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하는 자 바나바” (Barnabas The Encourager)
“위로하는 자 바나바”
(Barnabas The Encourager)
2-18-24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9:26,27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됨을 믿지 아니하니 (When he came to Jerusalem, he tried to join the disciples, but they were all afraid of him, not believing that he really was a disciple.)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But Barnabas took him and brought him to the apostles. He told them how Saul on his journey had seen the Lord and that the Lord had spoken to him, and how in Damascus he had preached fearlessly in the name of Jesus.)
[설교 요약]
오늘 말씀은 ‘위로의 사람’ 바나바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의 원래 이름은 ‘요셉’이었는데, 사도들이 ‘위로의 아들’ 혹은 ‘권위자’라는 뜻의 ‘바나바’라는 이름을 그에게 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갑작스럽게 회심한 청년 사울의 진정성을 성도들이 의심함으로 그와 교제하기를 두려워했을 때, 바나바는 그를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함께 교제했고, 그가 주의 사도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데 결정적인 교량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나바를 주님의 제자로 귀하게 쓰임 받게 한 것일까요?” 그것은
첫째, “성령과 믿음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1장24절>에서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라고 그를 설명합니다. 바나바를 주님의 충성된 제자로 쓰임 받게 했던 그 중심에는 ‘성령과 믿음의 충만’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겸손하게 섬겼기” 때문입니다: 바나바의 이름과 같이 ‘누군가를 위로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먼저 ‘겸손’하지 않을 때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남을 무시하거나 얕보지 않고, 낮은 마음으로 자신의 한계와 부족을 인정할 수 있는 겸손한 자만이 위로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그런 사람입니다.
셋째, “사람을 세워주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사도행전 9,11,13장>에서 어떻게 바나바가 회심한 사울을 포용할 뿐 아니라, 그를 이방인 선교의 탁월한 사역자로 세워주었는지를 자세히 밝혀줍니다. 바나바는 복음의 주인공은 자신도, 바울도 그 누구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했기에 비교의식이나 경쟁심없이 바울을 온전히 세워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한 은혜로 하나님과 누리는 평화 가운데 더 겸손히 서로를 사랑으로 섬기고 세워주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가 사도행전을 공부해 나가면서 함께 살펴보고 있는 가운데 초대교회의 여러 사역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열두제자를 대표할 뿐 아니라, 첫번째 초대교회인 예루살렘교회를 말씀과 다양한 사역으로 이끌었던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있었고, 또 지난 몇 주 동안 살펴본 활화산 같은 강력한 복음의 진리를 증거한 순교자 스데반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지방과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증거했던 전도자 빌립 집사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의 중심인물인 ‘바나바’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과 같이 바나바의 인물됨은 한마디로 ‘위로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위로한다’는 말 속에는 많은 것이 녹아들어가 있음을 우리는 이해합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우리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도 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바나바와 같은 위로의 사람, 포용의 사람 그리고 갈라진 관계를 다시 이어주고 회복케 하는 평화의 사람들이 많이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여러 주 전에 우리가 잠시 살펴보았는데, 바나바가 처음으로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것은 <사도행전 4장>의 마지막부분인 <36~37절>이었습니다. 먼저 <행. 3~4장>에서 보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로 40여 평생을 걷지 못하고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며 살아가던 한사람을 베드로가 성령의 능력으로 낫게 했고,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영접하고, 예루살렘교회가 부흥케 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가진 것을 팔아 서로를 책임지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갔던 것입니다 (행. 4:32~35). 이렇게 저자 누가가 예루살렘의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을 묘사하는 가운데, 구체적으로 언급한 한 사람이 ‘바나바’인 것입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행. 4:36~37)라고.
여기서 ‘바나바’라는 이름의 뜻은 제 성경, <개역 한글>에서는 ‘권위자’로, 그리고 <표준 새번역>에서는 ‘위로의 아들’ (the son of consolation/encouragement) 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당시 예루살렘 공동체는 앞에서 여러 번 살펴본데로 누구할 것없이 여러 믿는 성도들이 자원하는 심령으로 자신의 가진 것을 팔아 서로의 필요를 따라 나눠 가지며, 서로를 책임지는 뜨거운 신앙공동체를 이루어 갔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 누가가 그 중에 유독 한사람 ‘바나바’를 소개하면서 그가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에게 줌으로 공동체를 섬겼던 것을 기록하고 있음을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누가는 오늘 본문 <행. 9장>을 기록하면서 다시 한번 바나바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누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를 등장 시켰다기 보다는, 이 <9장>의 내용의 흐름 가운데 ‘바나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청년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극적으로 회심하고, 그분의 제자가 되었는데 이런 갑작스런 그의 회심으로 인해 대다수의 성도들이 그를 의심의 눈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제가 만약 그 당시 성도들의 입장이라도 그랬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왜냐면, 불과 며칠 전 까지만 해도 유대교 율법에 맹종하여 성도들을 핍박하고, 흩어진 성도들을 색출하여 처단하고자 혈안이 되어있는 유대주의의 대표적인 극단주의자였던 청년 사울이 ‘어떻게 이토록 갑작스런 회심을 할 수 있었을까?’ 에 대해서 그 회심의 스토리를 충분히 들고, 그 전후배경을 찬찬히 살펴보지 않는다면, 사울을 의심할수 밖에 없는 것이 그 당시 상황이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극적으로 회심한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주의 제자들과 사귐을 갖고자 할 때, 그들은 여전히 경계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됨을 믿지 아니하니” (행. 9:26) 그가 어쩌면 ‘거짓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것처럼 위장하고나서, 교회 안으로 들어와 성도들을 안심시키고 난 다음에, 일망타진하여 잡아가고자 하는 유대교 스파이’일 수도 있다는 의심의 눈초리로 대다수의 성도들은 그와 교제하기를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오늘 본문에서 ‘바나바’가 또 다시 등장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바나바는 회심한 사울을 사도들에게 데리고 가서 그 회심의 진정성을 자초지정 설명합니다.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게 되었는지, 그리고 주께서 어떻게 그에게 말씀하셨는지, 그로 인해 그가 극적인 회심을 함으로서 다메섹 지역에서 얼마나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했는지 하는 것을 여러 성도들에게 소상하게 설명했던 것입니다 (v.27). 바로 회심한 사울이 주의 사도 바울로 그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결정적 개기를 바나바는 열린 마음과 포용의 마음으로 마련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은 만약 바나바가 없었다면, 사도 바울의 그 놀라운 선교사역의 결과는 처음부터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이제 저는 바나바의 이런 모습을 통해 우리가 배우고 각자 적용할 점은 무엇인가를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그것은 “무엇이 바나바를 주님의 제자로 귀하게 쓰임 받게 했는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 “성령과 믿음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바나바를 바나바 되게 한 기초는 그 무엇보다도 그의 믿음과 성령의 충만함에 있음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점에 관해서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라고 <사도행전 11장24절>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행. 11:24>이 적힌 배경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1장>에서 볼 때, 그 당시 이방인지역에서 막 태어난 <안디옥 교회>에 대한 소문이 예루살렘교회에까지 들렸습니다. 그것은 스데반집사의 순교사건을 개기로 예루살렘교회에 불어 닥친 심각한 핍박으로 인해 성도들이 온 땅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사람 몇 명이 안디옥에 이르러 그곳에 있는 헬라인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되었는데, 주의 은혜의 손길이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은혜의 역사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런 소식을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이 듣게 되었을 때, 그들이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내어 그들에게 들린 소식이 과연 사실인 것인지를 확인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바나바를 보냈고, 그는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 과연 들리는 소문과 같이 함께 성령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바나바는 기뻐하며 안디옥 모든 성도들에게 굳센 믿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했던 것’입니다.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행. 11:23)라고. 그럼으로 앞서 살펴본 <행. 11:24>의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는 <바나바>라는 인물에 대한 설명은 결국 ‘왜 예루살렘의 여러 리더들 중에서도 굳이 바나바를 보내었는지?’를 밝혀주는 이유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단지 그가 마음이 어질고 착한 사람일 뿐 아니라,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타고난 성품도 법이 없어도 살아갈 것 같은 어진 사람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왜냐하면, 우리가 아무리 어질고 착하다고 해도 사실 절대적 선의 기준에서 본다면, 우리 모두는 ‘도토리 키재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격과 성품은 단지 상대적으로 조금 낫다 못하다는 차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감사하게도 타고난 자신의 성품에 더 이상 지배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순전한 믿음을 통해, 그분의 영 성령의 은혜와 충만한 능력으로 이끄심을 받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성령의 충만한 인도함을 받았던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였던 사도들이 이런 바나바의 영적 상태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사도들은 그의 영적 분별력과 리더쉽을 누구보다 신뢰함으로 안디옥 교회로 보냈던 것입니다.
이렇게 안디옥에 방문한 바나바는 단순히 그곳의 상황과 분위기를 파악하고 보고하는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곳에서 사도 바울과 함께 1년동안 팀사역을 하며 많은 무리를 말씀으로 가르치며 큰 열매를 맺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기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20)라고 자신의 본질적인 변화를 고백합니다. 이것이 또한 바나바의 성령과 믿음의 층만을 통한 본질적인 변화임을 믿습니다. 만약 성도 여러분이 바나바와 같은 아름다운 주의 제자가 되시기 원하신다면, 여러분은 타고난 성품과 기질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을 믿는 온전한 믿음을 통해 성령의 충만함으로 본질적 변화를 추구하고 경험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둘째, “겸손하게 섬겼기” 때문입니다: 앞서도 이미 살펴보았지만 바나바의 원래 이름은 ‘요셉’이었습니다만, 사도들이 그에게 ‘바나바’라는 별명을 지어준 것입니다. 그런데 ‘바나바’라는 뜻은 ‘권위자’ 혹은 ‘위로의 아들’ (the son of encouragement)입니다. 저는 <바나바>라는 이름, 곧 <위로의 아들>이라는 그 이름의 의미를 잠시 조용히 묵상해 보았습니다. 사실 ‘누군가를 위로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자가 되는 것임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위로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바나바는 어떻게 이런 위로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그가 겸손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잠언서의 저자는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잠. 15:33)라고.
교만한 자는 결코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 자신도 위로할 수 없는 까닭은 그의 눈이 이미 높아져 있기 때문입니다. 남을 멸시하고, 스스로 잘난 맛에 살아가는 인생은 결코 이웃에게 어떤 평화도 위로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성령의 충만을 통해 낮은 마음으로 자신의 한계와 부족을 겸손히 바라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어두워진 눈을 밝혀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모두 자기 착각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생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자신을 성령의 은혜로 깨닫은 만큼 더 겸손히 이웃을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가 막 회심한 사울의 진정성을 누구보다도 먼저 확인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그냥 ‘사람 좋아서’나 ‘덮어놓고 잘 믿어서’가 아닙니다. 그는 상대가 사울이 되었건, 또 누가 되었건, 먼저 열린 마음과 낮은 자세로 상대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듯이 동일하게 상대방에게도 “그럴 수 있지!!”라고 관용과 긍휼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했던 것입니다.
솔직히 이번주 ‘바나바’에 대한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가 말씀을 통해 도전 받고, 많이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동안 사도 바울과 같이 기독교 역사에서 걸출한 영향력을 미치는 그런 강력한 영적 리더로 설 수 있기를 소망하고 추구했지만 (물론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바나바와 같이 겸손히 미래의 바울을 섬기고, 빛나지 않을지라도 무대의 뒤에서 위로와 평화의 사람이 되고자 힘썼던가를 생각하며, 스스로 반성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깨닫게 된 것은 그 무엇보다도 ‘바나바가 먼저 선하신 하나님과 그 충만한 은혜와 평화의 관계에 있었기에 겸손과 만족으로 또한 지체를 아름답게 섬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롬. 5:1) 참된 겸손은 겸손한 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의롭다고 불러 주시는 은혜를 깨닫게 됨으로 하나님과 진정한 평화를 내 심령 깊은 곳에서부터 누리게 될 때 맺어지는 인격의 열매인 것입니다. 바로 바나바는 이런 겸손의 열매를 맺은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사람을 세워 주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바나바가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다는 점을 <사도행전 11장 24절>말씀을 통해 살펴보았는데, 그 <24절>바로 다음에 누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행. 11:25~26)라고. 바나바는 회심한 사울의 진정성을 열린 마음으로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보고 따뜻하게 포용함으로써 교회 안으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이와 같이 첫 <이방인 교회>였던 안디옥 교회를 바나바는 교회 지도자가 되어 섬기기를 시작했을 때 사울의 영적 은사와 잠재가능성을 잘 이해했기에 그를 불러들여 함께 동역함으로 안디옥 교회를 팀사역으로 아름답게 섬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얼마나 귀했으면, 안디옥교회 성도들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 (크리스챤)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들 스스로가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향해 ‘저들은 그리스도인이다’ 곧 ‘저들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다’라고 인정하고 불러주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다시한번 확인하게 되는 것은 바나바는 말로 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그리스도께 쓰임 받을 인재를 발굴하고 그들을 세워주고 키워줄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약의 <사울 왕과 청년 다윗>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먼저 된 자가 나중 된 자를 인정해주고, 사심없이 세워준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하는 것을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울 왕이 처음에 용맹한 소년 다윗을 알게 되었을 때는 그가 다윗을 아끼고 총애했지만, 백성들의 사랑과 관심이 점점 젊은 다윗에게로 쏠리게 되자 사울 왕은 다윗에 대한 시기와 질투, 경쟁심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완전히 망가트리게 되는 불행한 결말을 맞이하게 됨을 우리는 봅니다. 그만큼 그 누군가가 나를 밟고 지나가고, 나를 디디고 우뚝 솟게 될 것 같으면, 우리의 본성은 그 꼴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울 왕과 같이! 그러나 바나바는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1장>에서 청년 사울을 발탁해 자신과 함께 안디옥교회 사역을 훌륭하게 감당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줄 뿐 아니라, <사도행전 13장>에서 이제 ‘사울’이 ‘바울’이라 불리며 본격적으로 이방선교사역을 시작할 때도 그와 함께 팀을 이루며 실루기아와 구브로 그리고 비시디아 등지에서 바울이 선교팀을 대표하는 리더쉽을 가지게 되는 가운데서도 바나바는 바울과 그 어떤 잡음과 마찰을 우리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침례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나사렛 예수가 요단강에서 침례를 주니까 사람들이 많이 그분에게로 몰린다고 말하자, 요한은 오히려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 3:30)라고 말입니다. 상대를 경쟁의 대상으로 보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잘되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주 안에서 사심없이 세워준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를 세워 줄수 있었던 진정한 리더가 바나바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바나바와 같은 위로의 사람입니까? 믿음과 성령의 충만함으로 먼저 여러분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진정한 평화와 기쁨과 만족을 누리고 있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이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 성령의 충만함으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신다면, 여러분은 진정 위로의 사람, 용납의 사람, 그리고 용서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런 주의 사랑에서 솟아나는 위로와 포용과 세워줌으로 주님의 아름다운 제자의 삶을 살아가시고, 미래의 사도 바울을 영적으로 수없이 낳는 복의 근원자의 삶 사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