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19, 2020

“주 안에서 기뻐하라” (Rejoice in the Lord)

Preacher:
Passage: 빌립보서 (Phillippians) 3:1
Service Type:

“주 안에서 기뻐하라”

(Rejoice in the Lord)

1-19-20

본문말씀: 빌립보서 (Phillippians) 3:1

1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Finally, my brothers, rejoice in the Lord! It is no trouble for me to write the same things to you again, and it is a safeguard for you.)

 

[설교 요약]

            빌립보서의 <주제>가 ‘주 안에서 누리는 기쁨’ 입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다시한번 성도들을 격려합니다. 이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성도들이 누리는 기쁨의 근거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우리가 주 안에 있지 못할 때는 어떻게 되나요?” (If we are not in the Lord, what should happen?) 그것은,

첫째, “안전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It will not safe for us): 사도는 “주 안에서 기뻐하라 ~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v.1)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 안에 있지 못할 때, 인간적인 기쁨을 추구하고, 인위적으로 유쾌해 보이고자 애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기쁨의 근거가 되지 못하고 불안전한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기쁨을 쉽게 상실하게 될 것” 입니다 (It will easily take rejoices away from us): 우리 주님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15:11) 그리고 “~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16:22b)고 약속하셨습니다. 주 안에 있지 못할 때, 우리의 인간적인 기쁨은 쉽게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바울과 같은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 입니다 (It will not give us the rejoice which Paul enjoyed): 바울을 바울 되게 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을 따라 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으로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빌.3:17)고 사도는 성도들에게 도전합니다. 주 안에서 있지 못할 때 바울이 누렸던 기쁨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의 기쁨은 주 안에서 시작됨으로 이 기쁨의 원천은 성령의 충만하심으로 주님의 말씀을 깨닫아 내 죄를 회개하고 그 뜻을 따라 순종으로 나아 감으로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주 안에서 기쁨 누리는 성도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사도는 다시 성도들을 격려하고 도전합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함께 묵상하는 빌립보서의 <주제>가 ‘주 안에서 누리는 기쁨’임을 이미 우리는 나눈 바 있습니다. 왜 사도는 거듭 거듭 빌립보 성도들을 향해 기뻐하길 강권하는 것일까요? 왜 길지 않은 그의 서신에서 반복해서 성도들에게 기쁨의 삶을 살아가길 도전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기쁨의 삶을 산다는 것은 단순히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다든가, ‘삶을 즐기고 행복하게 사는 방식’을 찾으라는 식의 인생을 관조하는 듯한 철학적인 도전을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거기에는 분명한 기쁨의 이유가 있고, 그 기쁨을 가져오는 진정한 주체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 모두 이 빌립보서 말씀 가운데서 그 부인할 수 없는 기쁨의 이유를 발견하고, 그 기쁨을 누려 나갈수 있는 복된 인생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빌립보 3장>을 시작하는 오늘 말씀에서 중심이 되는 한가지 질문이 있다면 이것일 것입니다. “우리 성도의 기쁨은 어떻게 가능하며, 어떻게 시작되는 것인가?”하고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아우럴수 있는 중요한 기쁨의 근거이자, 출발점이 무엇인가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v. 1a)고 말입니다. 이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성도들이 누리는 기쁨의 근거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성도들이 누리는 기쁨의 근거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기쁨이라는 것은 우리 크리스챤 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모두 추구하고 원하는 것입니다. 과연 누가 기쁨을 거부하고 슬픔과 괴로움을 원하고 추구할까요? [지난번 올해 신년 예배때, 함께 나눴듯이 누구나 지혜로운 삶을 살기 원하지 어리석은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지혜로운 자라고 불리어질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그리고 ‘누가 지혜로운 자일까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잠. 9:10) 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누가 지혜로운 자 인지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요, 거룩하신 그 분을 아는 것이 명철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때, ‘누가 진정한 기쁨을 누릴수 있는 자인가?’에 대해서도 성경은 결코 모호하게 대답하지 않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는 자’가 ‘참된 기쁨을 누리는 자’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 안에서’ (in the Lord)라는 말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뜻이요, 이것은 동시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구원을 이루시고, 우리를 그의 자녀 삼으신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우리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 밖에는 참된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우리가 주 안에 있지 못할 때는 어떻게 되나요?” (If we are not in the Lord, what should happen?) 라고 우리는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첫째, “안전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It will not safe for us): 사도는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v.1a) 고 말하고 나서 그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답하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v.1b)고 그는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사도가 강조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안전하지 못할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일까요? 만약 ‘주 안에서’ 기뻐하지 못할 때, 우리들은 결국 그릇된 기쁨을 추구하기 때문에 안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로이드 존스>목사는 이렇게 주석합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기쁨을 추구할 때에 따르는 첫째위험은 <감정을 직접 공략해서 인위적으로 기쁜 상태를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행복감이나 기쁜 감정을 누리고자 감정적인 본성을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자극하는 것입니다. 둘째위험은 <밝고 행복하고 유쾌하게 보이고자 애쓰는 것>입니다. 사실 내 감정과 상태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그런 것처럼 스스로를 설득하고 최면을 걸어 행복하고 유쾌한 척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마인드 컨트롤’이라는 것도 이 유형의 하나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처한 상황에 빠져서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보다, 어쨌던 할수 있는 한 그 상황을 적극적으로 벗어나고자 노력한다는 면에서는 긍적적인 면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적 노력이 사도가 말하는 ‘기뻐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출발이 ‘주 안에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 스스로의 노력과 의지이기에 위험하다는 것이요,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고, 어느 곳으로 뛸지 모르는 용수철과 같은 인간의 감정과 의지에 기반을 둔 것이기에 안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둘째, “기쁨을 쉽게 상실하게 될 것” 입니다 (It will easily take rejoices away from us): <국립표준 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면, ‘기쁨”을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의 흐뭇하고 흡족한 마음이나 느낌”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웹스터 영어사전>에서는 ‘rejoice’ (기쁨)을 “to feel or show that you are very happy about something” 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럼으로 일반적 의미에서 ‘기쁨이란 내가 바라는 어떤 욕구가 충족됨에 따라 느끼는 흐뭇하고 흡족한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속에서 느끼는 기쁨은 내가 원하는 그 무엇인가가 충족되면 잠시 기쁨을 누렸다가, 원치 않는 그 어떤 상황이 발생 했을때 쉽게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마치 밀물과 썰물처럼 기쁨과 슬픔을 끝없이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이 누리는 기쁨은 이런 세상 사람들이 느끼는 기쁨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우리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내 안에 거하라” (요.15:4)고 선언하시고 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 (요.15:5a) 라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에 대해서 분명하게 밝혀 주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 이니라” (요.15:11)고. 무슨 말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 성도들의 기쁨의 근거는 단순히 나의 바램과 육신적인 욕구가 충족됨으로 흡족하여 느끼는 만족스러운 느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줄수 없는 참된 기쁨의 원천인 참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 자신 안에서만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 포도나무 되셔서 그에게 접붙임 바 되어 가지된 우리 성도 모두에게 가지가 뻗어 나고 푸른 잎사귀와 열매를 아름답고 풍성하게 열매 맺을수 있도록 원액을 공급해 주시는 우리 주님 안에서만 우리의 기쁨은 충족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 줄 아십니까? 주님은 세상이 줄수 없는 진정한 기쁨을 주실 뿐 아니라, 세상이 빼앗을 수도 없는 기쁨을 약속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16:22) 라고. 우리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결코 빼앗기지 않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주님 안에서 누리는 ‘구원의 기쁨’ (the rejoice in salvation) 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의 신분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이자 영광인가를 영의 눈을 떠 내 평생을 통해 점점 더 깨닫아 나가는 것입니다. 구원의 감격은 예수 믿고 영접할 때 한번하면 그만인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은혜를 깨닫고 누리는 자는 결코 그렇수 없습니다. 평생을 통해 날마다 넘쳐 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한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에서 자신을 믿고 주로 영접할때,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그 속에서 영원토록 솟아나는 생수” (요. 4:14)를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또한 명절 끝날에도 성전에 서셔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요.7:37~38) 라고. 그리고 사도 요한은 이 ‘생수의 강’은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7:39) 고 그 뜻을 설명했습니다. 곧 그를 믿는 자가 받게 될 성령의 충만하심이 생수의 강처럼 흘러내린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 안에서 기쁨을 추구하지 않을 때, 나 자신이나 세상 가운데서 그 기쁨을 추구할 때, 우리는 결코 주께서 약속하신 기쁨을 누릴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지 못할 때, 우리는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처럼 시시각각 육신적이요 감각적인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의 느낌을 반복하며 부서진 파편처럼 정처없이 인생의 강을 떠내려 가는 것입니다. 참된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셋째, “바울과 같은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 입니다 (It will not give us the rejoice which Paul enjoyed): 4장으로 구성된 비교적 짧은 서신서, 빌립보서에서 사도 바울은 무려 16씩 ‘기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빌.3장>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그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 ~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고. 사도는 거듭 거듭해서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토록 중요하기에 아무리 강조하고 반복해서 말한다고 해서 자신은 전혀 번거로움이 없고, 반대로 성도들에게는 안전하고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하면서 이해하게 되는 것은 사도 바울은 지금 이론적으로나, 신학적인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사도는 자신이 정확하게 깨닫고 삶으로 누린 <기쁨의 능력과 유익성>을 경험을 통해 주장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해할 때, 사도가 빌립보 성도들에게 ‘기뻐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단순한 격려 차원이 아니라, 전쟁에 나가는 백전노장 장군이 그의 군사들에게 명령하는 차원에 더 가깝다고 저는 이해합니다. 다시 말해,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은 너희가 더 훌륭하고 성숙된 크리스챤이 될수 있을 것이라는 조언의 차원이 아니라, ‘만약 주안에서 기뻐하지 않을 때, 너희는 싸울 싸움에서 실패하게 될 것이다!’라는 강력한 경고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를 통틀어 사도 바울과 같이 기독교의 진리를 꿰뚫어 보고 하나님의 뜻을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성령의 충만 가운데 총체적으로 이해한 신학자가 과연 몇명이나 될까요? 그러나 사도 바울의 진정한 면목은 그의 그와 같은 놀라운 신학관이나 말씀에 대한 탁월한 이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가 믿음을 따라 살았다는데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말로 만이 아니라, 삶으로 실천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삶으로 믿음을 실천했던 모습을 풍성하게 보여주는 그의 대표적인 서신서가 <빌립보서>일 것입니다. 사도는 자신의 가르침만 지켜 행하라고 말하지 않고, 자신의 말과 행동, 삶 전체를 본받으라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강력한 신앙적인 본 이자 도전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빌.3:17) 라고. 이 빌립보서에서 그가 고백하는 핵심은 이것이 아닐까요; ‘형제 자매 여러분, 내가 주 안에서 기뻐하며 살았습니다. 말로 만이 아니라 삶으로 주 안에서 세상이 줄수도 세상이 빼앗을 수도 없는 이 놀라운 기쁨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감히 제가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육신을 이기고, 악한 영 사단 마귀와 싸워 이길수 있었던 승리의 비밀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러니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주 안에서 기뻐 하십시요. 다시 말하지만 주 안에서 기뻐 하십시요.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해서 쓰는 것이 내게는 결코 수고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주 안에서의 기쁨을 통해서 저는 날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기 때문이요, 이것만이 성도 여러분 또한 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길임을 저는 믿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구약의 ‘느헤미야서’를 읽어보면 유대민족의 지도자, 느헤미야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남아 있던 유다 백성들이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자 힘씁니다. 그러나 그 당시 그 땅에서 함께 섞여 살던 이방민족들은 그것을 시기하고 미워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랄한 방해를 해댑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역경을 뚫고 이들의 믿음 가운데 하나님의 능하신 손길을 통해 마침내 무너진 성벽을 완성합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그 모든 백성들을 수문 앞 광장에 모으고 학사 에스라에게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모세의 율법책을 낭독하게 합니다.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오정까지 학사 에스라가 읽었고, 여러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 낭독한 뜻을 해석하여 백성들이 그 낭독한 것을 다 깨닫게 했을때, 그 말씀을 깨닫은 백성들이 모두 울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느. 8:1~9a). 그때 느헤미야와 지도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느. 8:9b)고. 그리고 계속해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그 읽어 들린 말을 밝히 앎이니라” (느. 8:12) 성도 여러분, 성도의 기쁨의 원천은 말씀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그 말씀 앞에서 내 죄를 자복하고 그 말씀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말로 만이 아니라 겸손함과 진실함으로 순종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우리 주님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성령님의 충만하신 은혜 가운데 기쁨과 평화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런 주 안에서 기쁨으로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Topi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