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7, 2022

“서로 돌아보아” (Let Us Consider One Another)

Preacher:
Series:
Passage: 히브리서 (Hebrews) 10:24-25
Service Type:

“서로 돌아보아”

(Let Us Consider One Another)

8-7-22

본문말씀: 히브리서 (Hebrews) 10:24-25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And let us consider how we may spur one another on toward love and good deeds.)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Let us not give up meeting together, as some are in the habit of doing, but let us encourage one another – and all the more as you see the Day approaching.)

[설교 요약]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자’는 히브리서 기자의 초대교회 성도를 향한 도전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도전과 격려의 말씀임을 저는 믿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먼저 <히. 10장>을 시작하면서, 몇가지 영적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그의 몸을 드림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셔서 우리가 거룩함을 입게 되었음 (v.10)
  • 이로 말미암아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법을 우리 마음 가운데 새겨 주심 (v. 15-16)
  • 그럼으로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담대히 들어갈 용기를 얻게 되었음 (19)
  • 따라서 우리의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양심의 모든 악을 제하고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는 것 (21-22)

이것이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성도가 ‘서로를 돌아보며, 사랑과 선행을 더욱 행하고 격려해야 할 동기요, 이유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믿음 안에서 성도의 아름다운 우정과 교제의 모습을 저는 ‘다윗과 요나단’ 그리고 ‘예루살렘교인들’에게서 볼수 있습니다.

  • 먼저, 구약에 나오는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서로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충성을 확인한 것이 그 우정의 핵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삼상. 17-23장)
  • 다음으로 신약의 ‘예루살렘교회’ 공동체가 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강림의 역사로서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삼천명이 구원을 받음으로 시작된 첫 신약교회가 ‘예루살렘교회’입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42~47)고 누가는 이 공동체를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고, 기도로 하나되고 함께 모여 서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이런 교회 가운데 하나님은 영적 부흥을 허락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의 사도로 불린 ‘사도 요한’은 ‘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만 하는지?’를 이렇게 잘 설명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아나니) ~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7-8)고. 그리고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요일. 4:12)고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강권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서로를 돌아보고 사랑과 선행으로 서로를 격려하는 아름다운 아포슬 공동체 되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오늘 우리는 모처럼 교회 가족 모두 자연에 나와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며 성도의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가슴을 열고 서로를 더 알아 나가고 받아 드리기 원하지만, 서로 바쁘다는 이유로 좀 더 자주 가까이서 만남의 기회를 가지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번에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2박 3일의 일정을 마무리하면서, 무엇보다 우리 주께서 우리 가운데 이 귀한 사귐의 시간 허락하심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 히브리서 기자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격려한 오늘 말씀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도전과 격려의 말씀임을 믿습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24-25)라고. 이런 아름다운 모습이 우리 아포슬 공동체를 통하여 더욱 풍성히 열매 맺기를 기도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 10장>을 시작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그의 몸을 드림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심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입게 되었음을 먼저 밝히고 있습니다 (v.10). 이로 말미암아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법이 우리 마음 가운데 새겨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담대히 들어갈 용기를 얻게 된 것입니다 (19). 따라서 우리의 이 믿음직한 대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양심의 모든 악을 제하고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21-22). 이것이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성도가 서로를 돌아보며, 사랑과 선행을 더욱 행하고 격려해야 할 동기요, 이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성경에 나와있는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돌아보며 아름다운 하나됨을 보여준 사례는 어떤 것이 있는지를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그것을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요? <사무엘상 17장>에서 보면 어린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상대로 하나님을 믿는 순전한 믿음과 평상시에 자기의 양들을 지키고자 사나운 사자와 곰을 맞서 용맹하게 싸워 이겼던 전투력이 하나가 되어 물맷돌 하나로 그를 쓰러뜨렸던 것이 그 시작임을 알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나단 또한 블레셋 적군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하 몇명과 적진 깊숙히 들어가서 적진을 쑥대밭으로 만들만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야말로 용맹한 용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으로 그의 아버지 사울왕이 다윗을 질투함으로 그를 죽이고자 혈안이 되어 온 이스라엘을 쥐 잡듯 했을 때에도, 요나단은 결코 다윗과의 생명으로 건 우정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이 우정의 동기는 오직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한 서로의 모습속에서 그들은 참된 신앙의 친구로서의 확신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시대와 상황은 다르지만, 성경에서 또 한가지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이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성경에 기록된대로 첫번째 초대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행. 2장>에서 여러분이 기억하시듯, 오순절날 주님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합심하여 기도했을 때에 불의 혀같은 성령강림 사건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성령충만으로 인하여 그들이 각국 방언으로 말함을 보고 세계각국에서 오순절 명절을 지키려고 모였던 경건한 유대인들이 놀라며 그 이유를 궁금해합니다. 이 때 베드로사도가 일어서서 이 사건은 바로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며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라)” (욜. 2:28)고 예언하며 말세에 임할 성령의 충만한 강림의 역사임을 영적으로 설명해주며,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음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그날에 증거의 말씀을 듣고 찔림을 받은 자들이 회개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은 자가 3천명이나 되었습니다. 이것이 신약교회의 효시가 된 ‘예루살렘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예루살렘교회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이어지는 말씀에서 이렇게 감동적으로 기록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기억합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42, 46,47)라고. 제가 더 많은 말을 하지 않더라도 이 예루살렘 믿음의 공동체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인하여 교제가 넘치고, 기도가 충만하고, 성전에 모이기를 즐거워하고, 아름다운 하나됨을 이루었는지를 말씀은 충분히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 당시 예루살렘에 살았던 모든 유대백성들조차도 이 믿음의 공동체를 인정하고 칭찬이 자자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이기에 주께서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을 더하게 하셨음은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 믿음의 합당한 결과요, 열매일 것입니다.

저는 우리 아포슬 공동체가 이와 같이 ‘다윗과 요나단’같은 아름다운 우정이, 그리고 ‘예루살렘교회’같은 성령의 충만하심으로 인한 마음이 하나되고 순결한 믿음의 공동체가 되기를 꿈꿉니다. 이것이 바라기는 단지 저만의 바램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오늘 여기 예배 드리는 성도 여러분 모두의 꿈과 소망이 되기를 원합니다.

사랑의 사도로 불린 ‘사도 요한’은 그의 사랑하는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7-8)고. 제가 몇 주전에 나누었듯이, 사도는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고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 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일. 4:9-11)

저는 여기에서 그의 말씀을 끊을수가 없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 4:12-1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여러분과 저를 향해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자” 그리하여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여기서 ‘그날’은 무슨 날입니까? 그렇습니다. 주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날입니다. 만약 우리 모두가 주님이 오시는 날, 서로를 뜨겁게 사랑함으로 서로 돌아보고 하나되어 있다면 우리는 결코 두려움과 떨림으로 주 앞에 서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그 잔에 기름을 가득 준비하고 신랑을 기다리는 지혜로운 다섯 처녀처럼, 우리는 오히려 이 ‘온전히 이룬 사랑 가운데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될 것’ (요일. 4:17)입니다. 이런 주의 사랑으로 담대하고 뜨겁게 하나로 맺어져 가는 아포슬 공동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