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h 8, 2020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Do not be anxious anything)

Preacher:
Passage: 빌립보서 (Phillippians) 4:6~7
Service Type: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Do not be anxious about anything)

3-8-20

본문말씀: 빌립보서 (Phillipians) 4:6~7

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Do not be anxious about anything, but in everything, by prayer and petition, with thanksgiving, present your requests to God.)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And the peace of God, which transcends all understanding, will guard your hearts and your minds in Christ Jesus.)

 

[설교 요약]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v.6a) 라고 우리 크리스챤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염려 대신에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우리가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v.6b)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우리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놀라운 ‘하나님의 평화’ (the peaceh of God) 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첫째, 하나님은 내가 바라는 데로만 응답하시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 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 이니라” (약. 4:2~3)고 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의 제목이 존재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둘째, 내 마음을 지켜지 못할 때 모든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화내고, 짜증내고, 염려하고 스트레스 받는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영으로 우리의 마음을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셋째, 내 마음을 지켜 주시는 것이 궁극적인 기도응답이기 때문입니다: 잠언서에서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 16:32)고 하나님은 잠언기자의 입술을 통해 선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신다는 것은 단순히 감정적인 것을 지켜 주실뿐 아니라, 진정으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참된 하나님의 평화가 성도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온전히 지키심으로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오직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성도 여러분의 삶 되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성도 여러분, 현재 마음에 쉽게 떠나지 않는 염려와 근심으로 인해 힘들어 하지는 않습니까? 전공이나 진로의 문제, 취업이나 재정적인 문제 그리고 인간관계로 인하여 힘들어 하고 염려하지는 않습니까?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도 이와 같은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염려와 근심의 파도는 피할수 없는 것인지 우리는 고민하게 됩니다. 그동안 제가 만난 여러 성도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이 문제가 많기 때문에 우리도 힘들어 할 수밖에 없고 염려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라고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이렇게 우리 크리스챤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v.6a) 라고. 염려 대신에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우리가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v.6b)는 것입니다. ‘가능한데로’, 혹은 ‘할 수 있는 데로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결코 아무것도 염려해서는 안된다’ (Do not be anxious about anything)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크리스챤은 어떤 존재이며, 어떤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자인지를 성령의 도우심으로 더욱 깨닫아 삶으로 실천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대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먼저 성도 여러분 각자에게 이렇게 질문하기 원합니다. “과연 우리 크리스챤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는 삶을 살수 있을 것인가?”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반응은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말하듯이 “전혀 염려하지 않고 살수 있다면 당연히 좋겠지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하고 여러분도 내심 반문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까? 제가 앞서도 말씀드렸 듯이 사도 바울이 우리 성도들에게 선포하는 오늘 말씀은 매우 도전적이고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 말씀이 될 수 있음을 저는 잘 압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말씀은 열매 맺고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말씀임과 동시에,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함으로 말미암아 영적 생활에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게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먼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라는 말씀을 잘못 오해하고 영적으로 그릇되게 적용하게 되는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자기최면’ (=마인드컨트롤) 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굳은 결심과 의지를 가지고 삶 속에서 발생하는 부정적인 생각과 염려를 모두 없애겠다는 굳센 마음입니다. 물론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렇게 자신을 설득시켜서 긍적적인 생활태도를 갖고자 노력하는 것을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가 여기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라는 뜻이 이렇게 ‘염려해서는 않 돼! 모든 게 잘 될 수 있을꺼야!’ 라고 스스로를 설득시키는 행위는 결코 아닌 것입니다. 또한 둘째는 신앙주의’ (believism) 와 같은 잘못된 가르침에 기인한 것입니다. ‘신앙주의’는 이 가르침을 창시한 샌디멘의 이름을 따라서 ‘샌디메니안 주의’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는 18세기 말경에 살았던 영국 사람인데,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데 있어서 감정적인 것은 필요 없고 구원받은 것 만을 강조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라는 <로마서 10:9>말씀을 근거로 우리가 필요한 것은 이것을 믿는 것이지, 우리가 어떻게 느끼냐는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은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이 밖에도 ‘신비주의’적으로 예수 믿고 구원받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영적으로 성장한다고 믿는 그릇된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믿습니다!!”라고 고백만 하면 성령을 통해 자동적으로 나의 모든 문제를 없애 주시고, 염려와 근심 없는 축복된 삶을 허락하신다는 식입니다. 믿음은 우리 인간의 ‘지정의’를 통한 전인격적인 하나님을 향한 반응임을 이들은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런 그릇된 가르침들이 기독교회 2000년 역사 가운데 매우 다양한 형태로 교단을 초월하여 다양하게 오늘도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바울 사도가 오늘 본문말씀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라고 하며 격려하고 도전하는 뜻일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행위’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근거’ (이유/원인)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크리스챤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을 분명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 6:31~32) 라고. 우리 크리스챤이 그 무엇보다도 먼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우리를 그의 자녀 삼으신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신다’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이것을 우리는 분명히 이해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이해했다면, 둘째로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실 뿐 아니라, <그 선하신 뜻대로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 ~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시고 나서, 이어서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마. 7:7~8) 여기서 주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도전하시는 것은 단순히 적극적인 사고방식과 생활태도를 독려하는 차원의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그 핵심은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된 우리 크리스챤에게 그의 기쁘신 뜻을 따라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 7:11)라고 주님은 도리어 우리에게 반문하십니다. 이것이 왜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하는지에 대한 근거요 출발점 인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구하는 그의 자녀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 길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살펴볼 것은 이것입니다. 사도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6a) 라고 도전하고 나서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6b)고 선언합니다. <6절 후반부>를 <새 번역>에서는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진술은 일반적인 논리의 차원에서 볼 때는 잘 맞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아뢴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것을 전제하는데, 여기서는 응답 받기도 전에 먼저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라고 격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6절 전반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라고 사도가 말한 이유에 대해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염려와 구하는 모든 것을 이미 알고 계실 뿐 아니라, 그 선하신 뜻데로 이뤄어 주시길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6절 후반부>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 크리스챤은 내 바라는 것이 이뤄지기도 전에 먼저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바라는 것을 그 선하신 뜻데로 이뤄 주신다는 분명한 믿음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하나님을 신뢰함에 기초하여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모든 일을 기도와 간구로 우리의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뢸 때, 놀라운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 (v. 7a)“사람이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평화” 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주실 것” (v. 7b) 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오랜 기간동안 이 <7절>말씀을 묵상하면서 “왜 하나님은 ‘내가 간절히 기도하는 기도제목을 들어 응답해 주신다’ 라고 말씀하지 않고, 나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것이라고 만 말씀 하실까?” 하고 궁금하게 생각 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은 내가 바라는 데로만 응답하시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나의 욕심과 잘못된 동기로 인해 내가 잘못 구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 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 이니라” (약. 4:2~3)고 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의 제목이 존재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은 올바른 동기로 간구할 수 있도록 마음과 생각을 먼저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역설적으로 내 마음과 생각이 지켜지지 못할 때 얼마나 수없이 많은 문제들이 발생되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화내고, 짜증내고, 염려하고 불안해하고 스트레스 받는 이 모든 것이 내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욱 심각한 것은 내 마음이 문제의 중심인 것도 내가 분명히 인식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마음의 생각을 통제하지 못하고 끌려 다닌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이 토로한 것과 같이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롬. 7:19) 라는 것입니다. 이런 나의 부조리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 무엇보다도 나의 마음과 생각을 붙들어 주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내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신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나의 간구가 이루어지는 영적인 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 본문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시는 것은 좋은데, 내 바래는 것도 응답해 주신다고 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 할수록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시는 것이 진정한 기도응답이요, 영적 승리의 비결’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 16:32)고 하나님은 잠언기자의 입술을 통해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통해 나의 마음판에 그의 율법을 새겨 주심으로 나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성령을 통해 누리게 되는 <하나님의 평화>인 것입니다.

이 사실이 빌립보서를 통해 사도가 그토록 강조해서 8번씩 “기뻐하라” 고 주장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사도가 그 로마의 감옥안에서, 모든 핍박과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진정한 기쁨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그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바울이 경험했고, 초대교회 성도들과 수없이 많은 신실한 성도들이 경험했던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고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오늘 말씀의 중심단어는 ‘하나님의 평화’ (the peace of God)입니다. 이 하나님의 평화가 있었기에 사도 바울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고, 영적 승리와 풍성한 열매를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이런 마지막 질문을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의 평화를 누릴 수 있을까요?” (How are we fulfilled with the peace of God?) 사도는 감사하게도 이런 우리의 질문에 이렇게 자상하게 답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빌. 4:9)라고. 사도 바울이 자신의 모든 삶을 빌립보 성도들에게 숨김없이 열어 보여주고 가르쳐준 바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영적 스승 사도 바울에게서 그동안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각자의 삶 가운데 적용시켜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평화의 하나님이 반드시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이라고요.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화가 사도 바울 한 사람 뿐 아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넘치게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과연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습니까?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여러분이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것임을 사도 바울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아니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사도의 입술을 통해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의 이뤄질 수 없는 비현실적인 희망사항이나 비성경적인 가르침에 의해서가 아님을 우리는 분명히 이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그의 자녀가 어떠한 염려와 근심가운데 사로잡히기를 원치 않으시고, 자신의 평화를 주심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지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이 줄 수도 빼앗을 수도 없는 참된 하나님의 평화가 성도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온전히 지키시고 다스려 나가시길 소망합니다. 그 하나님의 평화로 말미암아 참된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성도 여러분의 삶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