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ember 6, 2020

“하나님의 나라” (The Kingdom of God)

Preacher:
Passage: 로마서 (Romans) 14:17
Service Type:

“하나님의 나라”

(The Kingdom of God)

12-6-20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14:17

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For the kingdom of God is not a matter of eating and drinking, but of righteousness, peace and joy in the Holy Spirit)

[설교 요약]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 17:20~21)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나라의 시민된 우리 성도들 가운데 임하는 천국의 능력과 은혜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도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할 당시, 교회 안에는 ‘음식’문제로 인하여 큰 다툼과 갈라짐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상황 가운데 성도들에게 어떻게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발생한 갈등을 사랑과 영적 지혜를 통해 극복할 것인지를 지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과연 하나님나라의 시민이 된 성도가 지녀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요?” (What are our reasonable attitudes as ‘citizens of kingdom of God’?) 그것은,

첫째 서로를 비판하지 않는 것’ 입니다 (It is not to judge each other): 왜 우리는 서로를 비판해서는 안되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바울은 “~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 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v.6) 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고 받아들여 주신 지체 (v.3)를 우리가 비판하거나 정죄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형제가 신앙 양심에 거리낌없이 한 행동을 내가 비판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서로를 품어주는 것’ 입니다 (It is to accept each other): 만약 서로를 비판해서는 안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것은 ‘서로를 품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롬. 14장>에서 ‘믿음의 강한 자’ (= 영적으로 성숙된 자)가 약한 자를 품어 주는 것이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롬. 15:1)

셋째, ‘각자 성령께 순종하는 것’ 입니다 (It is to obey the Holy Spirit each of us):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v.17)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성도들에게 있어서 성령님의 절대적인 역할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 뿐 아니라 (요. 3:5~6), 성도들이 영적으로 자라나는데 (=성화) 있어서도 절대적인 역할을 담당하시는 것입니다. 성도의 ‘상담자’ (The Counselor), ‘조력자’ (The Helper), 그리고 ‘위로자’ (The Comforter) 되시는 성령님의 충만하심 안에서 하나님께 대해선 의롭다 함을, 서로에 대해선 평강의 관계를, 그리고 우리 각자는 희락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죽어서 가는 하나님의 나라 뿐 아니라 현재 우리 가운데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성령의 새롭게 하심과 능력으로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어가는 우리 믿음의 공동체 되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가장 익숙하면서도, 낯선 단어의 하나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가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낯설다고 표현한 이유는 저를 포함한 우리 크리스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때로 잘못된 이해에 빼질 때가 많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소망하는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은 단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님을 성도 여러분은 잘 알 것입니다. “~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 17:20~21)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천국>의 정의와 같이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이미 와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깨닫고, 누릴 수 있는 우리 믿음의 공동체 되기 원합니다. 모든 거듭난 성도가 소망하는 하나님의 나라,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좀 더 밝히 깨닫고, 이 천국의 기쁨과 특권을 함께 누려 나가는 공동체 되길 소망합니다.

‘오스카 쿨만’은 그의 책 ‘그리스도와 시간’ (1946)에서 “이미 그러나 아직” (already, but not yet) 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영원’ (아이온)을 향한 ‘시간’ (카이로스)를 <창조-타락-구속-완성>이라는 ‘직선적이고, 구속사적인 관점’으로 해석하면서, 그 ‘중간점’ (이미/ already)인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죽음-부활>과 ‘종결점’인 그리스도의 재림 사이의 [긴장] (그러나 아직/ but not yet)을 도식화 함으로써 이 용어를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용어는 앞서도 언급했듯이, <하나님나라의 도래>라는 관점에서 오늘날 수많은 신학자와 설교자들이 인용하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나라는 성경에서 다양한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써,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 이라고 시작하시면서 그 나라의 특징과 의미를 다양한 비유로 설명하셨음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보자면, “하나님나라의 <확장성>”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겨자씨’ 혹은 ‘누룩’의 비유 (마. 13:31~33)를 통해 설명하셨습니다. 겨자씨는 참깨 보다도 더 작은 씨앗이지만, 그것이 땅에 떨어져 자라나면 거대한 나무가 되어 많은 새들이 깃들일 만큼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중심적인 가치>”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잃어버린 한 생명을 다시 찾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잘 아는 ‘돌아온 탕자’, ‘99마리를 놔 두고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 그리고 ‘되찾은 드라크마의 비유 (눅. 15:3~32)를 통해 그것을 잘 설명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나라의 <마지막 심판>”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어부가 그물에 가득한 물고기를 물가로 끌고 와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버린다’는 비유 (마. 13:47~48)의 말씀을 통해 마지막 주님의 재림시에 임할 의인과 악인의 심판이 그분의 나라의 완성과 함께 있을 것임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알곡과 가라지’ 비유 (마. 13:24~30)도 이 심판의 메시지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 모든 다양한 방식의 천국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통해 우리 주님은 성도가 하나님의 나라를 올바르게 이해함으로써, 어떻게 우리가 천국시민이 될 수 있으며, 그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것인지를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주장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제 저는 좀더 구체적으로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교훈하고 도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에 대해 살펴보기 원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이 포함된 <로마서 14장>의 전체적인 주제를 알아보겠습니다. 사도는 로마서 1장을 시작하면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 1:17) 고 선언하고 나서, 11장까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통하여 그를 믿는 모든 자를 자녀 삼으신 복음의 비밀과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잘 설명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은혜와 특권인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12장>을 시작하면서 사도는 “그러므로 ~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롬. 12:1)고 성도를 격려합니다.

이것은 <롬. 1~11장>까지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 하는 구원받음으로 ‘의롭게 됨’, 즉 ‘칭의’ (justification)가 그 주제라면, <롬. 12장>부터는 구원받은 성도가 어떻게 그 신분에 합당한 ‘영적 성숙’, 즉 ‘성화’ (sanctification)를 이루어 갈 것인가가 그 주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충만하심 가운데 그의 치밀한 논리를 통해 우리 구원받은 성도가 어떻게 진정한 영적 성숙을 이루어 갈 것인가를 공통체적 차원에서 살펴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포함된 <롬. 14장>의 주제는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 혹은 “믿음으로 행하는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4장을 그 내용에서 구체적으로 본다면, 사도는 그 당시 로마교회 안에서 발생했던 갈등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음식의 문제’였습니다. 그 당시 시장에 나온 고기를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로 인하여 교회 안에서 서로 두 그룹으로 나뉘어져 심각한 반목과 갈등현상을 겪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제가 여러분과 함께 결론적으로 질문해 보기 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과연 하나님나라의 시민이 된 성도가 지녀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요?” (What are our reasonable attitudes as ‘citizens of kingdom of God’?)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 서로를 비판하지 않는 것’ 입니다 (It is not to judge each other):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런 사소한 일로 서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사도는 여러번 “비판 (=판단)하지 말라” (v.1,3,13)라고 성도들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서로를 비판해서는 안되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바울은 “~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 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v.6) 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음식을 먹을 것인가? 혹은 먹지 않을 것인가? 라는 문제에 있어서 그들 각자의 ‘동기’와 ‘근거’가 “주를 위하여” 그들이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들 모두의 선한 동기를 보시고 모두 받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v.3). 그럼으로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고 받아들여 주신 지체를 우리가 비판하거나 정죄해서는 안된다고 바울은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남을 비판과 정죄하는 문제는 단지 음식의 문제 뿐만 아니라, ‘날짜에 관한 문제’ (롬. 14:5~6)도 있음을 바울은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날’은 신앙의 이유로 어떤 성도들은 특정한 날을 강조하는 가 하면, 또 반대편에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야기되는 문제인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믿음의 공동체인 수많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는 비판을 살펴보자면 또 얼마나 더 많은 원인들이 있겠습니까? 교회 안에서 야기되는 여러가지 갈등의 요인들 중에는 적지 않은 사안들이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잘못이라기 보다는 상호간의 가치관이나 성장 환경의 차이 등에 기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우리들을 향해 이런 서로의 다름이 주님을 향한 믿음에서 꺼리낌없이 출발한 것이라면, 비록 나에게 별로 내키지 않터라도 그러한 다양성과 다름을 인정하자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서로 비판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을 소유한 자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서로를 품어주는 것’ 입니다 (It is to accept each other): 만약 사도의 주장대로 우리 성도가 서로를 비난하거나 비판해서는 안된다면 우리가 서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서로를 품어주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런 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v. 13)고 조언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도가 매우 심각하게 다루고 있는 것에 대해서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결코 행해서는 안되는 것은 서로의 사소한 의견이나 가치관의 차이로 인하여 <형제를 망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v. 15) 여기서 ‘형제를 망케 하지말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저는 그 무엇보다도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라고 이해합니다. 그리고 ‘실족’은 믿음을 잃고 영적 침체에 빠트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마. 23:13) 만약 우리가 서로를 품어주지 못하고 판단할 때,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주께서 경고하신 것처럼 형제를 실족시키고 천국 문 앞에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서있는 무서운 죄를 범할 수 있음을 사도는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믿음의 지체들은 서로를 용납하고 허물을 덮어주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을 너무도 잘 아시기에 주님은 분명하게 여러분과 저를 향해 새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5:12)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또 한가지 서로 사랑함에 있어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믿음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먼저 돌보아주고 받아주라’는 것입니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롬. 15:1,7) 라고. 우리 스스로 만약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날마다 성숙된 믿음으로 견고해지고 있음을 감사함으로 고백한다면 형제 자매의 미성숙한 행위를 먼저 품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이 사랑의 중요한 실천원리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연약한 지체의 약점을 지금 담당하고 있습니까?

셋째, ‘각자 성령께 순종하는 것’ 입니다 (It is to obey the Holy Spirit each of us): 오늘 본문을 다시 한번 살펴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v.17)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정의하는 “성도가 누리게 되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은혜는 오직 성령 안에서 가능하다”고 규정함을 보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 안에서” 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한번 우리 크리스챤의 삶에 있어서 성령님의 절대적인 역할을 확인하게 됩니다. 성령님은 우리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그것을 가능케 하는 주체이실 뿐 아니라 (요. 3:5~6) 또한 구원받은 성도가 계속해서 성화 (=영적 성장)해 가는데 있어서도 절대적으로 우리를 도와 주셔야 하는 ‘보혜사’ (The Counselor 상담자/ Helper 조력자/ Comforter 위로자)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거듭난 성도들은 반드시 성령님의 도우심과 위로와 인도하심을 넘치게 받아야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말씀에서 사도가 “오직 성령 안에서”라고 단서를 붙인 이유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충만한 도우심 없이는 누구도 형제를 비판하지 않고 용납하고 서로 사랑으로 섬기는 삶을 살수 없는 것입니다.

요점은 ‘오직 성령의 충만을 통하여’ 하나님나라의 시민되는 우리 크리스챤들은 의와 평화와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주석가 매튜헨리는 오늘 본문 <17절>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은 매우 포괄적인 말이다. 하나님께 대해서 우리가 크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의’다. 왜냐하면 의로우신 주께서는 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형제에 대해서 그것은 ‘평강’이다. 이는 그와 함께 평화와 사랑과 자비 가운데서 살기 위함이다. ~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 우리의 지대한 관심사는 ‘성령 안에서의 희락’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난 다음에는 언제나 주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이다” 라고. 만약 지금까지 여러분이 마음속으로 “내가 원하는 선은 행치 못하고, 원치 않는 악은 행한다”고 계속해서 힘들게 고백한다면, 이것은 단순히 내가 완전하지 못해서나 육신의 몸을 입고 있어서가 아니라, 성령님을 신뢰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음으로 성령의 다스림 안에서 죄를 다스려 나가고 있지 못함 때문임을 우리는 깨닫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께 온전히 신뢰와 순종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믿음의 공동체는 이미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은혜와 능력을 누리고 있는 것일까요? 바라기는 우리가 죽어서 가는 하나님의 나라 뿐 아니라 현재 우리 가운데 임한 하나님의 나라의 은혜와 특권을 더욱 풍성하게 누려 나갈 수 있는 우리 교회 공동체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새롭게 하심과 능력을 통해 너와 나의 지극히 사소하고 작은 다름에 등을 돌리지 않고, 도리어 서로가 그 연약과 약점을 대신 담당하고 짊어짐으로 그리스도의 법,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를 통해 허락하신 천국시민의 특징인 의로움과 평화와 즐거움으로 풍성한 우리 아포슬 공동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