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y 2, 2023

“게으름의 문제” (The Problem Of Laziness)

Preacher:
Passage: 잠언 (Proverbs) 26:14~15
Service Type:

“게으름의 문제”

(The Problem Of Laziness)

7-2-23

본문말씀: 잠언 (Proverbs) 26:14-15

14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 (As a door turns on its hinges, so a sluggard turns on his bed.)

15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와 하느니라 (The sluggard buries his hand in the dish; he is too lazy to bring it back to his mouth.)

[설교 요약]

저는 지난 시간, ‘분노의 문제’에 이어 이번 주에는 ‘게으름의 문제’에 대해 성경적인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잠언서 본문에서 게으른 자는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 돌듯이, 침상 위를 돌고’ (v.14),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에 올리기를 괴로와 한다’ (v. 15)고 그 마음상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잠언서 기자는 나태하고 게으른 자의 모습을 극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대부분은 이처럼 심각한 ‘게으름 병’에 걸리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성경은 우리에게 ‘게으르지 말라’고 분명하게 선언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왜 게으름이 문제라고 생각합니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성경이 우리에게 던지는 중요한 도전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혜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혜로운 삶의 대표적인 가르침이 <에베소서 5장>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무엇이 지혜로운 삶인지를 영적으로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혜의 삶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할까요? 그것은

첫째, “세월을 아끼는 것”입니다: 인간의 유한한 시간 속에서 지혜롭게 살아가는 가장 으뜸되는 것으로 사도는 “세월을 아끼라” (Redeeming the time) (엡. 5:16a)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세월을 아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재능과 기회를 낭비하지 않고 사용함’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25:14-30).

둘째. “잘못된 열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잘못된 열심>이 얼마나 심각하게 예수님과 그의 교회를 박해하며 (행. 22:3-4),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할 수 있는지를 (롬. 10:2-3) 사도 바울은 간증과 동족 유대인의 사례를 통해 설명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과 시간과 기회를 낭비하지 않고 잘 사용하기 위해선, 지혜를 통해 이와 같은 ‘잘못된 열심의 늪’에 빠지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혜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영, ‘성령님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도가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5:18)고 도전하는 이유입니다. 지혜의 영이신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세월을 아낄 수 있으며,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을 수 있고, 그리하여 주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 모두 성령의 충만하심을 통해 세월을 아껴 주신 재능과 시간을 충성되게 사용하고, 잘못된 열심에 빠져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는 지혜로운 삶의 열매를 맺어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지난 시간, ‘분노’라는 주제를 통하여 그 문제점과 성경적 가르침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흔히 ‘분노’라는 주제는 신앙과 무관하다고 간주하는 성도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살펴보았듯이 분노는 분노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귀로 틈을 주어 죄짓게 하며, 급기야 자신과 상대의 삶과 서로의 관계를 파괴하는 불행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에 그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분노’ 못지 않게 우리의 삶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게으름’이라는 주제에 대해 성도 여러분과 함께 말씀을 통하여 묵상하길 원합니다. 이 ‘게으름의 문제’는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분노의 문제’만큼이나 아니 더욱 강력하게 삶 전체에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게으름은 단순한 습관이나 삶의 방식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로 인하여 신앙 전체에 심각한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통하여 나 자신의 ‘게으름의 문제’가 무엇인지르를 깨닫고, 주의 말씀으로 이 문제를 극복하고 지혜롭게 다스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잠언서 기자는 ‘게으른 자는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 돌듯이, 침상 위를 돈다’ (v.14)고 고발합니다. 심지어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에 올리기를 괴로와 한다’ (v. 15)고 그 마음상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제가 더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나태하고 게으른 자의 모습을 극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잠언서 26장>에서 기자는 말씀을 시작하면서, 앞부분 (1-12절)에서는 ‘미련한 자’, 중간부분 (13-16절)에서는 ‘게으른 자’ 그리고 뒷부분 (17-28절)에서는 ‘속이는 자/다투는 자/거짓말하는 자’를 고발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들은 본질상 한 사람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미련한 자가 또한 게으른 자요 그는 남을 속이고, 다툼을 일으키고 밥 먹듯이 거짓말을 일삼는 자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잠. 26장>은 ‘누가 게으른 자인가?’에 대한 매우 구체적인 묘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게으르고 나태한 자를 언제나 엄중하게 꾸짖고, 우리 성도들에게 그와 같은 자의 삶을 경계할 것을 경고함을 보게 됩니다.

사실 일반화해서 말해볼 때, 우리 교회에 속한 성도들 중에 게으름으로 인해 자기가 하는 학업이나 연구 혹은 직장일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할 만큼 문제를 가진 멤버는 적어도 없지 않은가? 하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 각자가 자신의 주어진 일을 감당한다는 면에서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과연 ‘게으름’이라는 주제에 있어서 자유한가?’라고 질문했을 때 그렇지 못함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모든 성도는 말씀이라는 거울을 통해 각자 자신을 객관화해서 비춰 (=점검해)보아야 한다는 강한 필요성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가 자신을 조용히 되돌아볼 때 이런 나태하고 게으른 영역이 있음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 안에 이런 게으름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간단히 말하면, ‘우리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고, 우리는 ‘제한된 시간과 공간과 능력의 한계’를 가지고 살아가다 보니, 어디엔 가는 나태함과 부족함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저는 우리 각자는 본문의 예와 같이 <노골적이고 총체적인 게으름>보다는 각자의 판단에 의해 <선택적으로 게으름>을 적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구체적인 예로서는 운동이나 activity 그리고 사람과의 다양하게 교제하는 등의 활동적인 것을 좋아하는 성향의 사람들은 조용히 책을 읽거나 사색하고 혼자서 자신의 내면을 살찌우는 것에 부족함이 있음을 봅니다. 반대로 주로 혼자서 시간을 보내며 자신의 내면을 충실하고자 하는 성향의 사람들은 보다 폭넓은 대인관계를 이루며 다양한 형태의 외적 경험을 누리지 못하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 밖에도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사람들은 인간의 직관적이고 감성적인 면을 무시하기 쉽고, 예술과 문학적 삶과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곧잘 수학적 논리와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균형 잡힌 삶을 추구하는데 게으른 경향 (실패)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여러 형태의 관점에서 자신을 비추어 봤을 때, 여러분은 스스로 ‘나는 비교적 활동성과 내면성을 균형 있게, 혹은 과학이나 논리적인 사고와 예술적이고 문학적인 감성이 비교적 조화롭게 발전하고 있다’고 스스로 평가하는 분도 있을 것이고, ‘나는 외향성이나 내향성 중에서 한쪽으로, 과학 혹은 예술에서도 외골수적으로 한쪽으로만 많이 치우쳤다’고 자신을 평가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와 같은 삶의 다양한 면에 있어서 어느 한 면이 부족한 것을 우리는 ‘게으르다’ 혹은 ‘나태하다’고 부르기 보다는 <성향이나 기질 혹은 취미>가 서로 다르다고 우리는 보통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시간 ‘분노의 문제’에 대한 메시지를 시작하면서, 그 사람의 성격이 급하거나 느긋한 것 그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없듯이, 우리가 살아가는 다양한 방식에 있어서도 대부분의 영역에서는 ‘부지런하다 거나 게으르다’는 것보다 ‘나는 이런 것을, 너는 저런 것을 더 관심가지고, 더 취미가 있다’고 서로의 다양성 (다름/차이)을 피차 인정하는 측면이 큼을 저도 잘 압니다. 이런 점을 감안해 볼 때’ 그렇다면 ‘무엇이 게으름이 가져오는 진정한 문제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한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지점이 성경말씀을 통하여 이 ‘게으름’의 이슈에서 우리 크리스챤을 복되고 열매 맺는 삶으로 인도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될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은 “왜 우리 성도는 게을러서는 안되는가?”에 대한 질문에 성경은 분명하게 대답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왜 게으름이 문제라고 생각합니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성경이 우리에게 던지는 중요한 도전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저는 바로 ‘지혜’라고 믿습니다. 성경은 ‘지혜를 가지라’고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그분의 자녀들에게 강력하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분노’에 대해 나누면서 상당히 많은 구절의 말씀이 <잠언>말씀임을 볼 수 있었는데, 오늘 ‘게으름’에 관련된 것도 <잠언>말씀에 상당수 있음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그 근본 이유는 <잠언서>가 대표적인 ‘지혜를 주제로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잠언서>뿐만 아니라, <전도서> <시편> 그리고 신.구약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은 성경의 저자들에게 감동을 주셔서 지혜의 중요함을 도전하시고 일깨워 주심을 보게 됩니다. 제가 조금 전에 ‘게으름의 문제점을 이해하는 출발점이 지혜’라고 했는데, 이것이 오늘 우리 각자의 게으름에 대한 바른 시각을 열어 나가야 하는 지점인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대표적인 성경말씀의 하나가 <에베소서 5장>말씀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5장>에서 에베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마무리해 가면서,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임으로 그 자녀의 신분에 합당하게 어둠에 속한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을 버리고,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1~8절)고 도전합니다. 그리고 나서,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고 선포하고, 이를 위하여 영적인 깊은 잠에서 깨어나서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라고 도전합니다 (13~14절).

그렇다면, 어떻게 행하는 것이 빛의 자녀에 합당한 삶이며, 열매 맺는 삶인지를 사도는 이렇게 밝힙니다. “그런 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5~16)라고. 사도는 빛의 자녀에 합당하게 행하여 열매 맺기 위해서는 먼저 ‘지혜 없는 자처럼 말고, 지혜 있는 자 같이 행하라’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성실하고도 부지런히 행하는 것은 바로 오늘 말씀의 주제가 되는 ‘게으름’을 물리치는 직접적인 방법이지만, 그것보다도 우선적으로 우리 크리스챤이 힘써야만 하는 중요한 선행조건이 있는데 그것이 ‘지혜롭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지혜롭게 행하는 것입니까?’

그것을 사도는 먼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행하라)”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부지런하게 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떻게 행할 것을 주의해서 자세히 살피는 <자신을 성찰>하는 태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이 지혜로운 태도를 통해 ‘세월을 아끼게 되고,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고, 주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게’ 되는 자녀의 합당한 삶을 시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하고 성실한 하나님의 빛된 자녀의 삶의 시작이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살피고 분별해 나가는 지혜로운 성찰의 태도’에서 비롯된다면, 이와 같은 성경에서 제시하는 그 지혜의 삶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할까요? 그것은

첫째, “세월을 아끼는 것”입니다: 앞서도 살펴보았지만, 인간의 유한한 시간 속에서 지혜롭게 살아가는 가장 으뜸되는 것으로 사도는 “세월을 아끼라” (Redeeming the time) (엡. 5:16a)고 선언합니다. 왜냐하면 ‘때가 악하기 (때문)’ (because the days are evil) (엡. 5:16b)입니다. 문제는 사도 당시 2000여년 전만 악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악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더욱 더 악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 곧 ‘시간’을 아끼는 것이 지혜롭게 살아가는 핵심이라면 어떻게 사는 것이 세월을 아끼는 삶일까요? 물론 이 한가지 질문을 가지고서도 오늘 한번의 설교로도 충분치 않을 많은 성경의 가르침을 나눌수 있겠으나, 저는 그 중심에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성경의 가르침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말씀의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 관련된 말씀입니다 (마. 25:14~30). (간략하게 스토리 소개!!) 여기서 주께서 우리들에게 도전하시는 핵심은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분량에 따라 주신 ‘달란트/ 선물/ 재능’을 충성되고 성실하게 잘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을 달리 말하면, 우리의 짧은 인생 가운데 <주신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존 맥아더목사는 이 ‘달란트 비유’를 설교하면서, <우리 크리스챤은 한편에서는 ‘수동적으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존재’이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적극적으로 맡기신 달란트를 충성되게 사용해야 하는 존재’라야 한다>고 도전한바 있습니다.

제가 중학교때 배웠던 빨간책 ‘기본영어’라고 있었는데 거기에 이런 영어 격언이 있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Make hay while the sun shines!” 이것을 번역하면 ‘햇빛이 비췰 동안 건초를 말려라’라는 것으로 ‘기회를 잘 활용하라’는 뜻입니다. 제가 짧지 않은 인생을 되돌아봤을 때 지혜로운 삶은 ‘세월을 아끼는 삶’이요, 그것은 곧 ‘주어진 기회를 낭비하지 않고, 잘 활용하는 삶’임을 깨닫습니다. 물론 젊은 청년은 때로 시행착오도 겪고, 실수도 하면서 많은 것들을 배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모든 일에서 시행착오를 반복하고, 시간을 낭비하면서 인생을 배우기에는 안타깝게도 우리의 인생은 너무도 짧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세월을 낭비하지 않고, 나에게 허락된 기회를 놓치지 않을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둘째. “잘못된 열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는 것이 지혜롭게 살아가는 핵심인데, 이 지혜가 진정한 가치를 발휘하려면 ‘우리를 잘못된 열심에서 건져내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보면, 게으르고 나태한 삶의 태도는 말할 것도 없이 책망을 받아 마땅한 모습이지만, 그것 못지않게 잘못되고 위험한 태도는 ‘잘못된 열심’임을 깨우쳐 줍니다. 저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예수께서 이방민족의 사도로 택하셔서 충성되게 복음사역에 쓰임 받게 하신 사도 바울의 과거의 모습인 것입니다. 곧 예수님 만나기 전의 청년 사울의 모습입니다. 그는 나중에 자신의 이런 잘못된 모습을 이렇게 회상하고 부끄럽게 고백한 바 있습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히 있는 자라.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사도행전 22:3~4)라고.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만날 때까지, 하나님께 대한 잘못된 열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대적하고 핍박하는 자리’(행. 9:4)에 까지 떨어졌던 것입니다.

한편 로마서에서 바울은 자기동족 이스라엘의 잘못된 열심, (곧 자신이 과거 청년 사울이었을 때 범했던 잘못된 열심)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롬. 10:2~3) 여기서 사도는 ‘잘못된 열심’의 핵심을 지적합니다. 올바른 성경지식에 근거한 열심이 아니라, <‘자기의’를 세우고자 하는 ‘높아진 마음’에 근거함으로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음>이 잘못된 열심의 골자라는 것입니다. 청년 사울이나, 예수님을 배척한 이스라엘민족 뿐 아니라,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열심으로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않는 비극적인 삶을 사는지 알수 없습니다. 지금 성도 여러분이 힘쓰는 그 열심은 과연 어떤 열심입니까?

셋째,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시작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1:17~19)고 성도들을 향한 간구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간구의 골자는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충만하게 역사하실 때, 우리는 비로소 “어두웠던 영의 눈을 밝히 뜨고서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참된 지식에서 자라나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또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깨닫을 수 있는 영적 눈이 밝혀지게 된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게으르거나 나태하지 않고 도리어 세월을 아껴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또한 잘못된 열심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 결론적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허락하신 축복된 길은 ‘성령님의 충만’을 받는 것임을 저는 믿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지혜의 영’이시요, ‘하나님의 그 깊은 것까지도 깨닫게 해주시는 계시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지혜의 말씀의 금광이라 할 수 있는 <잠언서 9장>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잠. 9:10)고 선언함을 봅니다. 만약 우리 인간의 모든 지혜와 지식을 총동원해서도 우리가 결국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그분을 경외하지 못한다면 그 지혜는 죽은 지혜다’라고 성경은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로 우리를 이끄시고, 그 거룩하신 분을 아는 명철에서 자라도록 함께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우리 크리스챤이 반드시 ‘성령충만’을 구해야 하고, 또한 받아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5장 18절>에서 우리에게 도전하듯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18)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충만을 받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세월을 아낄 수 있으며,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을 수 있고, 그리고 주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순간에도 자신 앞에 놓인 밝은 미래를 꿈꾸며 게으름과 나태함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열심히 부지런히 앞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까? 바라기는 여러분 한사람 한 사람 주님 안에서 꿈꾸는 소망스러운 삶이 열매 맺으시길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 성도 여러분들이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것 한가지는 ‘열심 이전에 먼저 지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혜는 오직 성령의 충만을 통해서 누릴 수 있는 지혜요, 세월을 아껴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를 잘 사용하고, 잘못된 열심에 빠져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는 지혜인 것입니다. 이런 성령의 은혜로 모든 게으름을 물리치고, 충성되고 아름다운 삶의 열매를 맺어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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