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h 12, 2023

“형제의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How Pleasant When God’s People Live Together)

Preacher:
Passage: 시편 (Psalms) 133:1~3
Service Type:

“형제의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How Pleasant When God’s People Live Together!)

3-12-23

본문말씀: 시편 (Psalms) 133:1~3

1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How good and pleasant it is when brothers live together in unity!)

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까지 내림 같고 (It like precious oil poured on poured on the head, running down on the beard, running down on Aaron’s beard, down upon the collar of his robes.)

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It is as if the dew of Hermon were falling on Mount Zion. For there the Lord bestows his blessing, even life forevermore.)

[설교 요약]

            오늘 본문의 시편말씀은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로 연합된 형제의 아름다움을 노래합니다.

이 아름다움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 분의 몸으로 연결된 ‘교회’라는 영적 공동체의 아름다움입니다. 다윗이 노래한 ‘영적 공동체의 아름다움’은 2가지로 묘사됩니다. 그것은

  • ‘아론의 머리에 부어진 거룩한 기름’ (v.2): 하나님께서 택하신 대제사장 아론의 머리에 부어졌던 거룩한 기름은, 곧 ‘성령의 충만한 은혜’가 연합한 공동체 위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 ‘헐몬산의 이슬’ (v.3a): 형제가 연합하는 아름다움은 마치 ‘헐몬산’ (2,814m)에 풍족히 내리는 아침이슬과 같이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이런 복된 공동체의 연합 위에 하나님은 영생으로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곧 영생을 소유한 공동체 위에 천국의 기쁨과 구원의 복음이 흘러 넘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윗이 노래한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일까요?” (What is the beauty of faithful communities to song by David?) 그것은

첫째,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다윗은 젊은 날, 함께 서로 의지하며 동고동락했던 ‘아둘람 굴’의 <400명>이 있었습니다. ‘환난 당했던400명’의 공동체와 함께 다윗은 고난을 이겨 나갈수 있었습니다. 서로를 돌아보고 모이기를 힘쓰는 사랑의 공동체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히. 10:24-25)

둘째, ‘예배가 살아있는 공동체’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 4:24)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구원목적은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가 살아있는 교회는 아름답습니다.

셋째, ‘생명을 전하는 공동체’입니다: 다윗은 <시편 110편>에서 “주의 권능의 날에 ~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 110:3)라고 주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주의 청년의 모습을 노래합니다. 복음을 들고 산을 넘는 발은 아름답습니다.

이런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영생의 복이 우리 아포슬 공동체 위에 성령의 충만하신 은혜 가운데 넘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제가 청년시절,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로 언제나 제 마음에 품고 있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참된 사랑의 공동체는 가능한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을 머리로 한 아름다운 신앙공동체’는 정말 이 땅 위에서 실현 가능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신앙공동체는 제가 주님을 믿어 영접하고 그분의 제가가 된 이후 지금까지 꿈꾸어 온 평생의 기도제목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되시고, 사랑 가운데 그분의 몸된 공동체로 세워지는 그런 교회를 꿈꾸십니까? 꿈꾸긴 하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이뤄지긴 힘들다고 여기십니까? 저는 오늘 말씀과 함께 우리 아포슬교회는 주님의 아름다운 몸으로 함께 자라고 있는지를 돌아보며, 주께서 약속하신 아름다운 공동체로 세워져 나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의 시편말씀은 세절로 이루어진 짧은 찬양의 시로써, 다윗에 의해 쓰여진 시편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부제’로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이 시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v.1)라고. 많은 성경학자들은 이 다윗의 시편의 찬양시는 그의 젊은 날 사울 왕을 피해 사선을 넘었던 고난의 삶을 이제 끝내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형제된 이스라엘 12지파 백성과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며 기쁨으로 지은 시로 보고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언약궤를 블레셋에 빼앗겼다가 도로 찾아 예루살렘에 안치하고 나서,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하나님의 백성의 연합된 즐거움을 다시 회복하면서 기쁨 가운데 하나님께 제사로 나아가며 지은 시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함께 연합하여 동거하는 아름다움을 영의 충만함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은 첫째, 아론의 머리에 부어져서 수염을 타고 흘러내리는 향기나고 보배로운 기름 같다는 것입니다. 아론은 누구입니까? 그는 이스라엘의 초대 대제사장으로 백성을 대신하여 거룩하고 참된 제사를 드리도록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영적 지도자입니다. 그를 이은 후손 가운데 대를 이어 하나님께 나아가 제사 드리는 복된 제사장들이 세워졌던 것입니다. 다윗은 노래합니다.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까지 내림 같고” (v.2) 아론의 머리에 부어졌던 향유, 곧 향기롭고 거룩한 기름은 하나님이 그를 세우셔서 복된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하도록 허락하셨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총과 택하심의 향기롭고 거룩한 기름이 아론의 머리에 부어지고 그의 수염에 흘러, 그 옷깃까지 적시고 흐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 성령님의 기름 부으시는 충만함이 그의 온 몸과 존재 전체를 감싸고 넘치심을 의미합니다. 그럼으로 대제사장 아론에게 넘쳤던 향기롭고 거룩한 기름과 같은 성령의 부으심이 ‘(영적으로) 연합한 이스라엘 공동체 위에 넘쳐 흐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의 충만한 다스림이 이스라엘 공동체 위에 넘치도록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또한 ‘형제의 연합하는 아름다움은 <헐몬산의 이슬>과 같다’고 노래합니다. 여기서 ‘헐몬산’은 어디에 있는 산입니까? ‘헐몬산’은 ‘헤르몬산’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스라엘 북쪽에서부터 레바논에 걸쳐 있는 해발 2,814m의 높은 산입니다. 이 산은 백두산보다도 70여 m가 더 높은 산입니다. 일년 중 8개월 이상 눈으로 덮일 정도로 고도가 높은 산으로써 요단강의 근원을 이루는 산인데, 해발이 높은 산이다 보니 ‘많은 양의 이슬이 내리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등장하는 ‘헐몬의 이슬’은 곧 ‘많은 양의 이슬’을 뜻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특별히 중동지방과 같이 ‘강우량’이 적고, 기후가 덥고 척박한 땅에서는 ‘물을 구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심각한 일입니다. 한낮에 물 길러 나왔던 한 사마리아여인과 주께서 만나셨던 사건에서 보듯이, 사람이나 짐승에게 있어서 이 팔레스타인지역에서 물이란 말 그대로 ‘생명의 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헐몬산은 높은 고도 때문에 하룻동안의 급격한 기온차로 인해 새벽녁이면 초목과 땅 위에 마치 큰 비가 오고 간듯이 흠뻑 이슬이 맺힌다는 것입니다. 이 이슬은 실로 생명을 살리는 생명의 물인 것입니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v.3)라고.

그럼으로 다윗은 무엇을 노래하고 있습니까? 그는 지금 형제와 연합하는 그 아름다움은 아론의 머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기름과 같으며, 또한 헐몬산에 내리는 생명의 이슬과 같이 풍요롭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아름다운 영적 연합의 공동체 위에 하나님은 축복을 내리시는데 그것은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새벽이슬과 같은 생명의 은혜가 하나님께 경배로 나아가는 공동체 위에 영생의 능력으로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천국의 본질인 영생, 곧 영원한 생명의 은혜가 이 아름답게 연합한 공동체 위에 열매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오늘 다윗이 노래한 ‘아름다운 형제의 연합’을 통해 우리 ‘아포슬 공동체’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성찰해보고, 이 말씀의 은혜를 우리 안에 적용시켜 보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윗이 노래한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일까요?” (What is the beauty of faithful communities to song by David?) 그것은

첫째,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다윗이 젊은 날, 사울 왕을 피해 도망 다니던 시절 ‘아둘람 굴’에서 함께 동고동락하며, 서로를 생명을 걸고 지켜주었던 <400명>의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존재들이었을까요? 그들은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 (삼상. 22:2)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세상적으로 볼 때 잘나가고 능력있고 매력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도리어 세상사람들의 눈에는 보잘 것 없고 버림받은 자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거나, 가지지 못해 빚질 수 밖에 없었고, 마음의 상처로 인해 고통받았던 세상적으로 볼 때는 버림받은 인생들을 다윗은 품고 함께 서로를 보듬어 갔던 것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살아가는 현실은 승승장구하고 대박난 인생들 보다는, 이런 저런 삶의 굴곡가운데 상처받고 고통받는 힘겨운 인생들이 훨씬 많은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는 영적 감수성이 우리에게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아픔을 공동체의 아픔으로 인식하고 함께 그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는 관심과 사랑이 우리 가운데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 10:24-25)고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랑의 공동체가 어떤 모습의 공동체인지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서로에게 관심가지고, 서로를 돌아보며 선한 행실을 격려해 나가며, 날이 가면 갈수록 더욱 모이기를 힘쓰는 그런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사랑으로 서로의 상처를 품어주며, 함께 세워져 가는 공동체를 꿈꾸는 것입니다.

          둘째, ‘예배가 살아있는 공동체’입니다: 예수께서 야곱의 우물가에서 만나신 사마리아 여인은 주님께 어느 산에서 예배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의 영토에 있는 예루살렘 산에서 예배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이 속해 있는 사마리아 땅의 그리심 산에서 예배할 것인지를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예배할 장소에 대한 질문은 결국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입니까?’ 라는 질문이 그 핵심인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1-23)라고.

앞서도 살펴보았듯이, 구약시대까지는 대제사장 아론과 그의 후손 가운데서 세워진 기름부음을 받은 대제사장들이 이스라엘민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무나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아 세우심을 입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보배로운 피를 흘려 죽으시고 3일만에 다시 살아가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자를 살리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 크리스챤들은 영생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뿐 아니라, 구약에서 몇몇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졌던 제사장의 직분이 우리 성도들에게 영광스럽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만민제사장’이라고 칭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 크리스챤의 영적 신분의 변화를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잘 설파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벧전. 2:9)라고. 우리 모두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과 서로를 위해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 앞에 그리스도의 의로우신 옷을 입고 담대히 나아가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 함께 거룩한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예배자로 서는 것’입니다. 이런 예배가 회복되고,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 가운데 거하시는 예배 공동체가 되기는 저는 꿈꾸는 것입니다.

셋째, ‘생명을 전하는 공동체’입니다: 다윗은 <시편 110편>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 110:3)라고. 다윗은 성령의 충만을 받아 장차 이 땅에 오실 그리스도께서 왕권으로 원수들을 그 발 아래 굴복시키시는 주의 권능의 날에 있을 영광을 노래하면서, 그 권능의 날에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아올 것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일까요? 여기서 청년은 단순히 나이만 젊다고 청년이 아닌 것입니다. 도리어 나이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주의 거룩한 옷을 입고 자진해서 주님께 나아가서 충성된 그분의 제자로 살아가고자 결단하는 자가 주의 청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주의 청년을 묘사하면서 ‘새벽이슬’ 같다는 표현은 마치 ‘아침 이슬같이 영롱하고 반짝인다’는 식의 시적 표현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의미는 히브리원어의 표현방식에서 ‘엄청나게 많은 규모의 숫자’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의 권능의 날에 하나님의 군대에 자원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옷을 입고 집결한 주의 청년들, 곧 ‘새벽이슬같이 셀수 없이 많은 그리스도의 군사가 그분 앞으로 몰려온다는 것입니다. 이 수없이 많은 청년들이 몰려와서 무엇을 하는 것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싸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은 미약하고 쉽게 넘어지는 연약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되어 우리의 육신의 소욕과 악한 영 사단 마귀와 맞서 싸워 이겨 나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과 롬 메이트, 클레스 메이트에게 주의 생명의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축복된 열매 맺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아포슬교회 속한 성도 한사람 한사람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이 되어 자원하는 마음과 기쁨으로 주님의 생명과 복음을 친구와 이웃들에게 열심으로 나누는 공동체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아포슬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입니까? 서로를 향한 관심과 사랑으로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품어주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하는 공동체입니까? 아니면 남의 상처는 관심도 없고, 나의 아픔을 나누는 것도 부담스러워하는 그냥 따로 따로의 공동체입니까?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 주님을 머리로 한 형제 자매가 하나로 연합하는 모습을 실로 아름답다고 선포하십니다. 그 모습은 아론의 머리에서 온몸을 감싸고 흘러내리는 보배로운 기름과 같고, 헐몬산의 풍성한 이슬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영생의 복이 우리 아포슬 공동체 위에 성령의 충만하신 은혜 가운데 넘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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