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e 18, 2023

“무엇이 믿음인가” (What Is Faith?)

Preacher:
Passage: 히브리서 (Hebrew) 11:1~3
Service Type:

“무엇이 믿음인가”

(What Is Faith?)

6-18-23

본문말씀: 히브리서 (Hebrew) 11:1~3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Now faith is being sure of what we hope for and certain of what we do not see.)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This is what the ancients were commended for.)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By faith we understand that the universe was formed at God’s command, so that what is seen was not made out of what was visible.)

[설교 요약]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순전한 믿음이 아닐까요?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지지 않을 정금과 같은 순전한 믿음이 아닐까요?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영적으로 설명해 나가면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v.1)라고 믿음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매튜 헨리’는 “믿음과 소망은 병행하며 우리의 믿음의 목표와 소망의 목표는 동일한 것이다. 또한 믿음은 육체의 눈으로 식별할 수 없는 것들의 실체를 마음의 눈으로 보게 한다.”라고 주석하였습니다.

여기서 먼저 무엇이 믿음이 아닐까요? 그것은

  • ‘맹신’은 믿음이 아닐 것입니다
  • ‘신념’ (자기확신)은 믿음이 아닙니다
  • ‘지적 동의’는 믿음이 아닙니다

이제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일까요?저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믿음>을 살펴봄으로 이 믿음을 이해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첫째,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에서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 15:6) 라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약속하신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은 ‘뭇별과 같이 많은 후손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입니다 (롬. 4:18-20).

둘째, ‘하나님의 <권능>을 믿는 것’입니다: 왜 아브라함이 불가능해 보이는 그 약속을 믿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기)” (롬. 4:17)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능 하심을 믿었다는 뜻인데, 그 약속하신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는 생명의 주관자’시요,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창조주’되신 하나님임을 그가 확신했다는 것입니다.

셋째,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약속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신뢰로써 구체적으로 적용’했습니다. 그는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아니(함으로)’ (롬. 4:19,20) 그의 믿음이 온전함을 나타내었습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약속을 분명하게 깨닫고 그 약속을 신뢰함으로써, 날마다 디테일하게 삶 가운데 적용해 나가는 믿음의 사람들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순전한 믿음이 아닐까요?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지지 않을 정금과 같은 순전한 믿음이 아닐까요? 그리고 우리 성도들 대부분이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이와 같은 믿음을 우리에게 명령하시고 기대하신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 이런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정해 주실 것에 대한 확신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요? 저는 오늘 <히브리서 11장> 말씀을 중심으로 다시 한번 성도 여러분과 함께 무엇이 성경에서 밝혀 주시는 믿음인지,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믿음인지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포함된 <히브리서 11장>은 여러분도 잘 아시듯이 흔히 <믿음장> (the faith chapter)라 불리는 유명한 말씀입니다.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영적으로 설명해 나가면서 먼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v.1)라고 믿음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주석가 ‘매튜 헨리’는 이것을 영적으로 이렇게 풀어 설명하였습니다. “믿음과 소망은 병행하며 우리의 믿음의 목표와 소망의 목표는 동일한 것이다. 또한 믿음은 육체의 눈으로 식별할 수 없는 것들의 실체를 마음의 눈으로 보게 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믿는 자들에게 영혼의 눈과 같은 역할을 하도록 주어지는 것이다”라고.

그리고 나서, 히브리서 기자는 <3절>을 통해 <믿음의 ‘기능/역할’>이 무엇인지를 한 문장 안에 짧고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v.3)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할까요? 여기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 성도들이 믿음을 통해 깨닫을 수 있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 ‘세상 만물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다’는 사실입니다. 그 누군가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는 것이요, 셋째는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말씀으로써 창조하셨다’는 것이며, 마지막 넷째는 ‘이 세상은 완전한 무에서 유로 창조되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통해 깨닫을 수 있는 사실은 앞서 제가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는 어떤 육체의 눈으로 볼 수도, 머리로 이해할 수도 없으며, 오직 하나님께서 그 실체를 성도의 [영혼의 눈인 믿음]을 통해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눈으로 인식하는 시각의 영역과 귀로 듣는 청각의 영역, 그리로 머리로 추론하는 지성의 영역을 초월한 우리의 인지의 세계 너머의 보이지 않는 진정한 영과 능력의 실체를 통해 이 세상은 창조되고 존재하며 운행되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은 오직 믿음으로 깨닫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그렇다면 ‘무엇이 믿음인가?’라는 결코 쉽지 않은 주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묵상하며 먼저 ‘무엇이 믿음이 아닌가?’에 대해 살펴보기 원합니다. 성도 여러분은 무엇이 얼핏 ‘믿음처럼 보이지만, 사실 믿음이 아닌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첫째, ‘맹신’은 믿음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종교’ 내지 ‘신앙’이라는 이름 아래 벌어지고 있는 문제점의 중심에는 ‘맹신’ (blind faith)가 있을 것입니다. 요즘 한국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많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리고 있는 소위 ‘JMS’라 불리는 기독교 이단 교주 정명석의 엽기적이고 파렴치한 행각이나, 신천지와 같은 집단의 여러 거짓 가르침이 먹혀 드는 중심에는 ‘맹신’이 있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거짓된 가르침에 빠진 사람들이 처음부터 맹신에서부터 출발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이것은 교활한 거짓교사들의 지속적인 거짓 ‘세뇌’ (brainwashing)을 통한 상대를 지배하는 ‘가스라이팅’화 (gaslighting) 작업을 통해 이런 맹신이라는 어리석은 믿음이 가져오게 되었다는 점도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사실은 상황과 여건은 다를지라도 이렇게 맹신적인 믿음으로 살아가게 될 때, 그 최대의 피해자는 바로 본인 자신이라는 점이요, 하나님은 이런 맹신을 믿음으로 인정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 ‘신념’ (자기확신)은 믿음이 아닙니다. 오늘날 현대사회에서 보면, ‘긍정적인 생각’ (positive thinking) 혹은 ‘마인드 컨트롤’라 같은 심리적 운동의 현상들이 상당히 펴져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내재한 생각을 보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추구해 나감으로써 내적 동기와 활력을 일깨우고자 하는 ‘정신 운동’이 자신이 믿는 종교가 무엇이든 관계없이 상당히 보편화 된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그런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 크리스챤들 가운데 이런 자기확신과 신념 혹은 자기노력을 마치 믿음의 본질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데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자기확신과 자기설득은 엉뚱한 결과만을 가져온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신념은 결코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한편 셋째, ‘지적 동의’는 믿음이 아닙니다. ‘지적 동의’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내가 성경의 말씀을 머리로 이해하고 인정하지만, 그 말씀에 따르지 않는 삶의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머리로 알지만, 순종으로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코 믿음이 아님은 우리 모두가 동의하시리라 저는 믿습니다.

이제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일까요?신 구약 성경말씀에 보면, 오늘 히브리서 본문 말씀을 포함해서 무엇이 믿음인지를 밝혀주는 많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 중에서도 <로마서 4장>에서 사도 바울이 밝히고 있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샘플로 정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믿음을 의롭다고 가장 먼저 그리고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은 <창세기 15장>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이 무엇인지를 살펴봄으로써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을 확인해 나가고자 합니다. 이 믿음은

첫째,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방금 제가 왜 아브라함의 믿음을 우리가 본받고 추구해 나가야 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본인지를 설명했는데, 그 근거가 되는 창세기 15장 말씀은 이와 같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 15:6) 여기 창세기 본문에서는 단순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그가 무엇을 실제로 믿었는가 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가 무엇을 믿었는지를 가장 핵심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잠시 언급했지만,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인데 그 약속은 “하나님께서 팔십세 후반의 늙은 아브라함 자신을, 그리고 더욱이 칠십세 후반의 젊어서도 아기를 가질 수 없었던 불임의 할머니인 그의 아내 사라를 통하여 약속의 아들을 낳게 할 것이라는 것과 그 아들을 통하여 밤 하늘의 반짝이는 그 수 없이 많은 뭇 별과 같이 후손을 주시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롬. 4:19) 이 약속을 아브라함은 믿었고,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이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신실하게 믿는 그 믿음>을 심히 기뻐하시고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믿음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로마서 4장>에 보면 이렇게 사도 바울은 그의 믿음을 설명합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롬. 4:2,16)라고. 그럼으로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사람만이 아니라 그의 믿음의 발자취를 좇아 믿음의 후손이 된 모든 구원받은 성도의 삶에서도 동일하게 그분의 약속을 믿는 믿음을 요구하시고 그 믿음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깨닫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주신 그 가슴 벅차고 신실하신 약속을 이해하십니까? 그리고 그 약속을 믿으십니까?

둘째, ‘하나님의 <권능>을 믿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에서 보면, 과연 아브라함은 그런 불가능한 하나님의 약속을 어떻게 믿을 수 있었을 것인가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되는 말씀을 바울은 밝히고 있습니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롬. 4:17)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두가지 대표적인 속성을 근거로 그분을 신뢰할 수 있었고, 이것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는 근거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그는 하나님은 <생명의 주관자 되심>을 믿은 것입니다.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만약 아브라함 자신에게 약속하신 존재가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생명의 주관자 하나님’이시라면 비록 그분께서 하시는 약속이 내 판단에 불가능 보인다 할찌라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내게 약속하시는 하나님은 생명을 살리시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완전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만약 나에게 약속하신 그분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과연 하나님께서 그 약속하신 바를 행하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우리는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바로 그와 같은 하나님, 즉 ‘죽은 자를 살리며, 더욱이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권능의 하나님임을 믿었기에 그는 그 하나님의 약속이 불가능하다는 어리석은 인간적 판단을 다행히도 내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아브라함에게 지금 말씀하시는 분은 생명의 주관자시요, 오늘 본문에서 밝히듯이 존재하는 모든 세계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권능의 하나님이심을 그가 신뢰했기에 그는 그 약속을 믿은 것입니다.

셋째,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놓쳐서는 안되는 마지막 한가지를 함께 나누고 오늘 말씀을 마무리해 나가고자 합니다. 그것은 ‘약속에 대한 구체적인 적용’입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약속에 대한 구체적인 적용’인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약속에 대한 구체적인 적용’이라는 뜻은 간단히 표현하면, “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현재, 이 자리에서> 삶에 적용할 수 있는가?!”하는 점입니다. 저는 그동안 신앙생활 하면서 다양한 성도들을 만났습니다.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성격도 다르며, 믿음의 방식이나 말씀을 깨닫는 영적 지각력도 상당히 다른 여러 형태의 성도들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한가지 사실은 이들 가운데 말씀에 대한 관심 (열심)도 있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심지어 그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진지함도 있는데, 더 깊은 영적 성숙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성도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되는 이유는 ‘말씀(약속)에 대한 구체적인 적용’이 이들 성도들에게 부족함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많은 성도들이 놓치는 것이 ‘말씀의 구체적인 적용’임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이 말씀에 대한 구체적 적용이 믿음의 마지막 단계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마귀는 디테일에 존재한다” (The Devil is in the details!)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이 말은 20세기의 뛰어난 건축가였던 ‘미스만 데 로헤’가 사용한 말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대부분의 일에 있어서 치명적인 문제는 큰 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디테일한 것에서 숨어 있다는 것이요, 그것이 결국 치명적인 악마가 되어 일을 망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거대한 땜도 갑자기 터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개미구멍 같은 작은 틈의 균열에서 시작되지만, 그 작고 사소한 것을 놓치게 될 때 결국 겉잡을 수 없는 무너짐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작고 디테일한 문제와 허점을 허용했을 때, 이것이 치명적 문제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영적인 관점에서도 매우 시사하는 교훈이 크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성도 여러분이 오늘 저의 설교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이 믿는 하나님, 생명과 창조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 그리고 그 선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을 갖기 원한다고 다짐하지만,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서 ‘정말 하나님의 약속이 가능할까?’라고 반문하게 될 때 그 믿음이 흔들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여러분이 구체적으로 디테일하게 어떻게 이 약속을 삶 속에서 적용할 수 있는가 가 여러분의 믿음의 승패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결정적이고 디테일한 적용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현재 그리고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약속을 신뢰하며, 그 약속을 자신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온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았던 것입니다 (롬. 4:19,20). 더 나아가 <히브리서 11장> 후반절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백세되어 낳은 약속의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명하셨을 때 그가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던 근거가 무엇인지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히. 11:19)고. 다시 말해 말씀에 순종하여 그 아들을 바치면, 그 명하신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 아들을 도로 주실 것이라는 ‘부활신앙’을 소유했기에, 그분의 약속을 구체적으로 삶에 적용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약속의 아들을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히브리서기자는 선언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6)라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과 또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 모두 성령의 도우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더욱 분명하게 깨닫고 그 약속을 신뢰함으로써, 날마다 디테일하게 삶 가운데 적용해 나감으로 약속의 귀한 열매를 맺어가는 믿음의 사람들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