶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경의 충만함으로 그의 생명과 진리 안에서 주와 함께 먹고 마시며, 거듭난 성도의 신분에 합당한 영의 충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를 우리 성도들은 반드시 자문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이미 구원받은 성도, 곧 주님의 제자들을 향하신 예수님의 ‘행복의 초청’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0)라고. 이와 같이 날이 가면 갈수록 나의 마음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이 주시는 진리와 생명을 누리고, 성령님을 통하여 주와 함께 먹고 마시며 축복된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