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23, 2021

“지혜있는 자” (A Wise Man)

Preacher:
Passage: 잠언 (Proverbs) 9:8~10
Service Type:

“지혜있는 자”

(A Wise Man)

5-23-21

본문말씀: 잠언 (Proverbs) 9:8~10

8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Do not rebuke a mocker or he will hate you; rebuke a wise man and he will love you)

9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와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 (Instruct a wise man and he will be wiser still; teach a righteous man and he will add to his learning)

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wisdom, and knowledge of the Holy One is understanding)

[설교 요약]

            그 누구도 지혜롭다는 말 대신 어리석고 미련하다는 평가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실제로 지혜롭다고 불리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지혜를 향한 우리의 관심과 추구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 모두는 그 지혜가 인간의 삶에서 가장 소중하다는데 동의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지혜’ (wisdom)일까요? 무엇이 ‘지혜’라는 의미일까요? 저는 먼저 지혜의 일반적인 사전적 개념을 살펴보았습니다. <국립국어 대사전>에서는 ‘지혜’ (智慧)는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고 사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정신적 능력”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은 마치 지혜롭고 총명한 자는 더욱 지혜롭게 되고 어리석고 교만한 자는 더욱 어리석어 진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왜 오늘 말씀은 지혜로운 자는 더욱 지혜로와 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세상의 지혜자는 도리어 어리석게 된다고 말씀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의 핵심은 그 지혜의 주인인 하나님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지혜는 인간의 능력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능력을 구하는 겸손히 구하는 자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인간은 진정한 지혜를 얻을수 있을까요?” (How are we able to get the true wisdom?) 그것은,

첫째,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v.10)고 말입니다. 자신의 지혜와 지식을 의지하고 자랑하는 자는 결코 진정한 지혜를 깨닫지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잠언기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잠. 8:13)고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그렇습니다. ‘악을 미워하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됩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아 들으라 ~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4~5)고 명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온 마음을 다해 그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임을 밝히셨습니다 (신. 6:6~7). 그럼으로 하나님을 경외함은 곧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임을 알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혜를 사랑하십니까? 바라기는 오직 하나님만 주실수 있는 참된 지혜로 말미암아 풍성한 삶의 열매를 거두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모든 사람은 지혜롭다는 소리를 듣기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 누구도 지혜롭다는 말 대신 어리석고 미련하다는 평가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실제로 지혜롭다고 불리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우리 크리스챤들 뿐만 아니라, 세상의 철학과 문학과 같이 인간존재를 다루는 학문에 있어서도 지혜는 동일하게 우리 인간이 추구해야할 최상의 ‘덕목’ (value)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물론 지혜를 더욱 온전히 깨닫고 지켜 나가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 근본이유는 각자의 가치기준과 생각이나 종교적 신념에 따라 그 결론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혜를 향한 우리의 관심과 추구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 모두는 그 지혜가 인간의 삶에서 가장 소중하다는데 동의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바라기는 참된 지혜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지혜로 충만함을 받아서, 그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지혜’ (wisdom)일까요? 무엇이 ‘지혜’라는 의미일까요? 저는 먼저 지혜의 일반적인 사전적 개념을 살펴보았습니다. <국립국어 대사전>에서는 ‘지혜’ (智慧)는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고 사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정신적 능력”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학문, 그 중에서도 특별히 인간의 존재와 삶에 대한 물음을 본질적으로 다루는 ‘철학’에 있어서 그 영어단어는 “Philosophy”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Philosophy’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어에서 “사랑”이라는 <Phileo>와 “지혜”라는 <Sophia>가 결합하여 구성된 합성어임을 여러분들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럼으로 ‘철학’은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인 것입니다. 인간이 누구인지를 다루는 가장 심도 깊은 학문으로 인식되는 철학은 본질적으로 ‘지혜를 사랑함으로 비롯된 학문인 것임’을 그 이름에서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들에게서 사랑받는 지혜이지만, 누가 진정한 그 지혜를 소유할 수 있는가 는 우리 인간의 상식과 능력에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상식과 능력에 반비례하기도 하는 서로 상반될 수 있음을 우리 주님은 역설적으로 도전하신 바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 특별히 스스로 지혜롭고 총명하다고 믿는 자들이 먼저 깨닫고 받아들여야만 할 것 같은 (가장 중요하고 중심되는) 진리를 그들이 오히려 깨닫지 못하고 거부하는 이러한 역설을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눅. 10:21)라고.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지혜롭고 슬기 있다고 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숨기시고 반대로 어린 아이들과 같이 지혜가 부족하고 연약한 자에게는 나타내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인간을 포함한 존재하는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가 누구신가?’하는 것과 ‘그분의 아들이 누구신지?’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는 아버지와 그 아들 곧 자신을 깨닫는 자가 없다고, 오히려 지혜와 능력이 부족한 자에게 그것을 주신다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눅. 10:22).

거기에 반해, 오늘 본문 말씀은 반대로 마치 지혜롭고 총명한 자는 더욱 지혜롭게 되고 어리석고 교만한 자는 더욱 어리석어 진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의 논리와 조금 전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지혜에 대한 논리는 왜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까요? 왜 오늘 말씀은 지혜로운 자는 더욱 지혜로와 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세상의 지혜자는 도리어 어리석게 된다고 말씀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의 핵심은 그 지혜의 주인인 하나님 아버지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제 아무리 똑똑하고 지혜로운 척해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요, 비록 지혜와 능력이 부족할지라도 그 지혜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의 뜻을 따르게 될 때 진정한 지혜는 시작되는 것임을 주님은 교훈 (말씀)하는 것이라 저는 믿습니다.

그렇다면, 왜 오늘 본문에서는 지혜로운 자는 더 지혜로와지고, 지혜없는 자는 더 어리석어 진다는 것처럼 말하는 것일까요? 성경에서 말씀하는 지혜는 어떻게 얻을수 있는 것일까요? 어떻게 우리 인간은 진정한 지혜를 얻을수 있을까요?” (How are we able to get the true wisdom?) 그것은,

첫째,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잠언서 말씀은 성경에서도 <지혜의 말씀>이라 불리어집니다. 잠언기자는 그 지혜의 말씀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 1:7)라고 하나님은 잠언 기자를 통해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은 오늘 본문에서 다시한번 강조되고 확인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v.10)고 말입니다.

앞에서 밝힌 것처럼 세상의 지혜롭다고 하는 자는 자신의 지혜와 지식을 의지하고 자랑하지만, 결코 진정한 지혜를 깨닫지도 못하고 누리지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참된 지혜의 시작임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럼으로 그들은 어리석게도 ‘하나님이 없다’고 선언하면서, 도리어 악인의 꾀를 좇고 죄인의 길을 따르고 교만한 자의 자리에 앉기를 즐기는 것입니다.

둘째,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잠언기자가 선언한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시작’이라면, 한걸음 더 나아가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일까요?’ 무엇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매우 다양한 적용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저는 크게 2가지로 요약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번째로 <소극적 의미>의 경외함이요, 그 다음은 <적극적 의미>의 경외함입니다. 여기서 ‘소극적’이라 함은 ‘무엇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그리고 ‘적극적’이라 함은 ‘무엇을 행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소극적 의미의 경외함을 살펴보겠습니다. 감사하게도 잠언서는 여기에 대해 잘 밝혀주고 있습니다. 먼저 <잠. 3장>에서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찌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찌어다” (잠. 3:7)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 <잠. 8장>에서 다시한번 이렇게 선명하게 ‘하나님을 경외함’에 대해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잠. 8:13)고. ‘악을 미워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자 한다면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악을 나 또한 미워하고 더 나아가 악과 맞서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두번째 의미, 즉 <적극적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분은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말씀은 지극히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다시 한번 우리 청년 여러분들에게 강조하고 도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의 가장 심각한 영적 문제의 중심에는 성도들이 말씀을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청년 크리스챤들의 현실이 그렇습니다. 명석한 두뇌와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자신의 꿈을 펼치고자 하는 열정까지도 있는데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가까이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성도들이 무엇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명기서 6장>에서 모세를 통해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사랑’을 명령하셨습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4~5)라고.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즉 경외하는 것일까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신. 6:6~7)라고. 바로 말씀을 가까이하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들 자신 뿐 아니라, 그의 자녀들에게도 부지런히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은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시편은 시작하면서 “복 있는 사람은 ~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 1:1~2)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즐거워하고 가까이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복된 사람이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혜를 사랑하십니까? 거만하고 어리석게 지혜를 무시하고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지는 않습니까?! 생명과 지혜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지혜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습니까? 바라기는 오직 하나님만 주실수 있는 참된 지혜로 말미암아 풍성한 삶의 열매를 거두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대합니다.

Topi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