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ember 2, 201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All you who are weary and burdened)

Preacher:
Series:
Passage: 마태복음 (Matthew) 11:28~30
Service Type: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All you who are weary and burdened)

9-2-18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11:28~30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Come to me, all you who are weary and burdened, and I will give you rest)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Take my yoke upon you and learn from me, for I am gentle and humble in heart, and you will find rest for your souls)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For my yoke is easy and my burden is light)

<서 론>

저는 오늘 성도 여러분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 라는 제목의 말씀으로 은혜의 시간 가지길 원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데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초청의 말씀 입니다. 오늘 함께 예배에 참석한 우리 각자는 처해 있는 상황은 서로 다른 삶을 산다 할찌라도, 제가 한가지 확신하는 것은 우리 각자는 모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간다는 것 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무거운 멍에를 벗고 마음의 쉼을 얻고, 진정한 평화를 누리길 원한다는 사실 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 가운데 지쳐있는 우리 인생들을 향하여 사랑과 소망으로 초청하시는 우리 주님의 평화와 안식의 말씀은 더욱 귀중한 것 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은혜로운 초청을 영접하심으로 주님과 언제나 동행하시는 안식의 삶을 사시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원 합니다.

<본 론>

언제나 그러하듯 성경본문의 말씀을 옳바르게 이해하는 첫걸음은 그 본문만을 따로 떼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본문에서 그 본문이 어떤 관계를 가지는 가를 살펴보는 것 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는 주님의 부드럽고 사랑에 가득찬 초청을 바로 이해하는 것도 또한 <마. 11장> 전체를 살펴볼때 가능하게 되는 것 입니다. <마. 11장> 은 주님의 제자들이 전도여행을 떠나는 장면 (v.1)에서 시작하여, 침례요한의 질문과 주님의 답변 그리고 침례요한에 대한 주님의 평가가 이어 집니다 (v.2~19). 그리고 나서, 주님은 회개치 않는 마을에 대한 심판의 메세지를 전합니다 (v.20~24). 주님의 많은 권능의 은혜를 경험하고도 회개하지 않는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에 대한 심판의 메세지인 것 입니다. 그리고나서, 주님은 <v.25~30> 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v.28) 는 초청을 하시는 것 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포함된 마지막 단락 (v.25~30) 에서 주님은 바로 앞 문장에서 회개치 않는 고라신과 베세다와 가버나움에 대한 무거운 심판의 메세지에서 돌연 ‘감사의 기도’를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고 있음을 볼수 있습니다 (v.25). 특별히 오늘 본문말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선, 그 앞선 문장의 <v.25~27>를 제대로 살펴보아야 하는 것 입니다. 먼저, 주님은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 하나이다” (v.25). 주님은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숨기시고,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에게는 나타내심에 의해 감사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메튜헨리는 <이것이란 ‘평화에 관한 일’ (눅. 19:42)> 이라고 주석 하였습니다.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평화에 관한 일’을 세상에서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와 같은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나타내신다는 것 입니다. 그러기에 감사한다는 것 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어떤 우리 인간의 행위 이전에 전적인 하나님 아버지의 뜻임을 주님은 밝히셨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게 될때, 주님의 다음의 말씀을 또한 이해하게 되는 것 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v.27) 는 말씀을. <v. 25~27>말씀은 오늘 본문말씀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평화에 관한 일’ (the things which belong unto this peace) 을 세상의 똑똑하고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부족하고 지혜롭지 못한자들에게는 나타내신다는 것 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 입니다. 그리고 이 ‘평화’는 바로 오늘 본문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 가지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핵심단어가 될것 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평화를 누리지 못함으로 언제나 피곤과 무거운 짐 가운데서 자유롭지 못하는 것 입니다. 그리고, 이 평화를 깨닫고 누릴수 있는 자는 ‘오직 아들과 아들의 소원데로 계시를 받음으로 아버지를 아는 자’라고 주님은 그 영적 진실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구체적으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의 무게 아래 고통받고 있는 자들을 향한 주님의 초청을 통하여, 왜 우리는 그리스도께 나아가야만 하는지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왜 우리는 주님의 발 앞으로 나가야 하는 것일까요?” (Why do we have to come Jesus?);

첫째, ‘우리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이기 때문 (Because we are weary and burdened): ‘오스왈드 챔버스’는 오늘 본문말씀 <마. 11:28> 을 묵상 하면서 다음과 같이 고백 했습니다. 모든 인생은 죄로 인하여 무겁다. 다들 힘들어 한다. 자신의 죄로 인하여 인생이 힘들고 또한 사회에 깔려 있는 죄로 인하여 무겁다. 오류와 분쟁과 미움과 거짓이 사회에 가득하다. 또한 죄로 인한 저주가 언제나 인류 역사와 인생 가운데 있으니 아픔과 피곤함은 말로 표현할 없다. ~ 지친 영혼들이 교회에 나간다. 그러나 오히려 상처를 받고 온다. 심령은 위로와 쉼이 아닌 멍에를 메고 돌아온다. ~ 시대 가운데 복음이 없는 교회들마다 사람들에게 참된 쉼이 아닌 종교적인 멍에를 씌우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와 율법의 멍에에서 벗어날 있도록 복음을 통하여 참된 자유와 평안을 제시하신다. 평안은 십자가 안에 있다. 성령의 능력 가운데 있다. 아무리 무겁고 힘든 멍에를 지더라도 성령의 능력으로 인하여 마음이 평안하여진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자신의 몸을 바치셨다.” 라고.

그렇다면, 누가 과연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들’ 일까요? 그것은 근본적으로 죄의 힘 가운데 고통하는 자들 인것 입니다. 제 아무리 많은 지식을 쌓고 세상권력과 도덕적이고 철학적으로 뛰어난 삶을 살아가는 자라 하더라도 죄의 힘에서 자유할수 없다는 것 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율법을 소유했다고 하더라도 말 입니다. 이점을 우리 주님은 이렇게 잘 밝혀 주셨습니다. “ ~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요. 8:34,36) 고. 누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 입니까? 그들은 죄의 힘 아래 고통하는 자들 입니다. 그들은 죄의 막강한 힘에 의해 죄를 범할수 밖에 없는 자들 입니다. 이들은 아직까지 아들에 의해 죄로 부터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 입니다. 이들은 불신자들이요, 아직까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지 않음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영생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 입니다. 주님은 이렇듯 죄 아래 고통받고 심음하는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인생들을 향해 초청의 메세지를 선언 하십니다. “수고하고무서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v.28b) 라고.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은 모두 오직 아들만이 주실수 있는 ‘죄로 부터 자유’케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까? 그로말미암아, 그분이 주시는 쉼을 지금 맛보고 있습니까?

둘째, ‘주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기 때문 (Because Jesus is gentle and humble in heart): 만약 성도 여러분이 “누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인가?” 에 대한 오늘 저의 성경해석을 잘 귀 담아 듣으셨다면, 그는 바로 불신자 임을 이해하실 것 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중에 곧바로 생기는 한가지 질문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런 질문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 입니다. 그것은 무엇 입니까?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에게서 해방되고 자유케 되었는데, 왜 나는 여전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가?’ ‘왜 주께서 약속한 진정한 자유와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가?’ 라고 느끼지는 않습니까? 다시말해, 주님을 영접함으로 그의 제자가 되고 구원의 확신 가운데 살아가는데 ‘왜 여전히 주님께서 약속하신 참된 평화와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가?’ 하는 것 입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v.29>에서 찾을수 있을 것 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비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v.29) 라고 주님은 주께로 나아온 제자들에게 참된 스승으로서 지도하고 있다는 것 입니다.

이 순서를 이해하시겠습니까? 먼저, 주께 나아와야 합니다. 이것은 무엇보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 입니다. 바로 그분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그리고 영원한 구세주로 영접함을 통해서 말 입니다. 이것이 영생의 구원을 누리는 성도가 되는 조건이요,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 조건일 것 입니다. 그러나, 제가 그동안 우리 성도들에게 거듭하여 강조했드시 ‘거듭남으로 영적 출생을 했다는 것이 끝이 아니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해야 하는 것 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라나야 한다’는 것 입니다. 어린 아기가 이 땅에 태어났다고 그것이 다자란 것이 아니듯이 영적으로 태어난 경우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영적으로 태어 났다면 이제 한걸음 한걸음 자라나가야 하는 영적 성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말 입니다. 왜 수많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거듭난 성도들에게 여전히 평화와 쉼이 없는 것일까요? 왜 여전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 눌려 살아가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우리 주님께 배우지 않고 있기 때문’ 입니다. 주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지 못하기 때문 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빌. 2:5) 라고 사도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우라고 도전 합니다. 그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십자가에서 순종하신 마음을 말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주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움으로 점점 더 풍성한 쉼을 누려가고 있습니까?

셋째, ‘주님의 멍에는 쉽고 그 짐은 가볍’기 때문 (Because His yoke is easy and His burden is light): 맞습니다. 내가 비록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의 제자가 되었지만, 날마다 주께서 격려하시고 명령하신 것처럼 ‘ ~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눅. 9:23) 주님을 따르지 못하면 주님의 제자로서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님의 제자의 신분이 되었다는 말과 제자의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산다는 말은 전혀 다른 말 입니다. 이것이 제가 앞에서 언급한 ‘영적 출생’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 하나님의 자녀가 됨/ 성도의 신분) 을 했다는 사실과 ‘영적 성장’ (=영적 성숙/ 성도의 영적 상태) 을 한다는 것은 다른 말이라는 것 입니다. 이런 영적 순서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 입니다. 내가 영적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마치 내가 갑자기 완벽한 영적 상태가 되었다든가, 아니면 나의 인격적 (지.정.의) 결단과 순종없이 자동적으로 영적 성숙이 된다고 은연중에 착각하는 크리스챤들이 얼마나 많을찌 저는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저의 청년시절 되돌아 볼때, 제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난 이후 제가 마음속에 품었던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음을 저는 고백 입니다. 이것은 “왜 나는 예수님 믿고 거듭났는데, 내 삶은 아직도 무거운 짐 아래에서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는가?” 하는 것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솔직히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주님이 오늘 약속하신 평화와 쉼을 누리십니까? 만약 여러분이 정직히 그렇치 못하다고 인정한다면, 그 원인을 우리는 직시할수 있어야 합니다. 그 원인은 ‘주님께 배우지 못한 것’ 입니다. 이제 내가 그분께 배우고자 결심했다면, 우리가 첫번째 주님에 대해 이해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님의 멍에는 쉽고 그 짐은 가볍다” 는 사실 입니다.

오늘 본문 <v.29,30>의 ‘멍에’ (yoke) 라는 단어는 ‘두마리의 소나 가축의 머리에 함께 씌우는 농사기구’ 입니다. 주로 땅을 갈거나 뒤엎을때 가축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서 두마리의 머리에 그것을 씌워서 그들이 발을 맞추어 앞으로 나아 가도록 만든 도구가 ‘멍에’ 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이런 두마리 가축의 머리에 씌웠던 멍에라는 그 당시 농사도구를 사용하셔서, 우리 제자들이 어떻게 주께서 주시는 평화와 쉼을 얻을수 있는지를 영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 입니다. “ ~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v.29) 는 것 입니다. 스펄전 목사는 “나의 멍에를 메(라)” 는 의미를 “만일 너희가 나에 의해 구원 받기 원한다면, 나를 너의 주인으로 모시고 너희 자신을 나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만일 그렇치 않으면 너희 영혼이 쉼을 얻을수 없을 것이다” 라고 해석 했습니다. 사실 여기에 역설이 있습니다. 멍에란 고된 어떤 일을 나타내기 때문 입니다. 사실, 우리 크리스도인들이 ‘자기 십자가’ 만큼 배우기 어려운 것이 ‘주님의 멍에를 메는 것’ 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 합니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v.30) 고. 물론 처음에는 그 멍에는 어려울 것 입니다. 이것은 ‘댓가지불’ (paying the cost) 의 과정이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멍에는 쉽고 그 짐은 가볍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께서 직접 그 멍에를 이끄시기 때문 입니다. 그리고 주의 영, 성령을 통해 우리와 함께 그 멍에를 이끄시기 때문 입니다. 주님께서 명절 끝날 서서 외치신 말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요. 7:37,38) 는 성령충만의 약속이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넘쳐나기를 기대 합니다. 성도 여러분의 삶 가운데 성령의 충만한 은혜 가운데 주님의 쉽고 가벼운 멍에를 메고 그분을 따르기를 소원 합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두번째 편지에서 이런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가벼운 고난은 그 무엇과도 비교 될수 없는 크고 엄청난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것 입니다” (고후. 4:17) 라고. 사도바울은 자신을 포함한 초대교회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을 설명하면서 ‘잠시 받는 가벼운 고난’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당한 핍박과 고난이 결코 별것 아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두번째 편지를 시작하면서 “ ~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 (고후. 1:8) 고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 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혹독한 시련이었습니다.그러나 동시에 놀랍게도 바울은 그 고난을 ‘잠시 받는 가벼운 고난’이라고 선언하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고난이 크면 큰 만큼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그의 능력을 통하여 도리어 소망과 감사가 넘치기 때문이라고 사도바울은 고백하고 있는 것 입니다 (고후. 1:3~11). 지금 이순간 우리 주님은 우리 모두를 향하여 사랑의 초청을 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v.28) 고. 이 초청은 평화에 관한 초청 입니다. 세상의 지혜롭고 똑똑한 자가 깨닫지 못하고, 어린 아이와 같은 연약하고 지혜없는 자가 도리어 깨닫는 ‘참된 평화’의 초청 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신 뜻 가운데 이루어지는 평화의 초청 입니다. 바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실수 있는 평화 입니다. 그의 피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평화 입니다. 갈라진 담을 허물고,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고 회복케 하는 평화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 그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는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원 합니다. 그의 이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두려워 하지 말고, 그분의 멍에를 두려워 하지 않고 순종하여 메고 나아감으로서 가볍고 쉬운 그의 은혜를 누리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원 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참된 평화와 안식을 날마다 더욱 풍성히 누리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