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h 15, 2020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For I have learned to be content)

Preacher:
Passage: 빌립보서 (Phillippians) 4:11~12
Service Type: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For I have learned to be content)

3-15-20

본문말씀: 빌립보서 (Phillippians) 4:11~12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I am not saying this because I am in need, for I have learned to be content whatever the circumstances.)

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I know what it is to be in need and I know what it is to have plenty. I have learned the secret of being content in any and every situation, whether well fed or hungry, whether living in plenty or in want.)

 

[설교 요약]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마무리해 가면서 “~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다)” (v.11) 라고 고백합니다. 어떤 성도들은 오늘 사도가 전하는 말씀을 ‘우리 크리스챤은 물질을 탐하지 말고 검소하고 절약해서 살아야 한다’ 라고 이해합니다.

물론 절약하고 검소하게 살아가는 것은 크리스챤의 귀한 덕목일수 있지만, 오늘 말씀의 요점은 아닙니다. 오늘 말씀의 요점은 ‘크리스챤의 성숙’ (the maturity of Christians) 입니다.

사도는 빌립보 성도들이 보내온 재정적 후원을 기쁨으로 받았지만 그 이유는 선물을 구함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성도들의 성숙됨과 하나님께서 그들의 향기로운 제물을 기쁘게 받으시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그 풍성한대로 그들의 모든 쓸 것을 채워 주실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명 설교자, 척 스윈돌 목사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어떻게 하면 영적 거인 사도 바울이 보여준 그 깊은 영적 성숙으로 점점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인지를 우리 각자의 삶에서 <3가지 분야>에 적용해 볼 수 있다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내면을 보라 그리고 내어 보내라’ (look within and release)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의 내면 가운데 영적 성장을 가로막는 그 무엇은 없는지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더 강하게 나를 붙들고 있는 것이 있음을 내가 인식했다면, 그것을 과감하게 ‘내어 보내라는 것’ (let it go) 입니다.

둘째, ‘주위를 보라 그리고 반응하라’ (look around and respond)는 것입니다: 사도는 빌립보 성도들이 자신과 동역자들을 향해 보여준 관용과 사랑을 섬김을 <빌립보 4장>에서 잘 설명합니다. 그들은 ‘동정심’ (compassion/ v.14)과 ‘재정적 관대함’ (financial generosity/ v.16) 그리고 ‘희생적 헌신’ (sacrificial commitment/ v.18)을 통해 성숙되게 반응했던 것입니다.

셋째, ‘위를 보라 그리고 기뻐하라’ (look up and rejoice)는 것입니다: 위를 바라볼 때 나를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일들을 기억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요. 7:37~38)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의 충만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바라기는 사도 바울이 누렸던, 그리고 수없이 많은 신실한 성도들이 누렸던 자족함을 통한 기쁨의 삶을 생수의 강같이 누리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빌립보서를 생각하면 떠 올리게 되면 대표적인 말씀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오늘 본문말씀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뿐 아니라 오늘 말씀은 빌립보서를 마무리해 가면서 사도가 내리는 결론부분에 해당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다)” (v.11)는 것입니다. 사도는 고백하기를 “내가 ~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v.12)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말씀을 우리가 유의해서 잘 살펴보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이 말씀 가운데 사도가 빌립보 성도들을 향해 8번씩이나 “기뻐하라”고 외칠 수 있었던 근거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냥 말만 그렇게 감동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극심한 고난과 핍박의 환경 가운데서, 그리고 그가 빌립보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 이 당시 로마의 감옥에서 조차도 그 부정적 환경을 초월한 넘치는 기쁨을 누리는 비결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는 본문이 바로 오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가 이 모든 형편과 환경 가운데서 자족할 수 있는 법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풍부함 뿐 아니라 어떤 궁핍함에도 적응(처)할 수 있는 법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우리 각자를 되돌아보며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의 비결을 배워 나가는 모든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사실 오늘 본문이 쓰여지는 직접적인 동기는 바로 앞 절, <빌. 4:10>에 나와 있습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v.10)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정황으로 살펴볼 때, 사도는 지금 빌립보 성도가 사도 바울과 그 동역자들에게 복음사역을 위해 보내고자 하는 <재정적 후원>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가 사용 언어로 말한다면, <선교 헌금> 혹은 <선교 후원금>일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불리어 지던 간에 사도는 빌립보 성도들이 깊은 사랑과 믿음의 동기로 함께 모아 보내온 후원금을 기쁨과 감사로 응답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가 <빌. 2장>에서 언급 했 듯이 빌립보 성도들은 헌신된 일꾼 ‘에바브로디도’ 를 그에게 보내어 그 쓸 것을 도왔을 뿐 아니라 (빌.2:25/ 4:18), 이미 사도의 복음사역 초기에서부터 그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 그와 주고 받은 일에 협력한 교회가 그들 밖에 없었고 (빌. 4:15), 또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 그들이 사도의 쓸 것을 몇 번씩 후원한 사실을 그는 편지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구체적인 사례를 언급하는 이유는 그들에 대한 순수한 감사와 사랑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사도는 결코 물질적 선물을 계속 받고자 함이 아니라, 그들의 영적 성장과 그들이 하나님께로 부터 받게 될 풍성한 열매 때문에 기뻐한 것입니다. “나는 선물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이롭게 될 풍성한 열매를 구하는 것입니다” (빌. 4:17/ 표준 새번역) 라고. 왜냐하면 그는 모든 것을 받아서 이미 풍족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빌. 4:18). 단지 그가 기뻐하는 것은 그들이 드리는 향기로운 제물,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물’로 인한 것입니다 (빌. 4:18). 이것은 그들의 물질 뿐만 아니라 헌신된 삶이요, 주 앞에 성숙해 감으로 산제사로 드려진 삶인 것 입니다.

21세기 명 설교자 척 스윈돌 목사는 오늘 본문을 설교하면서 그 주제를 ‘성숙’, 즉 ‘크리스챤의 성숙’ (the maturity of Christian)이라고 정했습니다. 과연 우리가 크리스챤으로 성숙해 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그것은 단순히 성경구절을 더 많이 안다거나 교회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이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숙되어 가는 크리스챤으로서 주님을 증거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더욱 열심을 내어야 하는 것이 물론 당연 하겠지만, 역설적으로 여기에서 제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불편한 진실 한가지는 오늘날 불신자들에게 전도의 문이 막히는 가장 큰 걸림돌은 다름아닌 우리 <크리스챤 자신>임을 우리는 아프게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기적이고, 성숙되지 않는 인격으로 인해 불신자의 마음의 문이 닫혀지고, 그 복음까지도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챤은 ‘살아서는 세상의 모든 이득을 차지하는 존재일 뿐 아니라, 죽어서는 천국을 보장 받으려는 약싹 빠른 자!?) “너처럼 믿느니 않 믿겠다”는 것입니다. “너나 잘 믿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복음전파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그 어떤 환경적인 장벽이나 위협이 아니라, 바로 크리스챤 자신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지 못할 것이요 ~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4,16) 우리 주님은 그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칭하시고,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서 비췸으로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가지 질문은 ‘어떻게 우리는 빛을 비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빛은 세상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비추는 것이요, 주님을 증거하고 드러내는 것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주의 제자된 여러분과 저에게 “~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도전하여 말씀 하셨음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우리가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추기를 원하시는 데 그 빛은 세상의 빛 되신 주님 자신의 빛 뿐 아니라, 또한 우리 각자가 가진 빛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너희 착한 행실” (your good deeds) 이라고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주께서 말씀하시는 ‘착한 행실’일까요? 이것이 윤리와 도덕적으로 깊은 수준의 칭찬받을 만한 행위라든가, 철학적으로 높은 이상을 향한 고매한 행위를 뜻하는 것일까요? 물론 그것도 포함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은 무엇보다도 ‘가난한 심령’이요, ‘애통하고 온유한 마음’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청결한 마음’이자 ‘평화를 가져오는 삶’이라고 주님은 그 앞 절 <마. 5:1~9>에서 밝히셨습니다. 어떤 드러난 행위 이전에 심령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영적 성숙>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이제 마무리해 가면서 “내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형편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v.11/ 현대인의 성경)라고 힘있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는 지금 단지 물질적으로 풍요로우냐 혹은 궁핍하냐를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지금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in whatever the circumstances)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풍요하든지 궁핍하든지 관계없을 뿐 아니라, 몸이 건강하든지 병약하든지, 혹은 사람과의 관계성이 어떠하든지, 심지어 그가 당하는 핍박과 고난이 얼마나 극심하든지 여부에 상관없이 이 모든 상황 가운데서 스스로 만족하는 비결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앞서도 언급 했드시 척 스윈돌 목사는 오늘 본문 말씀의 주제를 ‘크리스챤의 성숙’이라고 정의하고 나서, 그렇다면 우리 자신도 어떻게 하면 영적 거인 사도 바울이 보여준 그 깊은 영적 성숙으로 점점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인지를 우리 각자의 삶에서 <3가지 분야>에 적용해 볼 수 있다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주님과의 관계를 성숙시킴으로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How are we able to grow up in our relationship with Christ into our lives?) 그것은,

첫째, ‘내면을 보라 그리고 내어 보내라’ (look within and release)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의 마음 가운데 영적 성장을 가로막는 그 무엇은 없는지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더 강하게 나를 붙들고 있는 것이 있음을 내가 인식했다면, 그것을 과감하게 ‘내어 보내라는 것’ (let it go) 입니다. 주님께 달려와 그 앞에 꿇어 앉아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막. 10:17)라고 진지하게 묻던 부자 청년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때 주님은 그를 사랑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막. 10:21) 라고.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청년은 그가 가진 많은 재물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자 청년에게 있어서 주님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물질’이었습니다. 그리고,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세례를 받기 전까지 베드로에게 있어서 그것은 ‘고난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장애물은 내가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으로 영적 성장을 이루어 가는 것을 가로막는 주범이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주위를 보라 그리고 반응하라’ (look around and respond)는 것입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필요를 다 해결해 나가고 있다고 단정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각자는 우리 이웃의 필요에 대해 반응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의 필요에 대해 보여준 관용과 사랑의 섬김은 우리의 좋은 본이 됩니다. 앞서도 말씀 드렸드시, 사도가 빌립보 성도들의 여러가지 자신을 도운 사례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칭찬과 감사를 아끼지 않는 이유는 그가 물질적 후원을 계속해서 받기 원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얼마나 성숙된 크리스챤으로 성장해 가고 있는가를 사도가 영으로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믿음으로 드린 성도들의 착한 행실,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향기로운 제물’로 인해 그들의 모든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풍족히 채워 주실 것을 사도는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성도의 성숙: 1) 동정심 (compassion/ v.14~15)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 하였도다” (v.14) 2) 재정적 관대함 (financial generosity/ v.15~17)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번 두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3) 희생적 헌신 (sacrificial commitment/ v.18) “~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셋째, ‘위를 보라 그리고 기뻐하라’ (look up and rejoice)는 것입니다: 시간을 내어 위를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기억 (묵상/확인)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신 그 풍성하신 은혜를 확인해 나감을 통해 진정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시편에서 다윗은 하나님 아버지의 신실하신 은혜와 돌보심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로다” (시. 121:1~2). 오늘 본문을 마무리해 가면서 제가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기 원하는 것은 우리는 사도가 빌립보서 전제를 통해 끝까지 강조하는 주제를 우리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빌립보서의 주제는 ‘성도의 기쁨’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았다는 뜻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죽었던 나를 살리셨다는 뜻입니다. 과거의 나는 죽고, 내 안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우리 크리스챤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 사실을 묵상하면 할수록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얼마나 고상한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를 깨닫으면 깨닫을수록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동참하기를 간절히 힘썼던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사도가 세상이 줄 수도 없는 기쁨, 세상이 빼앗을 수도 없는 기쁨의 사도가 되었는지를 이해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고백하듯이 어떻게 사도가 물질적으로 풍족하든지 궁핍하든지, 건강하든지 병들었든지, 혹은 핍박과 고난이 얼마나 심각하든지 관계없이 스스로 만족하고, 영적 유연함과 믿음의 확신 가운데서 승리하고 열매 맺는 삶을 살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이렇게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지식의 풍성함을 이해하면 할수록 상상을 초월한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족과 확신 가운데 넘쳐나는 감사와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명절 끝날 서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요. 7:37~38) 성도 여러분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옴을 날마다 경험하고 있습니까? 바로 주님을 믿는 신자들이 받을 약속의 성령의 충만을 받음으로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치는 주의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약속하신 성령의 충만을 넘치게 받았습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감사와 기쁨으로 놀라운 자족의 비결을 주님과의 깊어지는 관계 속에서 성령의 은혜로 날마다 누려 나갔습니다. 이제는 여러분과 저의 차례입니다. 이런 만족과 기쁨을 날마다 주님 안에서 풍성히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