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h 20, 2022

“성령을 근심케 말라” (Do Not Grieve The Holy Spirit)

Preacher:
Passage: 에베소서 (Ephesians) 4:30
Service Type:

“성령을 근심케 말라”

(Do Not Grieve The Holy Spirit)

3-20-22

본문말씀: 에베소서 4:30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And do not grieve the Holy Spirit of God, with whom you were sealed for the day of redemption)

[설교 요약]

            이제 4장을 마무리하면서,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라’ (v.30a)는 오늘 본문의 말씀은 마치 갑자기 돌출된 발언처럼 느껴집니다. 지난 2주동안 우리가 살펴 살펴본 대로 사도는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22~24절> 성도들에게 촉구하고 나서, <29절>까지 구체적으로 옛사람을 벗는 것이 무엇이고, 옛사람을 입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론이 ‘성령을 근심케 말라’로 요약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사도는 왜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라’는 표현을 쓰는 것일까요?

  • ‘성령은 인격적인 존재’: 성령님이 ‘근심’하는 것은 우리 인간과 같이 <지.정.의>를 가진 존재 일 뿐 아니라, 성삼위 하나님 (The Trinity God)이기 때문입니다.
  • ‘성도와의 사랑의 관계’: 성령이 우리와 무관한 관계라면 결코 근심 (grieve)하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사도는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 (롬. 8:26)고 밝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성령을 근심시켜서는 안되는 이유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v.30b)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지막 주님의 심판 날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릴 때까지 성령께서 우리의 구원을 인치셔서 (seal) 보증 (guarantee)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성령을 근심시키지 않을 수 있을까요?” (How do we avoid grieving the Holy Spirit?) 그것은

첫째, ‘성령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We may avoid it through being conscious the Spirit): 그 어떤 것보다도 성령을 근심시키지 않는 것은 성령을 인식함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거룩하신 성령님을 의식조차 못하거나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만큼 그분을 근심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둘째, ‘성령을 좇는 것’입니다 (We may avoid it through walking in the Spirit): 사도가 갈라디아 성도에게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6)고 도전합니다. 성령의 뜻을 좇아 갈 때 우리는 그분을 근심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셋째,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We may avoid it through meditating & obeying the law of Lord): 어떻게 우리는 성령의 뜻을 헤아려 나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언제나 ‘말씀’을 통해서 입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성령 충만한 역사는 언제나 복음의 말씀이 강력하게 선포될 때 임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행.10:44). 이 말씀에 뿌리를 내려 나갈 때, 성령님은 우리의 ‘신앙양심’과 ‘기도’ ‘성도의 교제’ 그리고 ‘예배’를 통해 능력으로 임하시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성령을 근심시키는 어리석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그분을 더욱 신뢰하고 사랑함으로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거두며 죄와 싸워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범죄심리학자들의 공통된 주장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는 대다수의 범죄자들은 자신들의 범죄의 심각성에 관계없이 ‘죄의식’이 정상인들에 비해 매우 약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지적으로 자신이 범죄행위를 저질렀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은 하지만, 그것 자체도 ‘자신이 안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으니까!’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서’ ‘재수가 없어서…’ 등등의 핑계를 되면서 자신의 죄 (=잘못)을 합리화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역설적으로 말해서, 우리 인간은 만약 내 자신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스스로의 삶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만 있다면 매우 본질적인 변화와 성숙을 경험하게 될 것임을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개기를 통해서든지 나 자신의 실상에 대해 눈뜨게 될 때 스스로를 속이고 합리화하며 진실하지 못한 삶을 살았던 영적 늪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점은 우리 크리스챤에게도 조금도 예외가 아닌 것입니다.

비록 내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지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속의 죄성을 밝히 깨닫게 되는 은혜를 거부함으로 여전히 속사람이 강건해 나가지 못할 때 여러분과 저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근심시키는 것입니다. 저는 사도가 우리 성도를 향해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말라” (v.30a)고 도전한 것도 그러한 이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자신이 어떠한 존재임을 이해합니까? 여러분 안에 누가 거하시는 지 이해합니까? 만약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 거하심을 인격적으로 깨닫아 나간다면 성령을 근심케 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거듭나게 된 성도가 행할 본분이 결코 아닙니다!!” 라고 사도는 사도는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4장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오늘 본문말씀은 마치 갑자기 돌출된 발언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지난 2주를 통해 우리가 살펴 본대로 사도는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22~24절>에서 에베소 성도들에게 촉구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함께 이해해 나갔던 것입니다. 4장의 흐름에서 볼 때, 사도는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선언하고 나서, <25~29절> 곧 오늘 본문 바로 앞절까지 구체적으로 옛사람을 벗는 것이 무엇이고, 옛사람을 입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고),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않음으로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가난한 자에게 구제를 행하고, 더러운 말을 버리고 선한 말로 서로 은혜를 끼치게 하라” (v.25~29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을 근심시키지 않는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사도가 ‘성령을 근심치 말라’고 선언하는 것은 이 말이 앞의 본문의 결론임과 동시에 한편에서는 앞으로 <에베소서 6장>까지 이어지는 남은 모든 말씀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이후로 이어지는 모든 말씀에서 성도가 진정으로 기억해야 할 것은 ‘성령을 근심케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사도는 왜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라’는 표현을 쓰는 것일까요? 그것은 첫째로, ‘성령님이 인격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격적이라는 말은 우리 인간과 같이 <지.정.의>를 가진 존재라는 뜻입니다. 정확히 말해서 성령은 인격적 존재일 뿐 아니라, ‘성삼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데로 성삼위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성삼위 하나님의 제3위격에 해당합니다. 일부 크리스챤들이 생각하는데로, 성령은 단순히 ‘힘’ 혹은 ‘에너지’와 같은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만약 성령이 그런 비인격적 존재라면 사도는 ‘성령을 근심케 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인격적 존재이시고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기에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성령과 성도와의 관계’ 때문입니다. 무슨 관계일까요? 그것은 ‘사랑의 관계’입니다. 성경에 보면 성령님의 다양한 사역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의 사역과 성도를 거듭나게 하시는 사역, 그리고 의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셔서 우리 안에 영원토록 거하시면서 우리를 도우시며 보혜사의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성령님이 우리 성도를 도우시는 특별한 한가지 사역에 대해서 매우 감동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심지어 우리 자신도 어떻게 기도할지를 알지 못하고 심히 연약함과 영적 방황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에도, 성령님은 우리를 위해 깊은 탄식 가운데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위해 기도하신다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6)고. 이것은 한마디로 성령의 어떠한 모습을 밝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를 향한 성령님의 사랑의 마음일 것입니다. 여기서 ‘탄식하다’ (with groan)는 표현은 아무 대상에나 쓰는 표현이 아닙니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관계나 알더라도 별로 가깝지 않은 관계에 쓰는 표현이 결코 아닙니다. 이 탄식함은 가족이나 아주 가까운 친구의 관계에 있어서 어떤 안타까운 일로 인해 그 상대방이 건강이나 그가 처한 상황이 심각한 어려움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로 인해 우리가 그를 아끼고 사랑함으로 깊은 절망감 가운데 함께 심한 고통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이런 탄식은 결코 사랑의 관계가 아니면 생길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성령께서 ‘우리 각자를 깊이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하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간절히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니, 이제 된 것입니까? 나는 문제를 만들고, 성령이 기도로 해결해 주시면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사도는 로마서에서 “그럴 수 없느니라” (롬. 6:1,15)고 거듭 거듭 선언합니다. 이것이 오늘 사도가 우리 성도를 향해 강하게 도전하는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사도가 ‘성령을 근심케 말라’는 표현을 통해 ‘성령은 인격적인 존재이실 뿐 아니라 우리 성도와 깊은 사랑의 관계에 있음’을 확인했는데, 사도는 한걸음 더 깊이 우리가 그분을 근심시켜서는 안되는 이유를 오늘 이어지는 말씀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왜냐하면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with whom you were sealed for the day of redemption) (v.30b)고 사도는 밝히고 있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사도가 에베소서 말씀을 시작하면서 우리 성도가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의 기쁘신 뜻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아들과 딸로 확증되었는지를 설명하면서, 이것이 성령의 사역임을 놀랍게 선언한 바 있습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엡. 1:13)라고. 그렇다면, 무엇이 성령의 인치심 (being sealed with the Holy Spirit)입니까? 우리는 지난번 1장 말씀에서 ‘성령의 인치심’이란 성령께서 도장을 찍듯이, 그리고 편지의 풀을 붙여서 단단히 봉투를 닫듯이 우리 성도의 구원을 그렇게 확실하게 책임져 주신다고 했습니다. 바로 성령께서 ‘보증’ (guarantee)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한번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결코 그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바로 약속의 성령께서 우리의 구원을 도장 찍어 주시고, 두루마리에 싸서 마지막 구원의 날까지 우리를 지켜 주시기 때문이라고 사도는 성령의 사역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크리스챤이 성령을 근심시켜서는 안되는 이유라고 사도는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문제제기를 했듯이, 우리 거듭난 크리스챤들 조차도 스스로 착각하며 자신의 객관적인 실상을 발견하지 못하고 매우 염려스럽고 위태로운 인생을 살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상태가 정확히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이라고 사도는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한번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사도는 이것을 <25-29절>에 나열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성령을 근심시키고자 원한다면, ‘해가 지도록 분을 품어 보십시요!’ (v.26-27). 누가 당신에게 섭섭하게 했거나 잘못을 했는데, 그것을 용서하지 않고 하루가 지나도록 마음에 담아 둬 보세요. 어떻게 되는지 여러분은 이제 분명하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마귀가 어떻게 여러분을 장악하고 죄악된 마음을 품게 하고, 미움과 원망과 쓴 뿌리를 그 마음에 심어 놓는지를 확인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보세요! 하루가 지나도록 그 분함을 풀지 말고 있으면 됩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마귀에게 틈을 주고, 죄가 우리의 심령을 장악하는 상태요, 이것이 성령을 근심케하는 성도의 안타까운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성령을 근심시키지 않을 수 있을까요?” (How do we avoid grieving the Holy Spirit?) 이 질문은 ‘어떻게 하면 우리는 성령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과도 동일한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 ‘성령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We may avoid it through being conscious the Spirit): 그 어떤 것보다도 성령을 근심시키지 않는 첫 시작은 성령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여기서 제가 성도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보기 원하는 것은 ‘솔직히 우리는 성령님과 어떤 관계인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동안 성령님은 우리 크리스챤의 삶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신다고 누누히 강조 드렸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솔직히 우리 각자가 성령에 대한 생각과 관계는 어떠냐는 것입니다. 좀 쉽게 말해서 여러분은 살아가면서 성령을 의식하고 있습니까?

아마 여러분 가운데는 성령을 실제적으로 나와는 무관한 존재처럼 여긴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죄악된 행위를 했을 때 이런 나로 인해 내속에 계신 성령님께서 얼마나 아파하시고 깊이 탄식하실 지를 전혀 고민하지도 의식하지도 못한 성도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사도가 “성령을 근심케 말라”고 도전하는 그 근본적 이유는 ‘성도 여러분, 당신은 지금 당신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인식하고 있습니까? 그분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함으로 그분을 실망시키거나 근심시키지 않고자 힘쓰고 있습니까?’라고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 안에 살아 계시고 우리를 위해 탄식함으로 간구하는 성령님을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마치 투명인간 취급하듯이 성령님을 모독하고 그분을 근심케 하는 태도가 또 있을까요?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성도가 성령님을 근심케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분과 더 깊은 사랑의 관계로 나아가는 첫걸음은 성령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내주하심을 망각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늘 기억하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둘째, ‘성령을 좇는 것’입니다 (We may avoid it through walking in the Spirit): 사도가 갈라디아 성도에게 분명히 밝혔듯이 성령과 우리 육신의 소욕은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서로 원수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 5:17)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6)고 사도는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중요한 영적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성령을 좇아 행할 때, 우리는 그분을 근심케 하지 않고,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다고 말입니다 (갈. 5:22,23). 성령의 선하신 뜻을 좇아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여 좇아갈 수 있을까요?’

셋째,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We may avoid it through meditating & obeying the law of Lord):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오늘날 성령을 믿고 성령의 충만으로 살고자 하는 크리스챤들 가운데는 상당히 우려스러운 모습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분들 중에는 어떤 ‘성령집회’라는 모임에 참석해서 누군가에게 성령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소위 ‘안수 받는다’는 식으로 성령을 받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령 받는 것을 마음이 뜨거워지고, 뭔가 감정적인 강력한 변화를 경험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현상이 성령체험의 한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서 시작됨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 베드로가 경건한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행한 것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행. 10:44)라고.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어떤 용하다는 사람 찾아가서 받고자 할 때는 잘못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많음을 우리는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반면에 성경을 더 깊이 묵상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뜻에 순종하여 살아가고자 할 때, 성령님은 비둘기 같이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성도들에게 더 충만하게 임하실 것을 저는 믿습니다. 이것이 시편 1편 기자가 ‘왜 여호와의 말씀을 아침 저녁으로 묵상하고, 그 말씀을 즐거워하는 자가 축복된 자인지?’ (시. 1:2)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사모하는 영혼에 하나님의 영,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셔서 그를 지키시고 육체와 세상과 사단 마귀와 싸워 승리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언제나 생명과 진리되신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고,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렇게 우리가 말씀에 점점 더 깊이 뿌리를 내리면 내릴수록, 성령님은 우리의 신앙 양심으로 말씀하시고, 기도 가운데 우리를 강력하게 인도하시고, 영적으로 깨어 있는 성숙된 믿음의 공동체를 통하여 놀랍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신뢰하고 추구하는 만큼 성령님은 자신의 선하신 뜻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감옥에 쇠사슬에 갇힌 죄수가 되었기에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며,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라고 에베소 성도들과 우리 각자를 향해 도전하고 있습니다. 이 합당한 부르심의 삶은 성령으로 하나 됨이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삶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은 언제나 ‘성령님을 기쁘시게 하는지? 아니면 성령님을 근심케 하는지?’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성령님만이 우리를 하나로 묶으시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성품으로 자라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성령을 근심시키는 어리석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그분을 더욱 신뢰하고 사랑함으로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거두며 죄와 싸워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