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mber 19, 2023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Enter His With Thanksgiving)

Preacher:
Series:
Passage: 시편 (Psalms) 100:4
Service Type: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Enter His Gates With Thanksgiving)

11-19-23

본문말씀: 시편 (Psalms) 100:4

4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전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Enter His gates with thanksgiving and His courts with praise; give thanks to Him and praise His name.)

[설교 요약]

오늘은 추수감사절 주일입니다. 저는 “왜 우리 인간은 감사해야 하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해 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 50:23)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그 어떤 행위보다도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를 통해 영광 받으신다고 선언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첫번째 질문은 “인간의 근본 목적은 무엇인가?” (What is the chief end of man?) 이고, 그 대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하며,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다”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인간의 최고의 존재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라면, 그 영화롭게 하는 중심에는 ‘하나님께 감사드림’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감사를 행할수 있을까요? 그것은

첫째, “믿음으로써 시작”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에녹의 삶을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히. 11:5-6)라고 설명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그 출발점은 믿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남”으로 커갑니다: 다윗은 고난과 핍박의 날에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감사함으로 찬양했습니다 (시. 18,22,54,68편등). 왜냐하면, 그는 선한 목자 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점점 더 자라났기 때문입니다. 이 선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날 때, 우리는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주를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음”으로 넘쳐남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주님의 크신 능력 안에 끝까지 머무를 수 있게 되었는지를 고린도후서에서 간증합니다 (고후. 11-12장). 그것은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없애 주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남겨두신 은혜라는 것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고후. 12:9) 는 주님의 은혜는 우리가 약할 때 도리어 강하게 되는 역전의 놀라운 은혜임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선한 목자되신 하나님 아버지를 더욱 신뢰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더욱 자라남으로 날마다 풍성한 감사의 제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올 2023년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우리는 인정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추수감사절’이 이제 며칠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이곳 미국에서 살아가다 보면, 이렇게 추수감사절이 가깝게 다가왔다는 것은 올 한 해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여러분이 아시듯이 이곳 조지아에서는 추수감사절이 끝남과 동시에 년말 연시를 본격적으로 알리는 크리스마스 캐롤송이 음악방송이나 쇼핑센타의 가게들에서 흘러나오게 되고, 곧 이어지는 마지막달 12월은 그야말로 쏜살같이 새해를 향해 달아남을 우리 모두는 공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추수감사절>이 되었다는 것이 이와 같이 한 해가 끝나간다는 하나의 감상적인 차원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크리스챤은 기울어가는 한 해를 마무리하며, 이 추수감사절을 통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추수감사절’이름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처럼 ‘감사함’일 것입니다. 바라기는 오늘 추수감사절 예배 가운데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여러분과 저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 지으실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 가운데 ‘영광과 존귀’로 우리에게 관을 씌워 주시는 선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더욱 더 자라감으로 온 맘 다해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찬양과 영광을 올려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추수감사절의 유래는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온 청교도인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1620년 9월 6일 ‘메이 플라워’호를 타고 아이를 포함하여 총 102명의 청교도인들이 미국 동북부 해안 도시인 <플리머스>에 처음으로 도착했습니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 혹독한 추위가 몰아 닥쳤고, 그 당시 유행했던 전염병과 들짐승 그리고 식량부족 등으로 인하여 이듬해 봄이 되었을 때, 살아남은 자들은 50명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망하지 않고 그들에게 새로운 땅과 기회를 주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봄에 씨를 뿌리고, 한 여름을 땀과 온 힘을 다해 농사지었고 더디어 이 맘 때 즈음 첫 수확한 풍성한 곡식과 과일을 기쁨으로 하나님께 ‘추수감사예배’를 올려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때 자신들 뿐 아니라, 이웃의 인디언들을 초대하여 감사예배를 드렸는데, 인디언들이 칠면조요리를 가지고 와서 함께 나눠 먹은 것이 개기가 되어 오늘날에 칠면조요리는 미국의 추수감사절에 빠질 수 없는 전통음식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것이 개략적인 미국의 추수감사절의 유래라고 한다면, 저는 오늘 이 시간 성도 여러분과 함께 ‘감사’에 대한 보다 본질적인 질문을 해보기 원합니다. 그것은 “왜 우리 인간은 감사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점을 살펴봄에 있어서 저는 적어도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그렇게 두드러진 이유를 발견하기 힘들었습니다. 물론 윤리와 도덕적으로, 그리고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감사가 가치있고 중요하다’는 식의 보편타당한 주장을 상당히 많이 볼수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사람을 아름답게 만들고, 사회를 따뜻하게 그리고 세상을 밝게 만드는 것이 감사하는 마음이다”라든가, “감사하는 마음은 사람을 긍정적으로 만들고 행복하게 한다” 혹은 “감사는 부정적인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두려움을 물리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라는 식의 감사에 대한 정의내지 감사가 가져오게 될 긍정적인 영향력을 피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의 감사에 대한 이런 일반적인 (보편타당한) 평가에 비해, 성경에서의 관점은 그것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감사’의 가치를 절대적으로 평가하고, 심각하게 다루고 있음을 저는 크리스챤의 한사람으로서 발견하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성경 어디에 그런 말씀이 있느냐? 고 묻으신다면, 저는 그 대표적인 말씀의 하나가 바로 <시편 50편>의 말씀이라고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 50:23)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이 말씀은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그 어떤 행위보다도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를 통해 하나님 자신이 영광 받으신다’고 분명히 선언하신다는 뜻입니다.

제가 그동안 여러 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인간의 근본목적은 무엇인가?>라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첫번째 질문, 즉 “인간의 근본 목적은 무엇인가?” (What is the chief end of man?)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하며,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다”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의 최고의 존재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에 있다면, 다음 질문은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조금 전 <시편 50편>에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시. 50:23)라고 하나님께서 직접 ‘무엇이 우리 인간 (=하나님의 자녀)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것인지?’를 영적으로 분명히 밝혀 주는 말씀임을 유추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제사 (예배)드리는 것’이 그 어떤 숫양의 기름진 제물보다도, 어떤 값비싼 희생제물보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더욱 영화롭게 하여 드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우리 자신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그 감사의 깊은 의미를 아직까지도 온전히 잘 깨닫지 못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해 볼 때 우리는 더욱 ‘감사’가 성도의 삶에 가져오게 될 그 영광스런 결과를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 앞에서 행위가 옳다고 인정함을 받게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되는 통로가 이 ‘감사함’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감사를 행할수 있을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첫째, “믿음으로써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서 중의 복음서라고 일컫는 로마서의 주제가 로마서 1장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 1:17)라는 것임을 알고 있듯이, 우리 성도의 삶에 있어서 최선의 덕목도 바로 ‘믿음’에서 출발함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의 의미는 ‘죄사함과 구원받음’이 우리의 믿음에서 출발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죄사함 받아 영생의 구원을 누리게 된 그 출발점은 우리 각자의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내어 주진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각자가 이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믿음을 통하여 인격적으로 분명하게 결단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죄 씻음 받아 축복된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언제나 오직 믿음이라는 문을 통과함으로써 만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복과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관점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영생을 이미 얻은 하나님의 자녀, 곧 거듭난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어떻게 우리 크리스챤은 축복된 삶을 살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을 우리는 묵상하고 고민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어떻게 축복된 삶을 살것인가를 묵상하며 이 질문을 ‘어떻게 우리 크리스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저는 바꾸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가장 훌륭한 대답의 하나가 <히브리서 11장>의 말씀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6)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장>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히브리서 11장>에서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 가운데 “삼백 년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가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한 에녹의 삶”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에녹은 삼백년이 넘는 평생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심히 축복된 성경의 평가를 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가 죽음을 보지 않고 데려가셨다고 밝히면서 믿음을 다시 언급하는 것입니다. 바로 앞절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히. 11:5b)라고. 그렇습니다. 에녹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성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그 출발점은 그 어떤 값진 제물이나, 그 어떤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에서 출발함을 우리는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남”으로 커갑니다: 다윗이 기쁨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올려 드렸던 시편의 하나가 <시편 8편>입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시. 8:1,3-4) 이 시편은 다윗이 목동으로 생활하던 젊은 시절의 어느날, 그가 홀로 양떼를 지키는 중에, 별이 총총히 빛나며 아름답고 광활한 밤하늘을 바라보며 자신 뿐만 아니라 세상과 온 우주만물을 아름답고 신묘막측하게 지으시고 운행케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권능을 깊은 감동으로 깨닫고 노래하는 시가 <시편 8편>의 시인 것입니다.

한편 다윗은 그가 인생의 말년, 아마도 압살롬의 반란이나, 아도니야의 반역으로 인하여 깊은 낙심과 환난 가운데 지은 시가 <시편 69편>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은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나의 목이 마르며 나의 하나님을 바라서 나의 눈이 쇠하였나이다” (시. 69:1,3)라고 하나님을 향한 울부짖음으로 그는 이 시편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이 시편의 노래를 부르는 가운데 그는 놀랍게도 충만한 기쁨과 감사로 이 시를 마무리해 나감을 보게 됩니다.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시. 69:30-31)고 말입니다. 이런 충만한 감사가 어떻게 가능하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오직 자신의 선한 목자되신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믿음 가운데, 그분을 향한 진실한 신뢰와 사랑을 통하여 자신의 이와 같은 지극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에서 조차도 하나님은 자신을 지키고 계심을 성령의 충만을 통해 깨닫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물가운데서, 뜨거운 불가운데서, 원수의 공격과 수 없는 환난 가운데서 어떻게 선한 목자되신 하나님께서 그의 어린 양된 자신을 보호하시고 승리케 하신지를 깨닫게 될 때 그는 그 선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치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라고.

오늘 본문인 <시편 100편 4절>말씀은 <감사의 시>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에 의하면, 구약의 유대인들이 예배 (=제사)드릴 때 사용했던 대표적인 시편의 하나가 ‘시편 100편’이었는데,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릴 예물을 들고 성전 문을 통과하여 뜰을 지날 때에 불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바로 하나님께 드릴 예물을 들고 성전 문을 통과하면서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v.4)라고 노래한다는 것입니다. 왜 감사함으로 찬양할까요? 그 이유는 “그가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v.3)라고 바로 앞절에서 밝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런 찬양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지 못한 채 그냥 입술로 부르는 것이라면 이것은 의미 없는 종교적인 염불과 별차이가 없을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점점 더 깨닫아 나감으로 이와 같이 중심의 찬양을 드린다면, 이 찬양은 참된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릴 것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음”으로 넘쳐남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이방의 사도’가 되어 그리스도의 충성된 제자로써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그야말로 자기의 목숨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복음을 증거하다가 말년에 해당하는 제 3차 전도여행 당시에 쓴 편지의 하나가 <고린도 후서>입니다. 사도가 고린도 성도들에게 보내는 이 두번째 편지는 그 당시 대형교회였지만 많은 무질서한 은사사용과 영적 미성숙함을 보였던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영적 가르침을 주는 편지였는데, 그는 이 편지를 마무리해 나가면서, 그의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나누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들의 영적 성숙을 위해서 입니다. 그 간증에 해당하는 구절이 <고후. 11:16~ 12:13>까지의 말씀입니다. 이 가운데서도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고후. 12:9)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에게 주신 말씀을 그가 성도들에게 소개하면서 어떻게 주의 크신 은혜가 자신을 지켜 주셨는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어떻게 사도 바울이 그토록 충성된 주님의 제자로 끝까지 살아갈 수 있었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열쇠와 같은 말씀이 바로 이 주님의 말씀 때문이었다고 그는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실 <고후. 12장>을 읽어보면 사도 바울이 세번씩 주께 간절히 구했음을 밝히고 있는데, 그 이유는 사도 바울 자신이 “내 육체의 가시” (a thorn in my flesh)라고 부르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이 가시가 무엇인지는 알수 없으나, 성경학자들은 사도를 손에 박힌 가시 마냥 평소에 늘 힘들게 하고 괴롭혔던 그의 ‘간질병’ ‘약한 안질’ 혹은 ‘외모의 핸디캡’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하고 추측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주께 세번씩이나 간절히 그것이 떠나기를 구했지만, 주님은 뜻밖에도 앞서 살펴본 것처럼 “내 은혜가 네가 족하도다”고 응답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주님은 주께서 세우신 이방의 사도요, 주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그토록 충성된 제자의 간구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사도는 이 가시로 인해 주께서 주신 많은 영적 은사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높아지는 교만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요, 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는 은혜 곧 사도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지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았다는 것입니다. 그의 가시를 거두어 가시지 않는 주님의 풍성하고도 매우 역설적인 은혜인 것입니다. 바로 고난과 연단을 통해 더욱 풍성해지는 주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은혜가 궁극적으로 이루어 주시는 놀라운 역설인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을 때 사도 바울 뿐 아니라, 우리 모든 주님의 제자들은 내 안에 박혀 있는 이 가시로 인하여 불만스러워 하거나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놀라우신 경륜과 풍성하신 은혜를 감사하고 소리 높여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어떤 감사의 제목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왔습니까?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전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v.4) 바라기는 선한 목자되신 하나님 아버지를 더욱 신뢰하고 사랑하는 그분의 양이 되어, 말씀과 기도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더욱 자라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그리하여 이제 내 인생에 박힌 그 아픈 가시까지도 주의 풍성한 은혜가 되게 하시는 그 선하신 하나님의 경륜과 사랑을 경험해 나감으로 날마다 풍성한 감사의 제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복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