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e 25, 2023

“분노의 문제” (The Problem Of Anger)

Preacher:
Passage: 에베소서 (Ephesians) 4:26~27
Service Type:

“분노의 문제”

(The Problem Of Anger)

6-25-23

본문말씀: 에베소서 (Ephesians) 4:26~27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In your anger do not sin”: Do not let the sun go down while you are still angry,)

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and do not give the devil a foothold.)

[설교 요약]

            사도 바울은 오늘 에베소 말씀을 통해 분노가 성도들에게 미치는 강력한 영향력에서 우리들을 경계하고 또한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제 ‘분노’(anger)는 사전적 의미에서 볼 때 “몹시 언짢거나 불쾌한 느낌”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분노’라는 개념은 성경에서 볼 때 긍정적으로도, 그리고 부정적으로도 쓰여 짐을 보게 됩니다. 먼저, 분노의 ‘긍정적’인 예로써,

  • ‘하나님의 진노하심’입니다: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롬. 1:18)라고 선언합니다. 죄가 없으신 거룩하신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죄로 인해 진노하십니다.
  • ‘예수님의 의분’입니다: 주님은 성전을 더럽히는 장사꾼들의 상을 엎으시고 짐승들을 채찍으로 쫓아 내심으로 의로운 분노를 나타내심을 봅니다 (요. 2:13~17)

한편 분노의 ‘부정적’인 면을 우리는 주위에서 수없이 보게 되는데. 그렇다면 왜 분노가 우리에게 매우 위험할까요?그것은

첫째, “이성적인 사고를 마비시키기” 때문입니다: 잠언서 기자의 평가와 같이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킴)” (잠언 15:18)을 봅니다. 분노가 난 상태에서는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챨스 스탠리 목사는 우리에게 화가 낫을 때 행하지 말 것, 2가지를 조언합니다.

  • 화가 날 때 중요한 결정을 하지 말라는 것이요,
  • 화가 난 상태에서는 남을 평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 “연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분노는 어느날 갑자기 일어나는 감정이 아니라,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속성이 있습니다. 특별히 권위적, 강압적 혹은 폭력적인 가정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커서도 이로 인한 ‘분노조절’에 문제를 겪게 됨을 봅니다. 그럼으로 사도 바울은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엡. 6:4)고 권면합니다.

셋째, 분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시키기” 때문입니다: 분노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시키는 것은 무엇보다도

  • <분노는 하나님을 근심시킵니다>: 카인은 자신의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생 아벨을 시기하고 하나님께 분을 품으며 동생을 죽이는 악을 저지릅니다 (창. 4장). 인간의 분노가 가져오는 죄악은 하나님을 깊이 근심케합니다.
  • <분노는 하나님의 ‘축복’을 가로막습니다>: 분노로 인한 우리의 죄악된 심령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킴으로, 자녀에게 허락하신 은혜와 축복을 누릴수 없게 됩니다.

바라기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정서적 장애이자 영적 장애인 ‘분노’를 다스려 나감으로 자유와 만족을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여러분은 성격이 느긋한 편입니까? 아니면 성격이 마른 편입니까? 매사에 이해심이 많고 화를 잘 내지 않는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입니까? 아니면 성격이 다혈질적이고 화가 나면 잘 참지 못하는 편입니까? 제가 질문하는 점은 어떤 성격이 좋고 어떤 성격이 나쁘다는 식의 ‘흑백논리’가 아니라, 우리 모두는 외모와 기질이 다르고 다양한 만큼 당연한 서로의 성격 차가 있음을 전제로 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성격과 기질은 각자가 다를 수 있지만, 문제는 결국 ‘분노’로 이어지게 되는 것인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이 분노는 우리 성도들이 매우 경계해야 할 문제임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분노는 그 당사자 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의 삶까지도 파괴시키고 깊은 상처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정신적 혹은 영적 장애요인임을 우리는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성경에서 교훈하는 ‘분노’에 대한 가르침을 묵상하며 우리 각자의 삶에 지혜롭게 적용하는 유익한 시간되기 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의 말씀을 시작하면서 우리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의 몸이 되어 하나로 연결된 존재가 되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를 하나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영,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 각자는 받은 은사를 다양한 모습으로 교회를 섬겨 나가며, 함께 그리스도를 머리로 자라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v.1~16).

그리고 나서 사도는 과거와 현재의 우리 존재가 어떻게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즉 <옛사람>과 <새사람>이라는 개념 (용어)를 통해서 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잠시 살펴보았지만, ‘옛사람’ (the old man)은 ‘첫 사람 아담에 속한 사람’으로써 ‘아담으로부터 물려 받은 원죄로 인하여 죄와 사망의 힘 아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음으로 자신을 방탕에 맡기고 모든 욕심을 행하는 자’ (v.17-19)입니다. 한마디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새사람’ (the new man)은 이와 같이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린 사람’입니다 (v.22). 바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는 (존재)” (v.24)가 우리 거듭난 성도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가 강조하는 것은 우리 크리스챤이 어떻게 ‘새사람’이 되었으며, 이 새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노력과 선한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심을 믿음을 통하여 성령의 거듭나게 하심으로 새사람을 입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새사람’은 단순히 과거의 나쁜 습관을 버리고 훌륭한 성격의 사람으로 새 출발하게 되었다거나, 과거에 비해 ‘개과천선’했다는 식의 엄청난 삶의 변화를 보인 것과도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속에 살아 있던 아담에 속한 옛사람이 완전히 죽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성령에 의해 거듭나게 된 새사람’이 나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왜 우리 성도가 더 이상 과거의 모든 헛된 가르침과 옛사람에 속한 육신의 정욕에 이끌려 살아가서는 안됨을 사도가 강조하는 지점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이미 옛사람이 죽은 새사람으로서 합당한 삶인 것인지를 오늘 본문을 포함한 <25~32절>에서 구체적으로 삶의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제 실천적 삶으로 먼저 <25절>에서 “거짓을 버리고 각각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v.25)고 격려하고 나서,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함께 읽었듯이 분노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v.26,27)라고. 한편 ‘도적질하지 말고, 도리어 부지런히 일하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선한 일을 추구할 것과 모든 더러운 말을 버리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을 모두 버리고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용서하심 같이 하라’고 사도는 도전하는 것입니다 (v.28~32). 왜냐하면, 우리 구원받은 성도는 구속의 날까지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자임으로 성령을 근심케 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v.30). 사도가 여기서 강조하는 요점은 이 모든 실천적 덕목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신분, 곧 ‘새사람’으로 거듭남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런 본질적인 우리 존재의 변화를 늘 기억하고, 확신하면서 새사람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의 주제인 ‘분노’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먼저 ‘화’ (anger)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보면, ‘국어사전’에는 화를 [몹시 노하여 화증을 내다; 몹시 못마땅 하거나 언짢아서 나는 성질]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Webster 영어사전’에서는 “a strong feeling of displeasure and usually of antagonism”, 번역하면 [대체로 불쾌함이나 적대감으로 인한 매우 강한 느낌]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요약하면, ‘몹시 언짢거나 불쾌한 느낌’이 ‘화’ (분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화’ (분노)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긍정적으로도, 그리고 부정적으로도 쓰여지는 개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노 하실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분노하십니다. 사도는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죄를 범한 인간에게 임하는 복음이 어디에서 출발하는지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롬. 1:18)라고. 하나님의 복음은 그분의 용서와 긍휼하심에서 출발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의 진노하심’ (the wrath of God)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와 함께 하실 수 없기 때문이요, 복음 안에 드러난 그분의 의는 인간의 불의와 불경건에 대해 진노하실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예수님도 성전에 올라 가셨다가 성전안에서 돈 바꾸는 사람들과 짐승들을 사고 파는 현장을 보시고, 크게 분노하셔서 돈 바꾸는 상을 뒤엎으시고 짐승들을 채찍으로 쫓아내셨던 것을 요한복음과 여러 복음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요. 2:13~17).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인간의 범죄로 인한 ‘진노’하심과 예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으로 인한 ‘분노’도 결국은 본질적으로는 ‘옳지 않은 일에 대한 의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이 분노의 긍정적 기능의 대표적인 예라면, 사실 삶을 살아가면서 이것과 비교할 수 없는 분노의 부정적인 예들을 우리 각자는 매일 매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부정적인 것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저는 먼저 왜 분노가 우리에게 매우 위험할까요? 라는 질문을 통해 어떻게 분노가 우리의 삶을 파괴시키는 힘을 가진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분노는 “이성적인 사고를 마비시키기” 때문입니다: 잠언서 기자는 쉽게 분노를 떠트리는 자를 경계해야 할 것을 이렇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잠언 15:18)라고. 제가 그동안 적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직접 혹은 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이해하게 된 사실은, 화를 내는 자가 늘상 화를 낸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화가 난 자가 지금 일을 그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 자신을 제외하고는 모두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을 ‘챨스 스텐리’목사는 매우 날카롭게 파악하고 지혜롭게 이와 같이 우리에게 조언합니다. “첫째) 화가 날 때 중요한 결정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잠언서 기자는 말합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 16:32)라고. 솔직히 제 자신이 그동안 가장 가깝게 생활하는 가족관계와 또한 이웃관계에서까지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때 일을 후회하게 되는 대부분의 경우는 제 스스로 감정조절에 실패한 경우입니다. 이처럼 화가 난 상태에서는 나의 말이나 행동이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그 마음을 닫게 만들기가 십상인 것입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감정이 고조된 상태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내뱉고 싶어서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상태는 때늦은 후회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결코 중요한 결정을 내려서는 안되는 위험한 순간임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둘째) 화가 난 상태에서는 남을 평가하지 말라라고 말입니다. 비록 처음엔 사소한 의견충돌에서 출발했더라도 이런 갈등상태가 점점 진행되다 보면 나중엔 더욱 상대를 자극하고 지적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기한 것은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상대방의 단점과 문제점이 화가 난 상태에서는 하나 하나 잘도 찾아내고, 날카롭게 창이 되어 서로의 가슴에 박힐 만큼 쏘아붙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바탕 분노의 감정을 솟아 놓으면 잠시 기분은 시원할지는 모르겠으나, 그 이후 내가 내뱉은 말과 행동으로 인한 상대에게 끼친 마음의 상처와 관계의 손상은 어쩌면 회복 불능일 수도 있다는 것이 화난 상태에서 상대를 평가하지 말아야 할 분명한 이유인 것입니다.

둘째, 분노는 “연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분노’를 잘 일으키는 사람은 그것이 어쩌다 한번이 아니라,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현재에서 미래로 점진적으로 지속적인 연속성을 가지고 진행된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분노의 생활화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지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에 있어서 어떤 사람은 외부로 있는 그대로 다 발산하는 타입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사람들에게는 잘 눈에 띄지는 않지만 속으로 화를 삼키는 타입도 있습니다. 정신의학적으로 본다면 도리어 이런 두번째 타입이 더 위험하다고 합니다. 눈에는 잘 띄지 않고 남에게 피해는 주지 않지만, 속으로 곪아 터질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를 소위 ‘화병이 났다’고 말하는데, 우리 어머니나 할머니 세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예 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분노조절’의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의 성장배경을 알아보면 적지 않은 퍼센트의 사람들이 자신들도 어렸을 적에 그와 같은 환경에서 자라났던 경험의 소유자인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아버지의 술주정이나 부모의 언어적인 폭력으로 시달려서 자라온 아이가 성인이 되어서도 분노조절을 하는데 있어서 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그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밖에도 다양한 형태의 폭력이나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비록 어리지만 의사가 존중되고 실수가 용납되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에 비해서 성인이 된 이후에도 정서적인 불안정과 폭력적인 성향이 훨씬 강하다는 조사결과를 우리가 듣는다고 해도 우리는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그만큼 성장환경은 그 사람의 평생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분노’라는 한가지 현상에 있어서도 단순히 지금 현재 드러난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긴 시간을 두고 이어져온 환경적인 요소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에베소성도에게 보내는 편지를 마감하면서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 6:4)고 아비들에게 권고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비난과 강압적인 환경가운데 자란 아이는 커서도 그 부정적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직시해야 하는 것은 과거는 그 누구도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각자가 지금까지 형성된 성격, 그 중에서도 ‘분노수치’는 어느날 갑자기 형성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싸여온 긴 시간의 형성물입니다. 그러나 먼저 주님의 성령께 기도함으로 내가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과 평안한 마음을 주셔서 ‘나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정신적인 또한 영적인 장애상태를 직시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제어하고 다시 새롭게 고쳐 주시기를’ 기도드리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사도가 이것을 성도들에게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의 신분에 있습니다. 바로 우리는 더 이상 ‘옛사람’에 속한 자가 아니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새사람’이 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의 긴 세월을 이어오면서 나를 얽매었던 분노라는 강력한 끈을 끊을 수 있는 근거라고 사도는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셋째, 분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시키기” 때문입니다: 분노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시키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분노는 하나님을 근심시키는 것>입니다. 첫 인간부부, 아담과 하와의 첫 아들인 카인은 그의 동생 아벨에 대해 분노를 발했습니다. 왜 카인이 아벨에 대한 분노의 마음이 생겨났을까요? 그 이유에 대해 <창세기 4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 자신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안으셨기’ 때문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창. 4:3~5). 이에 대해 “카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 4:5b)라고 반응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게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 4:6~7)고 카인에게 카운셀링 하십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카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동생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인하여 분노함으로 살인이라는 끔직한 범죄를 저지르기에 이릅니다. 카인은 끝끝내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을 거부하고 그분을 근심시킴으로 악한 죄를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더욱이 분노가 심각한 것은 이런 어그러진 상태가 마치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핑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트린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쓴 뿌리로 인하여 심각한 관계의 단절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분노는 하나님의 ‘축복’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구약의 한 인물, ‘야베스’는 이런 복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큰 복과 은혜를 누렸고, 우리에게 기도의 훌륭한 모델이 되었던 것입니다.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역대상 4:10)라고. 제가 오늘 ‘분노’라는 주제의 말씀을 마무리하며 결론적으로 성도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것은, 분노하는 자는 불행하게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그 은혜와 복을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분노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신뢰관계를 파괴함으로서 원망과 쓴뿌리로 인하여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기쁨과 만족이라는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루 하루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는 복된 삶’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분노를 하나의 단순한 성격의 문제, 혹은 감정적 조정장애 정도로 치부합니다. 그러나, 이 분노는 그것에 기초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능가하여 심각하게 삶을 파괴하고, 신앙을 병들게 하는 원인이 됨을 우리는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바라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과거의 옛사람은 완전히 죽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새사람답게 성령의 도우심으로 분을 내었을찌라도 해를 넘기지 않고, 마귀로 틈을 주지 않는 지혜로운 삶 사시길 바랍니다. 더 이상 내 타고난 성격과 기질임으로 어쩔수 없다는 운명론에서 벗어나, 허락하신 자녀의 권세로서 성령의 능력으로 노함과 분냄과 모든 육신의 그릇된 모습에서 벗어나 진리 안에서 자유하며, 아버지의 허락하신 풍성한 만족과 축복의 삶을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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