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로서 났으면” (If It Is From God)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If It Is From God)
12-31-23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5:38-39
38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39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설교 요약]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성령의 권능을 입고 복음을 힘있게 증거했을 때, 유대인들의 교회를 향한 본격적인 핍박과 공격이 오늘 본문을 포함한 <행. 5장>의 17절 이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시기하던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공회를 소집하여 주의 제자들을 죽이고자 살기 등등해 있었습니다. 그때 바리새파 율법교사이자 백성들의 존경을 받던 ‘가말리엘’이란 사람이 일어서서 사도들을 밖에 내보내고서,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오늘 본문말씀인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상관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v.38-39)라고. 그는 비록 복음을 깨닫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복음을 분별하는 중요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은 무너질 것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를 분별할까요?” 그것은 먼저,
- “부정적 기준”에서 볼 때: 첫째, <병고침, 방언, 예언등>의 초자연적인 현상 자체가 성령충만의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마. 7:22-23). 둘째, <열심과 열정>은 복음전도에 중요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지 않은 열심은 도리어 위험한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롬. 10:2-3)
- “긍정적 기준”에 본다면, ‘3P’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 <순결함> (Purity)입니다: ‘순결함’이란 의미는 ‘복음 내용의 순결함’ (message)이고, ‘인격의 고결함’ (messenger) 입니다. 이것이 곧 ‘성령의 열매’입니다 (갈. 5:22-23).
- <능력> (Power)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능력으로 전파되는데, 그것은 구체적으로 ‘말씀의 능력’과 ‘복음전파의 능력’ 그리고 ‘두려워하지 않는 능력’입니다 (행. 4:19-20).
- <핍박> (Persecution)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인도함 받는 개인과 공동체에는 반드시 핍박이 찾아옵니다 (딤후. 3:12). 그러나 굳세게 믿음으로 맞서 싸울 때 (벧전. 5:8-9),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담대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눈에 아무리 불가능해 보인다 할찌라도, <만약 하나님 아버지께로서 난 것이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담대한 주님의 증인이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이제 오늘이 올해 마지막 주일이자, 마지막날인 12월 31일입니다. 그동안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우리의 기억에 남기고, 2023년을 역사속으로 떠나보내며, 성도 여러분의 개인과 가정에 주의 충만하신 은혜가 감사와 소망으로 넘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그동안 사도행전을 살펴보면서 주의 성령의 충만하심으로 교회가 시작되었을 뿐 아니라, 점점 더 부흥케 되어, 생명의 복음이 힘차게 증거됨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역사가 크면 클수록 복음을 방해하는 악한 영들의 역사도 그만큼 거세었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특별히 그 당시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은 갓 태어난 초대교회가 놀랍게 부흥하고 급속도로 그리스도의 도가 전파되는 것을 막고자 혈안이 되었습니다.
그 구체적인 유대인들의 교회를 향한 본격적인 핍박과 공격이 오늘 본문을 포함한 <행. 5장 17절> 이후에서 끝절까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진정한 복음의 역사는 어떤 것이며, 이와 같이 ‘하나님께로 부터 시작된’ 복음의 역사는 결코 사람이 막을 수도 없고 무너뜨릴 수도 없으며, 반드시 성취됨을 우리는 깨닫고, 확신과 용기를 갖고 함께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힘쓰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대합니다.
지난 시간 아름답고 성령충만한 교회 공동체, 예루살렘교회 안에서 갑자기 찾아온 불행한 한 사건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바로 <아나니와와 삽비라>부부가 사도들을 속이고 밭을 판 값 일부를 감추고 나머지를 사도들에게 갔다 준 사건입니다. 이들 부부의 문제점은 그들의 소유의 일부분만 나누었다는 것이 아니라, ‘일부분만을 나누면서 마치 전부를 한 것인 양 속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거짓말은 사도들에게 한 것이기 이전에, 궁극적으로 성령에게 했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성령을 속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을 속이는 죄악으로 인해, 이들 부부에게 혼이 떠나게 되는 즉각적이고 엄중한 성령의 징계가 내려졌습니다. 하나의 ‘거짓과 위선’이라는 영적 암세포가 믿음의 공동체 안에 생겨날 때, 아름답고 영의 충만한 공동체라 할찌라도 삽시간에 파괴될 수 있는지를 성령은 너무도 잘 아시기에 이런 강력한 성령의 조치가 내려졌고, 이 일로 인해 온 교회와 이것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했고, 모두 영적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을 것임을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5장전반부, <1~11절>까지의 내용이고, 이어지는 <12절>부터 끝절인 <42절>까지가 앞서 언급했듯이 <행. 3장>에서부터 사도들과 주의 제자들의 담대한 복음전파 사역이고, 이와 동시에 복음증거를 가로막고자 하는 유대지도자들의 핍박도 더욱 거세지게 됨을 보게 됩니다.
이제 <12~14절>은 이렇게 사도들의 파워풀한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행. 5:12-14)라고. 사도행전 2장에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합심으로 기도하던 열두 사도들을 포함한 120명의 주의 제자들에게 불의 혀같이 임하신 성령의 충만한 역사는 이제 시간이 갈수록 담대하고 구체적으로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주께서 승천하시면서 하신 말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는 그 약속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힘입음으로 권능을 받아 이제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담대한 주의 증인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각종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깨끗케 하는 권능을 행했고, 사람들은 심지어 베드로가 지나갈 때 혹시 그 그림자에라도 덮여서 났게 되지 않을까 해서 병든 자를 들것에 뉘어 눕힌 채 데리고 왔던 것입니다. 물론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뜻은 아닙니다 (v. 15-16).
그러나, 대제사장과 사두개인을 중심으로 한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이런 그리스도의 복음이 급속히 전파되는 것을 보고 다들 마음에 시기 질투가 가득차서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v. 18). 그러나 성령님의 강력하신 권능이 옥에 갇힌 사도들을 지키셨습니다.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그들을 이끌어 내며 말했습니다.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v. 20)라고. 그래서 옥문을 빠져나온 사도들은 동이 틀 새벽녁에 성전에 서서 다시 담대하게 주의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간쯤,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던 대제사장과 그 일행들이 도착하여 공회를 소집하고,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을 모이게 하여 옥에 갇힌 사도들을 끌어오게 했습니다.
경비병들이 감옥에 도착하여 놀라운 상황을 목격한 것입니다. ‘옥문은 튼튼히 잠겨 있고, 지키는 간수도 서 있는데, 그 감옥안에는 한사람도 없었다’고 경비병들은 믿기지 않는 보고를 하는 것입니다. 이 황당한 사실로 인해 유대지도자들이 소란해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들어와서 사도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음을 알렸습니다 (v.24-25). ‘성전 맡은 자’ 곧 ‘경비대장’이 부하들과 함께 가서 다시 사도들을 붙잡아 왔으나,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서 그들은 제자들에게 폭력을 쓰지는 못했습니다.
이제 그들이 사도들을 공회 앞에 세웠고, 대제사장이 이렇게 다그쳐 물었습니다.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 돌리고자 함이로다” (v.28)라고. 이 말을 듣고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합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라)” (v. 29-32)라고 사도들은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목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심으로 그분이 그리스도 되심을 하나님께서 선포하셨다고 담대하게 증거합니다.
이렇게 조금의 주저함이나 두려움 없이 대담하게 나사렛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도들에 대해 유대종교지도자들이 격분하여 그들을 죽이고자 했을 때, 바리새인 가운데 율법교사로서 모든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던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공회 가운데서 일어나 사도들을 잠시 밖에 내보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중에도 기억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사도 바울이 자신을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엄한 교훈을 받았다’ (행. 22:3)고 회고한적이 있는데, ‘가말리엘’은 요즘으로 말하자면 ‘하버드대 법대 석좌교수’와 같은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고, 모든 백성들로 존경과 신뢰를 받던 유대인의 대표적인 지도자였습니다. 그런 가말리엘이 사도들을 잠시 밖으로 내보내고나서, 모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경계의 말을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v.35). 그리고 그는 과거의 사례들을 들어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전에 <드다>라는 자가 일어나 약 400명이 그를 따랐지만, 그가 죽으며 좇던 사람들이 다 흩어져 없어진 사건’과 ‘그후 갈릴리 사람 <유다>가 백성들을 선동하여 좇게 하다가 그도 죽자 따르던 자가 다 흩어진 사례’ (v.36-37)를 들어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이 ‘가말리엘’은 그들에게 조언합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v.38-39)라고. 유대인 모두에게 존경받는 율법교사로서 가말리엘은 모인 자들에게 예수님의 사도들을 처벌하는 일에 신중해야 할 것을 촉구합니다. 그의 제안은 한마디로 <그들을 가만 두어라. 만약 그들이 인간적인 사상 (=거짓 예언자)에서 왔다면 사라질 것이요, 하나님께로서 났다면 우리가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큰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가만히 두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옳게 여겨 사도들을 채찍질한 후에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아무 말도 하지말라’고 엄중히 경고하고 놓아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모욕)당하는 것을 도리어 특권이라고 기뻐하며,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v.42)는 것입니다.
우리가 몇 번에 걸쳐 확인했듯이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함에 있어서 받게 되는 그 어떤 핍박과 죽음의 위협에 대해서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굴하지 않고, 도리어 예수의 이름으로 모욕당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도들은 날마다 ‘나사렛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고, 가르치기를 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땅속 깊은 곳에서 폭파하듯 솟아오르는 용암의 위력을 그 어떤 것으로도 틀어막을 수 없는 것처럼,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공회의 이름으로 유대종교 지도자들이 온 힘을 다해 사도들을 엄중히 경고하고, 옥에 가두고 핍박을 가해도 그들의 입에서 흘러 넘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결코 막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도데체 이와 같이 세상 그 어떤 세력과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강력하고 담대한 사도들의 행동과 증인의 삶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그 어떤 노력이나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그분의 영, 성령의 능력에서 기인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그렇다면 저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기독교 안에서조차 무엇이 ‘올바른 가르침인지 혹은 거짓 가르침인지?’를 분별하는 것? 더 궁극적으로 말하자면, 무엇이 하나님의 역사고, 무엇이 인간의 역사인지를 이해하고 분별하는 것은 우리 각자가 참된 믿음으로 성숙되어가는데, 그리고 우리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으로 쓰임 받음에 있어서 매우 시급한 점이라 믿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를 분별하는 기준인지?”를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그것은 먼저 ‘부정적 기준’ 그 다음으로 ‘긍정적 기준’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부정적 기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를 통하여 존재했던 수많은 이단들을 모두 열거하기는 어렵지만, 기독교에 속하는 여러 다양한 교파 (종파)에 관계없이 이런 거짓지도자들의 대표적인 특징의 하나는 첫째, <병고침, 방언, 예언등>과 같은 ‘영적 은사’처럼 보이는 현란한 현상을 통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경우를 수없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초자연적인 은사’사용을 통해 이것이 마치 강력한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은 증거라고 이들은 주장하는 것입니다. 소위 ‘오순절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사용을 가장 확실한 ‘성령충만의 증거요,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이라고 주장하고,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도들의 여러 기적적인 신유의 능력을 그 예로 듭니다. 그러나, 존 맥아더목사를 비롯한 여러 탁월한 성경학자들은 이런 신약성경에 기록된 초대교회의 신유와 표적은 특별히 사도시대에만 제한적으로 주어진 현상임을 주장하며, 무분별한 은사추구를 강하게 경계합니다. 주님은 마지막 심판날 있게 될 일을 예언하시면서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주여 주여 우리가 ~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2~23)고 은사사용이 곧 성령충만도 아니고, 하나님께로서 나온 증거도 아님을 주님은 분명히 밝히고 경고하셨습니다.
둘째, <열심과 열정>은 복음전도에 중요하지만, 그것 자체가 진정한 교회와 복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님을 저는 적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직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수없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도리어 제가 경험한 안타까운 사실은 소위 ‘정통교단’이라고 자부하는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복음에 대한 열정도, 전도에 대한 열심도 없고 자기 일에 갇혀 ‘물탄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데, 거짓교리와 이단사상을 가르치는 ‘이단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자기가 배운 가르침을 온 몸으로 실천하고 전하고자 삶을 바친다는 것입니다. 이건 대단한 ‘아이러니’아닙니까? 진정한 성경의 교리와 진리를 배우고 믿는다는 교인들은 복음에 대한 열정도 기쁨도 확신도 없이 자기 몸하나 간수하며 살아가기에 급급한데, 이단교리를 믿는 사람들은 도리어 온몸을 던져 잘못된 열심으로 불타 오른다니 말입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중요한 것은 전도에 대한 ‘열심과 열정’ 그 자체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 것임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동족 유대인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문제는 ‘열심’자체가 아니라 ‘잘못된 열심’이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한 것이라고 사도는 밝힙니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롬. 10:2-3)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역사를 분별하는 “긍정적 기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런 긍정적 기준은 영어로는 ‘3P’라고 단순화할 수 있는데, 그것은 ‘Purity’ ‘Power’ 그리고 ‘Persecution’입니다. 먼저, 복음을 전파하는 공동체를 하나님이 이끄신다는 강력한 증거로서 저는 첫째, <순결함> (Purity)을 꼽겠습니다. 여기서 제가 ‘순결함’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복음의 내용>의 순수함입니다. 이것은 먼저 그 공동체 지도자가 전하는 말씀이 얼마나 성경적이요, 얼마나 복음적인가? 하는 점입니다. 말씀을 말씀으로 선포할 수 있으며, 세상의 돈과 명예와 세상적인 것과 잡탕이 되어 육신적인 말씀을 선포한다면, 이런 공동체는 결코 순수한 복음을 증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순결함은 교회 공동체에 속한 성도 한사람 한사람의 <양심과 인격의 고결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개인과 공동체의 순결함 (=고결함)은 일반적 의미에서 사람이 수양을 많이 행함으로서 인격이 성숙되었다는 차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도 일정부분 가능하겠지만,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 믿음의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순결한 향기’ (고후. 2:15)를 품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인격수양과 마인드컨트롤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한 열매인 것입니다. 바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밝힌 ‘성령의 9가지 열매’ 즉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인 것입니다(갈. 5:22-23).
둘째, <능력> (Power)입니다. 이 능력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임을 나타내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강력한 역사’은 그 무엇보다도 복음의 능력과 그 듣는 자들의 영혼을 뒤흔들고 영적 지진을 일으키는 다이나마이트 같은 능력으로 나타남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이 시작되면서 오늘 5장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제자들을 통하여 성령의 충만하심으로써 행하여졌던 모든 주의 증인의 삶은 능력의 삶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좀더 구체적으로 이 능력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 능력은 제가 ‘부정적인 기준’에서 이미 말씀드렸듯이 ‘병고침, 방언, 예언’등과 같은 밖으로 드러나는 하나의 강력한 현상을 뜻하지 않습니다. 물론 초대교회 당시는 이런 사도들에 의해 행해졌던 초자연적인 병고침과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이 허락되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시대를 초월한 복음이 주시는 대표적인 능력은 <말씀의 능력>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더욱 더 깊은 말씀에 대한 깨닫음을 통해 말씀의 능력이 선포되는 것입니다. 또한 <복음전파의 능력>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성령충만을 받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했을 때, 한번에 3천명이 주께로 회개함으로 돌아오는 놀라운 복음전파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이 능력은 사도 베드로의 말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께서 듣는 자의 마음을 열어 주셔서 회개의 영과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하는 구원의 은혜를 능력으로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능력은 <두려워하지 않는 능력>입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만해도 주께서 잡히시던 날, 절망과 낙심 가운데 뿔뿔히 흩어졌던 주의 제자들이,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여 주님을 세번씩 저주하고 부인했던 베드로가 오늘 살펴본 것처럼 서슬 퍼른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온갖 협박과 위협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활화산처럼 주의 복음을 토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것일까요? 그것은 성령을 통한 ‘두려움 없는 담대한 능력’을 덧입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렇게 복음증거를 막으며 자신들을 위협하는 유대지도자들에게 선언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행. 4:19-20)고 말입니다. 참으로 두려워하지 않고 거침없는 담대한 능력입니다.
셋째, <핍박> (Persecution)입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는 교회 공동체, 그분의 복음이 강력히 증거되는 교회 공동체의 마지막 빠트릴 수 없는 특징은 <핍박>입니다. 여기서 ‘교회공동체의 특징이 핍박이다’라는 뜻은 ‘진정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성도 개인과 교회 공동체에 있어서 반드시 핍박이 있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이 보낸 마지막 편지, 곧 그의 영적 아들인 디모데에게 보낸 두번째 편지 <디모데후서>를 마감하면서 사도는 이렇게 디모데를 영적으로 격려하고 재무장케 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딤후. 3:12)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핍박에 대한 이런 사도 바울의 영적 통찰력과 가르침과는 대조적으로, 오늘날 수많은 크리스챤들은 ‘핍박’이나 ‘고난’은 우리와는 무관한 단어라고 간주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제가 한가지 성경을 더 묵상하고 공부해 나가면 나갈수록,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되는 영적 사실은 주님의 교회를 향한 세상과 공중 권세 잡은 자 사단 마귀의 공격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중단거나 약화된 적이 없고, 갈수록 극렬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이들은 더욱 극렬하게 교회를 공격하고 핍박하게 될 것을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밝혀 줍니다. 사도 베드로의 경계의 말처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벧전. 5:8-9)고 말입니다. 솔직히 저 역시 핍박을 원치 않습니다. 좀더 편안히 고통과 핍박없이 살다가 주님을 만나고 싶은 것이 저의 육신적인 바램입니다. 그러나, 운동경기나 전쟁상황에서 “공격이 최선의 방어이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이것은 ‘영적 전쟁’의 상황에도 또한 진리라고 믿습니다. 이런 세상과 악한 영들의 공격과 핍박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말고 오늘 제자들의 모습과 같이 과감하게 맞서서 싸우라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우리 주님은 친히 그의 몸된 교회를 성령의 충만한 능력으로 지켜 주시고, 반드시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오늘로서 2023년 한 해가 끝이 납니다. 그리고 내일이면 새로운 2024년 새해가 시작됩니다. 성도 여러분은 새해를 이제 어떤 기대와 각오로 맞이하고 있습니까? 바라기는 여러분이 꿈꾸고 소망하는 모든 일들이 주님의 은혜 안에서 아름답게 열매 맺는 새로운 한해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성도 여러분을 격려하고 도전하기 원하는 것은 ‘우리는 과연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더욱 더 깨닫아 가고 있으며, 또한 그 뜻에 순종하고 있는가?’를 돌아보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어떤 새로운 한 해가 펼쳐질지는 우리는 결코 알수 없지만, 바라기는 우리 눈에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라 할찌라도, <만약 하나님 아버지께로서 난 것이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고, 말씀과 기도 가운데 성령의 충만함으로 담대한 주님의 증인으로 승리하며 함께 아름답게 자라가는 주의 몸된 아포슬공동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