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 (Alive To God)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
(Alive To God)
8-9-26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6:10~11
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For in that He died, He died unto sin once: but in that He lives, He lives unto God.)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Likewise reckon you also yourselves to be dead indeed unto sin, but alive unto God through Jesus Christ our Lord.)
[설교 요약]
오늘 사도는 ‘그리스도와 연합’이라는 교리적인 가르침을 마무리하며,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v.11)라고 격려합니다.
먼저 지난 시간 <6장6~7절>에서, “~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v.6)는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이것은 사도가 <3~5절>에서 ‘성령침례’ 곧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남’을 통한 결과입니다.
바로 ‘우리의 옛사람은 완전히 죽었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처럼 성령 침례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된 우리 성도의 최종적인 변화된 상태가 무엇인지를 오늘 말씀에서 사도는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라고 규정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는 뜻일까요?” 그것은
첫째,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 17:5)라는 주님의 기도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는 뜻은, 본질적으로 <성자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세 전부터 성부와 나누셨던 영화와 생명 안에서의 관계>를 뜻합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권세가 우리에게 전가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사도는 먼저 <10절>에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살아 있는 관계’에 들어 가셨음을 밝히고 나서,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v.11)고 ‘논리적 연계성’을 주장합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과 아들의 권세가 우리에게 전가됨으로 우리 또한 하나님과 살아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셋째, ‘성도를 구원하신 목적’을 의미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첫번째 질문 “사람의 근본목적은 무엇인가?”의 대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다”입니다. 이처럼 ‘그의 독생자를 통하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뜻’은 ‘그를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요, ‘그분 앞에서 살아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남으로 성부의 선하신 뜻에 순종함으로 그분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의 말씀과 은혜를 감사하고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축복된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지난 시간 사도가 <로마서6장6절>에서 언급한 ‘옛사람’이란 개념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과거의 나는 죽었다는 의미를 더 분명히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롬. 6:6)라고. 이처럼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것은 ‘아담에 속한 옛사람’ 곧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옛사람’이 완전히 죽었음을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용서함 받아 의롭게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천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죽고, 새사람이 되었지만, 우리의 육신 곧 사도가 ‘죄의 몸’ (the body of sin)이라고 묘사한 <죄가 거하는 몸>은 ‘여전히 과거 죄가 왕 노릇하던 옛사람의 죄악된 성품과 악한 습관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죄가 말입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으니, 이제는 더 이상 이미 죽은 옛 사람의 성품을 좇아 살아가서는 안되고,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지음받은 새사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라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을 향해 ‘죄의 정욕을 죽이라’ (골.3:5)혹은 ‘몸의 행실을 죽이라’ (롬.8:13)고 도전하는 뜻입니다. 이것까지가 지난시간 ‘옛사람’을 주제로 한 사도의 메시지였다면, 오늘 사도는 ‘그리스도와 연합’이라는 교리적인 가르침을 마무리하며, 한층 더 분명하게 (결론적으로) 성도들을 향해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v.11)라고 도전하고 격려합니다. 오늘 함께 사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 성도의 축복된 존재’를 결론적으로 밝히며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더욱 깊이 깨닫고, 우리 각자의 삶 가운데 적용하고 누려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앞서도 살펴본 것처럼, 지난 시간 <6장6~7절>에서 사도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해 있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혀 나갔던 것입니다. 먼저 사도는 그것을 밝혀 나가며 <6장>을 시작하면서 <3~5절>에서 ‘침례’라는 개념을 통해 그것을 설명했습니다. 이 침례는 정확히 말해, 우리가 받는 ‘물침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성령침례’임을 우리는 그동안 확인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침례를 받음으로 다시 살아나게 되는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상징이나 비유가 아니라, 우리가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고 깨닫을 수는 없다 할지라도, 실제로 우리 존재에서 일어난 진실한 변화와 사건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난 사건’인 것입니다. 사도가 <5절>에서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6:5)는 것이 바로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는 지난 주 <6~7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때, 그분과 함께 성령침례 받음으로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완전히 죽고, 또한 그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함께 다시 살아나게 되었음을 밝혔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먼저 오늘 본문 <10~11절>로 이어지기 전에 바로 연결되는 <8~9절>에 대해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이해할 것은 이 ‘세절’은 새로운 개념을 사도가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언급한 ‘성령 침례’에 관련한 내용인 <3~5절>을 사도가 다시 한번 되집어 보고, 우리가 다시 살아나게 되고, 다시는 사망이 왕 노릇할 수 없는 이유를 밝히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v.8~9)라고. 그리고 이처럼 죄와 사망이 더 이상 우리를 주장할 수 없는 이유를 사도는 오늘 본문말씀 <10~11절>말씀으로 마무리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해 단번에 죽으셨기 때문’이요,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제 제가 오늘 말씀 가운데 여러분과 좀더 깊이 살펴보고, 이해하기 원하는 중심개념은 오늘 설교제목과 같이 ‘하나님께 대해 산 자’ 곧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는 뜻일까요?” 그것은
첫째,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는 언제나 살아 있는 관계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왜냐하면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성령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전부터 언제나 영원토록 생명 안에서 지극히 친밀하신 하나되심 안에서 지극한 영광과 권세를 공유하시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성부와 성자가 나누었던 영광과 존귀가 영원 전부터 가졌던 관계가 무엇인지를 잘 드러내 보여주는 것인데, 이것은 주님의 <요한복음 17장>의 ‘대제사장적 기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 17:5)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땅에 우리처럼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로마서 8장>에서는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 8:3)라고 그리스도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in the likeness) 오셨다는 뜻은 그분이 우리처럼 ‘죄 있는 존재’라는 뜻이 아니라, <죄는 없으시되, 타락한 인류의 육신과 같은 연약함을 입으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정확히 <빌립보서 2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과 같이 되었고” (빌. 2:7)라고 했을 때, ‘종의 형체를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함’이요, ‘우리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십자가에 목 박히시기 전날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을 때,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마. 26:39a)라고 땀이 피같이 흘러내렸던 것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그만큼 십자가의 고통은 주께서 감당치 힘든 고난의 잔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9b)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으로 기도를 마감하셨던 것입니다. 더욱이 주께서 마지막 십자가의 쓴 잔을 마시실 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 27:46)참으로 비통하게 하나님을 향해 외치셨을 때, 이것은 단순히 십자가에서 자신이 겪는 육체적 고통이 심히 큰 그 이상의 고통을 의미합니다. 그 육체적 고통과도 비교할 수 없이 더 극심한 고통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와의 완전한 영적 단절’인 것입니다. 영원전부터 성부와 언제나 하나이셨던 성자가 우리 인간의 모든 죄와 저주를 지고 이 십자가 위에서 죽는 순간, 성부와 완전한 영적 단절을 경험해야 했기에, 이 성부와의 단절의 고통은 결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난의 잔임을 우리는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제 주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단번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속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가 이미 <로마서4장>에서 밝혔듯이, 성부의 뜻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생명의 권능으로 살리신 것’ (롬.4:24)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가 오늘 <10절>말씀에서 선언하는 내용입니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v.10)라고.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영 단번 죽으심으로 모든 우리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신 그의 독생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그 권능으로 다시 살리실 뿐 아니라,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9~11) 이처럼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셔서 과거 하나님 아버지와 누렸던 영광과 친밀한 생명의 관계를 누려 나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단번에 죽으시고, 이제 다시 살아나셔서 원래 하나님과 하나되어 누리셨던 생명의 교제 안으로 들어가시는 것이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성부와 성자 하나님이 영원한 영광 안에서 친밀하게 교제하심’이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권세가 우리에게 전가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 본문 <10절>과 <11절>의 진행상황을 좀더 분명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v.10-11) 여기에서 사도는 먼저 <10절>에서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단번에 죽으셨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이제 그리스도는 하늘에 오르사 영원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고 권세와 영광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살아 있는 관계를 누려 나가심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1절>에서는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에 대하여 살아 있는 관계 (존재)가 되신 것은, 이제 우리 성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다’라고 영적 논리를 통해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v.11) 다시 말해서, 만약 예수님께서 이처럼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 아버지와 살아 있는 생명의 관계를 누리신다면, 또한 우리 성도들도 동일하게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 곧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 있는 관계’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처럼 예수님께 일어난 일이,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이미 제가 그동안 여러 번 설명 드렸듯이, 사도가 <6장> ‘3절에서5절까지’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그것이 ‘성령침례’라고 말씀드렸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함께 죽고, 또한 그분의 부활과 합하여 함께 살아나게 된 성령침례’인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침례’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는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다시 살아남으로, 우리의 <옛사람>이 이제 완전히 죽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새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의 고백처럼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20)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새사람이 되어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을 통하여 예비하신 모든 하늘과 땅의 충만한 유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바로 ‘예수님의 대속죽음’을 통해서요, ‘그분을 믿음으로 성령침례를 받음’을 통하여, 그의 생명 안에서 다시 살아남으로, 주님의 의로우심과 권세가 우리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대하여 살아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심과 아들 되심의 권세와 영광이, 그분을 믿을 때 우리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임을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가 6장에서 3절이후 성령침례의 놀라운 영적 결과에 대해 오늘 본문 11절에 이르기까지 설명한 이유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v. 11) 성자가 성부와 함께 누렸던 친밀한 하나님의 관계, 곧 ‘하나님을 대하여 살아 있는 관계’의 삶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가 우리의 권세가 됨으로 우리 또한 누리게 된 것입니다.
셋째, ‘성도를 구원하신 목적’을 의미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우리 성도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그 근본적 출발이 ‘성부와 성자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안에서의 친밀한 하나되심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 자신에게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출발함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요, 하나님을 떠났던,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였습니다.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말입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은 그 말할 수 없는 긍휼하심과 사랑으로 그의 아들 안에서 우리를 죄 용서해 주실 뿐 아니라, 그의 아들과 딸이 되는 놀라운 자녀의 권세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저는 아직도 저와 같은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끝을 알 수 없는 은혜와 사랑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확신하는 한가지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통해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주신 권세와 영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자녀 삼으셔서 권세와 영광을 허락하시는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뜻은 한마디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라고 저는 정의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이런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신 뜻을 여러 곳에서 밝히고 있지만, 저는 그 중에서도 사도가 <로마서8장>에서 밝히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가 그것이라고 믿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뇨” (롬.8:32)라고 말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믿고 확신할 수 있냐구요?! 사도는 ‘한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그의 지극히 사랑하는 독생하신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내어 줌으로 우리를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서 묵상해 본 것처럼, 그 아들이 감당해야 했던 십자가의 고난이, 영원한 성부와 성자가 단절됨으로 겪으셔야 했던 그 극심한 고통의 잔을 주께서 마시셨던 이유는, 오직 우리를 살리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 하심입니다. ‘이토록 사랑하는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도의 결론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는다는 가정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 곧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의 아들의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셨다면, 다른 것은 전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치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신 목적이요, 자녀 삼으신 이유라고 저는 믿습니다. 바로 그 아들과 함께 하늘과 땅에 속한 모든 것을 유업으로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깨닫아가고, 이런 선하시고 존귀하신 아버지의 뜻과 성품을 날마다 추구하고, 갈망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다’는 뜻임을 믿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며,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한가지 놓치지 않기를 원하는 것이 있는데, 이런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을 따라,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안에서 허락하신 축복된 은혜의 삶’은 최종적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들> 곧 <교회 공동체>로 함께 자라가고 완성되어 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정확히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주께서 교회를 세우신 이유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5:27)라고 말입니다. 우리 각자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게 할 뿐 아니라, 주의 몸된 지체가 되어 하나로 연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름 잡힌 것이나, 흠이 없이 순결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거하실 성전으로 자라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각자는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자’입니까? 또한 우리 아포슬 교회 공동체는 함께 세움을 받아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는 ‘주의 몸’으로 자라가고 입니까? 마지막으로 우리가 한가지 오해하지 말아라 할 것은, 사도가 <11절>에서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v. 11)라고 말했을 때, “산 자로 여긴다”는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긴다’ (reckon)라는 표현은 단순히 ‘간주하다’ 혹은 ‘그렇다라고 생각하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마치 실제는 아닌데, 그런 것처럼 상상하거나, 간주하는 것이 11절의 ‘여기다’는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여기서 “산 자로 여기다”는 정확한 뜻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대하여 실제로 살아 있는 존재이듯이, 너희 자신도 또한 그리스도를 인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실제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음을 깨닫고, 그렇게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변화된 우리 성도의 놀라운 신분의 최종적인 결과인 것입니다. 이런 성도의 삶이 주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약속하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시는 삶이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나는 성령충만한 기쁨과 만족과 감사의 삶인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와 같이 날마다 주의 말씀과 은혜를 갈망하고 추구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는 그분의 아들과 딸로 살아가는 축복된 삶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우리 아포슬 공동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