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h 1, 2020

“같은 마음을 품으라” (To Agree with Each Other)

Preacher:
Passage: 빌립보서 (Phillipians) 4:1~3
Service Type:

“같은 마음을 품으라”

(To agree with each other)

3-1-20

본문말씀: 빌립보서 (Phillipians) 4:1~3

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위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설교 요약]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여성도인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명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주 안에서 서로 한 마음을 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왜 우리 크리스챤은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하는지?” (Why do our Christians should agree with each other?) 에 대해 영적으로 설명합니다.

첫째, ‘멍에를 함께 한 자이기 때문’ (Because we are true yokefellows) 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29~30) 그럼으로 우리 크리스챤이 함께 지는 멍에는 종교적인 무거운 멍에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리스도 자신이 주시는 쉽고 가벼움 멍에입니다.

둘째, ‘함께 힘쓰는 동역자이기 때문’ (Because we are fellow workers who labor with each other) 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크리스챤이 존재하는 목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다)’ (엡. 2:10) 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택한 그의 자녀들이 함께 동역함으로 그분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어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주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이기 때문’ (Because our names are written in the book of life) 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최종적인 우리 성도의 구원의 확실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명책에 기록된 은혜 받은 주의 자녀들이라면 한 마음을 품고 주의 사랑으로 서로를 세워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벼운 멍에를 함께 매고, 아름답게 동역 함으로 마지막날 주의 생명책에 기록된 서로의 이름을 기쁨으로 확인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때때로 매우 안따깝고 힘든 상황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경우의 하나가 나의 생각이나 진심이 상대방에게 잘못 전달됨으로 말미암아 서로 오해하고 갈등을 겪게 된다고 느끼는 경우입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게 되는” 경우라고 나 할까요?! 저 뿐 아니라 성도 여러분도 살아가다 보면 이와 같이 사람과의 관계성 속에서 서로 갈등하고 고통을 겪는 경우를 때에 따라 피할 수 없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오늘 말씀을 통해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런 상황과 형편으로 생명과 진리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도 갈라짐과 갈등을 피할 수 없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한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의도치 못한 상황으로 인해, 또한 우리의 연약과 부족으로 인해 때로 갈라지고 다른 마음을 품기도 하지만, 주님의 사랑으로 성령 안에서 한 마음을 품고 함께 세워져 가는 믿음의 공동체되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마무리해 가면서 구체적으로 몇 명의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애정 어린 권고를 하고 믿음으로 격려하고 있습니다. 바로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명의 여성도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사실 옛날이나 요즘이나 교회에서 열심으로 헌신하고 봉사했던 동역자의 중심에 여성들이 있음을 봅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초대교회 시대의 여성도로써 빌립의 네 딸 (행.21:9)이나 여제자 도르가 (행.9:36~42), 브리스길라, 마리아, 유니아 (롬.16:3~7) 그리고 자주 장사 루디아 등 수없이 많은 여성도들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언급된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명의 여성도들의 구체적으로 어떤 믿음을 가졌고, 교회에서의 역할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지만, 바울의 문체로 볼 때 아마도 이들도 빌립보 교회에서 헌신적으로 열심을 다해 봉사하고 섬기는 일꾼들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하나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성찰해 볼 때, 처음부터 비난받아 마땅한 잘못된 행동으로 기인하는 것 보다는, 원래 동기는 순수하고 좋았는데 결과가 안 좋게 되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교회를 섬기기위해 그리고 복음전파를 위해 함께 사역하자고 출발했는데, 사역을 해 나가다 보면 서로의 의견차나 신앙 양심의 차이나 성숙의 차이에 의해서 서로 마찰하고 갈라지게 되는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먼저 오늘 말씀을 나눔에 있어서 사도가 강조하는 한가지를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빌. 4장>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V.1) 라고. 그런데 바울이 4장을 시작하면서 ‘그러므로’ 라고 말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빌.3장>을 마무리하면서 선언 했드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음을 우리는 확신하며, 그곳에서 오셔서 우리를 그곳으로 불러가 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존재가 우리이다’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고, 또한 그곳에서 오셔서 우리를 불러 가실 주 예수를 우리는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아 주 안에서 서라> 라고 바울은 주장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어지는 모든 내용을 포괄하는 중요한 단어는 “그러므로” 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고, 주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의 존재를 그의 영광의 형체로 변화시키실 것을 믿고 간절히 기다리는 존재가 우리이기에 (빌. 3:20~21)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함께 주 안에서 세워주며,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격려하고 도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이에 있는 작은 차이나 장벽은 같은 마음을 품어서 극복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사도는 오늘 본문을 통해 구체적으로 왜 우리 크리스챤은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하는지?” (Why do our Christians should agree with each other?) 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첫째, ‘멍에를 함께 한 자이기 때문’ (Because we are true yokefellows) 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복된 초청을 하심을 기억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28~30) 우리 주님은 인류의 조상,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한사람도 예외없이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 짐은 그 무엇보다도 ‘죄와 죽음’입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원죄를 유전 받아 죄에 지배를 받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 이 무거운 짐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화목제물 되신 피로서 우리의 원죄를 씻어 주심으로 더 이상 죄와 사망 아래서 신음하지 않고 자유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챤은 더 이상 첫 사람 아담의 죄의 영향력 아래 놓인 자들이 아니라,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의 생명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 새로와진 존재는 <죄와 죽음>에서 자유하게 된 존재입니다 (요.8:36).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되는 중요한 사실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고 주님은 명령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예수 믿고 그분을 따르는 제자로 살아감에 있어서 있어서는 놓쳐서는 안되는 주님의 명하심 입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은 간절히 구하면서도, 주님의 멍에를 메고 그분께 배우는 것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안따까운 결과는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 고 하는데도, 삶의 현실은 여전히 무거운 짐에 허덕이고 쉼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주님은 자유를 약속하셨는데 왜 우리 크리스챤들은 여전히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것일까요? 문제는 우리가 주께서 명하신 ‘주님의 멍에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주께 배울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님의 멍에를 멤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주께서 약속하신 우리 마음에 쉼을 얻을 얻게 되는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무엇보다도 우리 크리스챤은 ‘멍에를 같이 한자들’ (the yokefellow) 이기 때문이라고 사도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멍에는 그 어떤 우리의 고매한 인격이나 복음전도의 굳건한 의지나 심지어 비젼보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인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취미가 다르고 전공과 삶의 모습은 다르다고 할찌라도, 같은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한 지체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동일하게 받았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쉽고 가벼운 짐을 함께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약속하신 성령 안에서 자유자의 삶을 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그분께 배우고 있습니까?

둘째, ‘함께 힘쓰는 동역자이기 때문’ (Because we are fellow workers who labor with each other) 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크리스챤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 이니라” (엡. 2:10)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의 만드신 바’ 곧 ‘하나님의 작품’ (His workmanship) 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스럽고 탁월한 걸작품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잘 아는 데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온전하게 창조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안타깝게도 첫 인간 부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거역하여 불순종함으로 그분의 형상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과 교제했던 인간은 그 범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됨으로 죄와 죽음의 지배를 받게 된 것입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인간에게 있어서는 더 이상 희망이 없어진 것입니다. 오직 죄와 죽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런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유일한 길이 열렸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먼저 원수 되었던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죄 용서를 통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가 먼저 <엡. 2:1~9>에서 이렇게 지적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내가 믿음이 좋고 내 행위가 선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선물’이란 뜻은 어떤 조건없이 거져 주시는 은혜라는 뜻입니다. 그럼으로 그 선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크리스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창조물로 만드신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영광스럽고 놀라운 걸작품으로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의 존재인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이런 복된 자녀로 만드셨는지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딛. 2:14)라고. 주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그의 친 백성으로 우리를 성장시키시고 자 함입니다. 여기서 ‘선한 일을 위해 함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동역자’ 입니다. ‘동역자’ (fellow worker)는 ‘같은 일에 함께 협력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고전. 3:9) 고 사도는 고백합니다. 우리 크리스챤은 선한 일을 위해 함께 부르심을 받은 동역자일 뿐 아니라, 감히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라고 사도는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주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이기 때문’ (Because our names are written in the book of life) 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성도 ‘유오디아’와 ‘순두게’ 뿐 아니라 글레멘드와 사도의 모든 동역자를 도우라고 권고하고 나서 그 이유를 이렇게 결론 내리고 있습니다.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v.3) 라고. 그렇다면 ‘그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녀다’ 혹은 ‘천국시민이다’ 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는 것은 최종적인 성도의 구원의 확실성’ 입니다. 그리고 이 ‘구원에 대한 확실성’은 나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구원받았음에 대한 이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깨닫을 수 있는 것은 내가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 성령을 통해 허락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계시를 통하여 마지막 날 주께서 다시 오셔서 의로우신 심판을 행 하실 때,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받을 두려운 심판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우더라” (계. 21:12,15) 성도 여러분은 여러분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음을 확신합니까? 만약 확신했다면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바울의 메세지를 통해 각자 돌아보아야 할 점은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우리 믿음의 공동체는 서로 어떤 관계인가?’ 입니다. 우리가 차지도 덥지도 않는 그냥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종교 생활하는 자들이 우리라면 우리는 결코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정말로 우리에게 도전하고자 하는 것은 ‘너와 내가 주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었음을 성령을 통해 확신한다면 우리는 결코 미지근한 관계를 맺을 수 없다’라고 것입니다. 이 점을 깊이 묵상해 볼수록 그 문제의 중심에는 주의 사랑으로 섬김으로 본을 보였어야 할 먼저 된 자들이 본을 보이지 못할 결과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럼으로 우리 믿음의 공동체 가운데서 비롯되는 여러가지 문제의 중심에는 말씀과 주의 사랑으로 섬기고 본을 보여야 할 목회자인 제 자신이 그 역할을 제대로 감당치 못한 결과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v.1) 라고. 우리는 서로를 향해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자매’라고 서로를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우리는 주 안에서 서로를 세워주고 있으며, 같은 마음을 품고 있습니까? 바라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벼운 멍에를 함께 매고, 아름답게 동역 함으로 마지막날 주의 생명책에 기록된 서로의 이름을 기쁨으로 확인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