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e 11, 2023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In A Death Like His)

Preacher:
Passage: 로마서 (Romans) 6:5~7
Service Type: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In A Death Like His)

6-11-23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6:5~7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설교 요약]

<로마서 6장>의 주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the union with Christ)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6장은 적지 않은 성경학자가 주장하듯 성도의 ‘성화’ (sactification)가 아니라 ‘칭의’ (justification)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사도는 6장을 시작하면서 ‘자신은 율법폐기론자 (antinomian)가 아님’을 주장하며, 반대로 우리 성도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 (2)고 그는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우리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나게 됨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침례’ (baptizm)의 영적 의미임을 사도는 지적합니다 (3-4).

그리고 이와 같은 성도의 <영적 신분>을 한걸음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6절>에서 밝히는 것은, 침례를 통해 상징하고 있듯이 “그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도의 주장을 통해 어떻게 성도는 죄에 대해 죽은 신분에 걸맞게 살아갈 수 있을까?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것은

첫째, “우리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서 입니다: 요점은 ‘우리 <옛사람>이 예수 믿게 될 때 죽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옛사람’은 ‘아담으로부터 원죄를 물려받은 인류의 본성’를 뜻합니다. 그 옛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될 때,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죽은 것입니다 (6).

둘째,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한 죽으심으로서 입니다: 왜 예수께서 죽으셨다고요? 그 죽으심의 목적은 ‘우리를 죄에 대해 죽게 하고, 하나님에 대해 살게 하고자’ 함입니다 (7-11). 여기서 주님의 죽으심의 2가지 목적을 봅니다.

  • 주님은 <‘죄의 능력 (the power of sin)을 멸하고자>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분을 믿음으로 우리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죽게 할 뿐 아니라, 여전히 우리 육신 가운데 거하는 죄를 멸하고자 죽으셨습니다.
  • 주님은 <우리의 ‘죄의식’ (the guilty of sin)을 없애고자>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끊임없는 염려와 근심에 싸이는 중심에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우리의 신분’ (롬. 5:1)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통해 의롭다 하심의 은혜를 누리지 못함으로 여전히 죄의식에 시달리며,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롬. 8:8:15).

바라기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난 성도의 축복된 신분’을 점점 더 깨닫아 나감으로 철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성령의 능력으로 죄를 죽이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복된 삶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오늘 말씀을 포함한 <롬. 6장>은 로마서 전체에서도 우리 크리스챤의 진정한 능력과 권세가 어디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인가를 영적으로 분명히 밝혀주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하자면, ‘그리스도와 연합’ (the union with Christ)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연합함을 통해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모든 풍성한 삶과 하나님 아버지의 유업을 누려 나갈수 있는 것입니다. 집을 잘 짓기 위해선 기초가 튼튼해야 하듯, 바라기는 오늘 말씀을 통해 성도 여러분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이 뜻하는 의미를 더욱 깨닫아 나감으로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어’ 주님의 부활의 권능과 약속하신 은혜를 누려 나가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을 포함한 <로마서 6장>은 사도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1:16)임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1:17)는 복음의 진리를 선언하고나서,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18)라고 선언하며 본격적으로 복음의 메시지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하나님의 진노’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첫 인간 아담에서 비롯된 인간의 하나님을 대적함이요,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인간의 삶 속에서 드러난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를 좇아 의로우신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한다면, ‘인간의 죄’때문이요, 그 죄의 정도가 어느 정도로 심각하느냐 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도록)” (3:23) 심각함을 사도는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 가운데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사형에 해당하는 심각한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없을 뜻하는 것입니다 (롬. 1:32). 이것이 정확한 복음에서 선언하는 우리 인간의 영적 진단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복음을 통하여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 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 (3:22)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의 보혈의 능력으로 그를 믿는 모든 자를 죄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불러 주시는 ‘하나님의 의’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사도는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 모든 성도가 본받을 수 있는 믿음의 샘플을 ‘4장’에서 소개합니다. 그는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나이 많았고, 더더욱 아내 사라는 아기를 가질 수 없는 불임의 상태에서 70이 넘은 늙은 나이였지만 하나님의 ‘하늘의 못별과 같이 많은 후손을 주겠다’는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15장>에서 그의 이러한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창. 15:6).

그리고 5장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사람” 곧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설명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5:1)는 것입니다. 이것은 첫 사람 아담으로 인하여 죄와 사망이 시작되었듯이,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은혜와 의의 선물’이 풍성히 우리 믿는 자의 삶에 시작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이 <롬. 5장>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리고나서, 사도는 <6장>을 시작하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6장의 말씀은 흔히 성경학자 (신학자)들이 말하듯, 5장과 구별되어 새로운 내용의 시작이라기 보다는, 앞선 5장의 연장선상에서 보다 구체화된 설명의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5장에서 사도가 밝힌 ‘우리가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속해 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며, 어떻게 그것을 삶으로 적용할 것인지를 잘 설명해주는 말씀이 오늘 본문을 포함한 6장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사도는 6장말씀을 시작하면서 이런 반문을 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6:1~2)라고.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 당시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 가운데서 사도 바울을 향해 ‘저 사람은 <율법폐기론자/antinomian>다’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율법폐기론’ (antinomianism)인가요?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없애 주셨을 뿐 아니라, 구약의 모든 율법의 요구를 이루고 구원을 이루었으니 이제는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는 율법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필요 없는 율법을 ‘폐기처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의 3장에서 “또한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은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받는 것이 옳으니라” (롬. 3:8)고 사도는 자신을 마치 ‘율법폐기론자’처럼 오해하여 비방하는 자들의 잘못을 지적했던 것입니다.

사도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은 결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자’는 ‘율법 폐기론자’식의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힌 거짓복음이 결코 아니다고 선언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분명한 이유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는 결코 죄에 대해 살아날 수 없다’ (v.2)는 것이 그의 논리입니다. 그렇습니다. 한번 죽은 자는 두 번 다시 살아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런 영적 논리를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층 더 명료하고 확증적으로 밝히는 것이 이어지는 <3-4절>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죄에 대해서 죽은 존재가 되었는지를 사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침례를 받았다’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함이라” (6:3-4)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이 잘 아시는데로, <침례> (baptism)는 “‘어떤 사람이 물 속에 완전히 잠겼다가 물에서 다시 건져지는 행위’로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이 그분과 함께 죽고 또한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나게 되었음을 사람들 앞에서 신앙 고백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사도는 로마교회 성도를 향해 <우리 믿는 자가 침례 받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 그분과 함께 죽은 것이요, 주께서 삼일만에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의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을 때 우리도 그분과 함께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는 것임을 성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라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침례를 받아 본 사람들은 이것이 바로 침례의 영적 의미임을 분명히 알 것이라는 거죠!

그렇다면, 이와 같은 사도의 질문, 즉 ‘왜 우리가 침례를 받는 것인지, 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침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살아나게 되었는지’를 반문함을 통해 성도들에게 묻고자 하는 핵심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구원받은 성도는 이제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은 먼저 일반론적으로 생각해 볼때, ‘죽은 시체가 아무런 의식이 없듯이, 죄라는 자체를 전혀 감각하거나 의식할 수 없는 상태’가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뜻이 됩니다. 더 나아가서 영적으로 볼 때 “죽은 자”라는 의미는 성도의 ‘현재의 영적 상태’라기보다는 ‘현재의 영적 신분’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게 되었다면, 우리 모두는 한사람도 예외 없이 ‘지금 현재 죄에 대해 죽은 존재(신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지금 내가 죄와 싸워 이길수 있는가?’라고 했을 때는 그에 대한 대답은 우리의 영적 성숙(상태)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죄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우리의 영적 신분이 죄를 전혀 인식하거나 감각할 수도 없는 죄와 무관한 완전히 새로운 존재으로 변화되었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 존재의 변화가 <언제> 그리고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다고요?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순간, 그리고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목박혀 죽고 또한 함께 새 생명으로 부활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분과 함께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는 말이 하나의 비유나 상징이 아니라, 분명한 성도의 삶의 진실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비록 예수 믿게 될 때 일어나게 되는 놀랍고 신비로운 구원의 능력, 곧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머리로 다 깨닫지는 못할찌라도 ‘실제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존재’가 우리 크리스챤임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점에 대해서 요한복음에서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4-15)고 말입니다. 믿는 자는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저는 이런 질문을 성도 여러분에게 던지기 원합니다. “구원이 여러분을 본질적으로 변화시켰나요?” 이 질문에 대해 성도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이 질문은 결국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완전히 변화된 존재’임을 이해한다면, 머리로 끄덕거리는 것 만으로는 이해한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을 포함한 <로마서 6장>에서 우리 크리스챤에게 도전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 아닐까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성도 여러분은 어떤 구체적인 변화가 있는지?”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해할 것은 어떻게 성도는 죄에 대해 죽은 신분에 걸맞게 살아갈 수 있을까?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사도의 가르침을 통하여 두가지로 이해합니다. 그것은

첫째, “우리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서 입니다: 이점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데로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수 있는가”’에 대한 한층 구체화된 영적 설명입니다. 그 대답은 우리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써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v.6) 저는 지난번 <에베소서 강해설교>때, ‘옛사람’이 무엇인지를 나눴습니다. 먼저 ‘옛사람’ (old man)은 ‘구원받지 못한 인간의 본성’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옛사람’은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죄의 속성을 물려받은 인간 본성’을 뜻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단 한사람도 예외 없이 우리 모든 인류는 아담의 원죄를 우리 본성 (존재) 안에 물려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이토록 죄의 강력한 힘 아래 끌려 다니고, 죄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인 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인간은 옛사람으로서 죄의 통치 아래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십자가에서 그와 함께 죽은 것입니다. 무엇이 죽었다고요?!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원죄를 물려 받던 옛사람이, 바로 죄의 종으로 살아가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두번 다시 내게는 옛사람이 살아날 수 없다고 사도는 오늘 <6절>에서 선언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영적 상황에 있어서 그 누구도 이런 옛사람이 죽는 것에 있어서 스스로 계획하고 실천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계획하신 놀라운 역사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붙들어야 하는 한가지는 ‘나의 옛사람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을 통해 옛사람을 죽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왜요? 그것은 우리의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노릇하지 아니하려 (하도록)” (6)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때문입니다. 따라서 거듭난 성도에게 있어서 ‘죄로부터 자유케 되는 첫 단계’는 우리 존재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 죄로부터의 자유는 내 존재를 정확히 깨닫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존재는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음으로 두 번 다시 내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새 생명으로 살게 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한 죽으심으로서 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8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에서 사도의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목적을 다시 한번 분명히 밝히고자 함일 것입니다. 바로 ‘죄에 대한 죽음’입니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v.10)라고. 사도가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그의 생명으로 구원하신 우리 성도를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 아버지께 대해서는 살게 하시고자’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의 목적을 탁월한 영적 논리와 통찰로 밝히는 것이 <10절>에서부터 마지막 <23절>까지의 사도의 결론이요, 우리가 감당해야 할 적용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목적은 ‘우리를 죄에 대해 죽게 하고, 하나님께 대해 살게 하고자 함’입니다. 이것은 곧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살아가게 하고자 하심’ (11)입니다.

여기에서 성도의 적용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자로 여긴다’ (11)는 것이 무엇을 뜻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어 주는 것이 아니라, ‘의의 무기’가 되어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12-13). 이것이 실제 가능할까요? 그렇습니다. 사도는 확실히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 근거는 우리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14)는 것입니다. 바로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기 때문이요 (18), 앞서 말씀드린데로 ‘죄에 속한 옛사람’이 이미 죽었고, ‘그리스도의 새 생명’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는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해 죽으심에 있어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적용할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첫째) 주님은 <‘죄의 능력' (the power of sin)을 멸하고자> 죽으셨습니다. 우리 성도의 실존은 이미 영생을 소유한 빛된 하나님의 자녀로 주님과 함께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지만, 우리의 육신은 여전히 죄가 거하는 연약한 몸을 입고 살아간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죄 안에 거하거나 죄의 종으로 살아서는 결코 안되는 이유가 오늘 말씀의 결론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멸하셨기 때문입니다. 죄의 능력을 멸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는 여전히 우리 육신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다스릴 수 있고, 죄를 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죄의 법에서 자유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롬. 8:1). 이것이 사도가 <롬. 8장>에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8:13)라고 죄를 죽일 것을 도전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둘째) 주님은 <우리의 ‘죄의식' (the guilty of sin)을 없애고자> 죽으셨습니다. 저는 지난 몇번의 설교를 통해서 우리 성도들이 결코 의도한 것도 아니요 원하는 것도 아니지만, 우리 속에 끊임없이 생겨나는 염려와 근심, 불안과 스트레스의 실체는 무엇인가를 살펴본 바 있습니다. 그 모든 우리의 염려와 불안의 중심에는 ‘하나님과 화평하지 못하기 때문’임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롬. 5:1) 라고 우리 성도를 권면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인 줄 아십니까? 우리의 존재는 이미 하나님과 평화하는 관계에 있지만, 우리의 영적 성숙상태가 하나님을 평화와 기쁨으로 대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음에도 우리의 영적 미성숙 곧 ‘죄의 찌꺼기’로 인하여 여전히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이렇게 우리를 향해 도전하고 격려하고 있지 않습니까?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 8:15)는 것입니다. 주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인생들에게 안식을 약속하셨듯이, 주님은 우리 성도들의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죄의 잔재들, 곧 죄의식을 잘 아십니다. 그럼으로 모든 죄의식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평화와 안식의 삶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분과 함께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남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아들과 딸이 된 이 놀라운 은혜와 특권을 점점 더 깨닫아가고 있습니까? 우리 옛사람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사단 마귀는 여러분을 건드리지도 못하는 존재가 되었음을 이해하십니까? 바라기는 여러분이 몸의 행실을 죽이고, 의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를 통해 점점 더 철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죄를 죽이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주께서 약속하신 기쁨과 만족의 열매를 맺어가는 성도 여러분의 삶을 사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