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e 4, 2023

“하나님은 누구신가” (Who Is God?)

Preacher:
Passage: 사도행전 (Acts) 17:30~31
Service Type:

“하나님은 누구신가”

(Who Is God?)

6-4-23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17:30~31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 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In the past God overlooked such ignorance, but now He commands all people everywhere to repent.)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For He has set a day when He will judge the world with justice by the man He has appointed. He has given proof of this to all men by raising him from the dead.”)

[설교 요약]

우리 크리스챤이 평생의 삶을 통하여 추구해 나가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Knowing God)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에덴’지역에서 복음을 증거했는데, 이 '에덴' (아테네)은 서양문명의 발상지이자, 고대 철학의 중심지였는데, 한편, 그곳에 운집한 수많은 신전들로 인하여도 또한 유명했습니다.

사도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성경의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주장합니다. 그럼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의 독생자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서 구원을 얻게 될 것’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이제 큰 그림에서 3가지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뜻입니다 (요.1:12).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는 첫걸음이요, 이것은 ‘회개하여 죄씻음을 통해 가능한 것입니다 (v.30)
  • ‘하나님은 누구신가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제임스 패커’목사는 그의 책, <하나님을 아는 지식> (Knowing God)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탁월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점은 우리 성도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는 만큼, 그의 자녀에게 허락하신 모든 은혜를 누릴수 있는 것이요, 이것이 호세야가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 6:3)라고 도전하는 이유입니다.
  • ‘하나님을 경험해 나가는 것’입니다: ‘욥’은 많은 고난을 지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 42:5)라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삶’으로 경험하고 누려 나가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날마다 온 힘을 다해 생명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자신을 순종해 나가며, 성령을 통해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복된 주의 자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청년시절,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생활해 오면서 계속해서 저를 따라 다니던 한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나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내 안에 수없이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믿는 순간부터 갑자기 모든 근심 걱정은 사라지고, 천국의 기쁨만을 경험하는 삶을 나는 살수 없는 것인가!?’라는 질문인 것입니다. 물론 그 이유를 제가 어느 정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 근본적 이유는 우리 크리스챤은 새 생명을 소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죄가 거하는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요, 우리는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성품을 향해 날마다 성장해야만 하는 영적 아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죄가 거하는 육신을 입고 살아가면서도 어떻게 영적으로 장성한 성품으로 날마다 자라갈 수 있을 것일까요? 저는 그동안 그것을 여러 날 묵상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제가 분명하게 깨닫은 한가지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나의 영적 성장의 핵심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곧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점점 더 영적으로 이해하고, 깨닫은 만큼 그 분의 기뻐하는 자녀로 자라고자 하는 인격적 결단이 있을 것이고, 이것이 ‘영적 성장’의 결정적인 요인이 될 것임을 저는 믿습니다. 그럼으로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날마다 자라남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복된 자녀로 살아가기로 결단하고 실천해 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사도행전 17장>은 사도 바울의 ‘2차 전도여행’도상에서 벌어진 기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자 누가는 <행. 17장>에서만도 바울이 세지역에 걸쳐 왕성하게 행한 전도행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데살로니가’전도 (v.1-9)이고, 둘째 ‘베뢰아’전도 (v.10-15)에 이어 셋째 ‘에덴’전도사역이 ‘16절’에서부터 ‘34절’ 끝절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을 포함한 16절부터 이어지는 말씀은 ‘에덴’시민에 대한 전도사역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에덴’ (Athens)은 우리가 보통 ‘아테네’라고 부르는 고대 그리스의 수도인 것입니다. 이 ‘아테네’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데로 고대 서양문명의 발상지라고 불리며, 인류최초의 ‘민주주의의 도시국가’이자, 수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서양철학자라고 하면 떠오르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기라성 같은 여러 철학자들을 배출해 낸 철학의 도시이기도 합니다. 그 뿐 아니라 아테네는 사도 바울 당시 그리스인들이 숭배한 수많은 신들을 우상 숭배했던 여러 신전들이 집결한 도시로도 유명했습니다. 한마디로 우상숭배로 가득찼던 도시가 아테네였던 것입니다.

이 점을 ‘16절’은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v.16)라고. 바울은 아테네 도시전체에 거짓 우상이 가득하고, 우상숭배가 창궐함을 보고 마음에 분함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본격적으로 아테네 시민을 향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v.22)라고 말입니다. 저는 같은 내용을 이렇게 다르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우상숭배하는 자들’에 대한 최대한 긍정적인 표현이 ‘너희에게 종교성이 많도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사도는 왜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아덴 사람을 모쪼록 몇 사람이라도 그 영혼을 얻고자 하는 동기가 아닐까요? 흔히 우리 크리스챤들이 불신자들과 대화해 나가는데 있어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비본질적인 논쟁에 휩쓸려 정작 복음을 제시하기도 전에 그들의 마음 문을 닫게 하는 우를 얼마나 자주 범하는지를 생각해볼 때, 지금 사도가 아덴 사람들에게 보이는 이런 정중하고 예의에 찬 언행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하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자세임을 배우게 됩니다.

이제 바울은 자신이 목격한 어떤 신전의 제단위의 글귀를 인용하면서 본격적으로 아테네시민을 향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재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행. 17:23) 바울은 어느 신전 제단 위에 “알지 못하는 신에게” (to an unknown God)라고 쓰여진 문구를 목격하고 나서, 이것을 매우 인상깊게 간직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의 주장에 따르면, 이 ‘알지 못하는 신’이 바로 유대인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시요, 그분의 독생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셔서 우리의 죄를 씻어 영원한 생명의 자녀로 삼아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이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시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요, 그 모든 만드신 만물을 다스리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사도는 이어지는 <24-26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 지를 좀더 구체적으로 성도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이것은 큰 그림에서 볼 때, 3가지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는,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는다’는 것은 깨닫음의 정도를 어디까지로 둘 것인가에 따라 사람마다 다른 결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그 깨닫는다는 것을 앞서도 설명한 것처럼 ‘세상만물을 창조한 초월적인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로 이해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이런 절대적인 신 (=하나님)이 존재함은 믿지만, 불행히도 우리 인간은 그 절대적 존재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철학에서는 ‘불가지론자’ (agnostic)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우리 인간을 포함한 우주 만물을 창조한 절대적인 창조자가 존재함에는 인정하면서도 (의심치 않으면서도), 안타깝게도 우리 인간은 그 신은 알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로 철학자나 과학자들 가운데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이런 주장의 이면을 추론해 보면, ‘천지를 창조한 신은 자신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기를 원치 않는 존재’임을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그 절대적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음으로 우리 인간은 결코 그를 알수 없는 것이다’라고 이들은 주장하는 것입니다.

한편, 그 깨닫는다는 것을 한걸음 더 나아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나를 심히 기뻐하시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를 구원하시기를 심히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점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출발점을 선언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라고. 이점을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서 살펴본데로 ‘불가지론자’가 생각하는 신처럼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은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시고 택하신 그의 자녀와 더불어 사랑의 교제를 원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깨닫는 것이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는다’는 뜻이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는 첫 단계라고 저는 말씀드립니다.

이것은 성도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처럼 ‘구원을 이룬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믿고 영접하게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밝히듯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v.30b)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제는”이라는 뜻은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이제는”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께서 내어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죄를 회개함으로 죄 씻음 받고 영생의 기쁨을 누리는 그분의 자녀가 될 것을 도전 (초청)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누구신가를 알아 나가는 것’입니다: 얼마전 타개한 금세기 최고의 신학자의 한 사람이었던 영국의 ‘제임스 패커’목사는 그의 대표작 <하나님을 아는 지식> (Knowing God)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잘 설명한바 있습니다. 패커는 그의 책을 3부로 나누어 첫째, ‘하나님을 알라’ 둘째,‘네 하나님을 보라’ 그리고 셋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이라는 부제목 아래 <참되신 하나님, 성육신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 하나님의 진노, 복음의 핵심과 하나님의 사랑과 충족성>과 같은 그분의 속성과 성품을 탁월하게 영적으로 밝혀 나갔습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이 책을 요약해서 말해보라고 저에게 요구한다면, 저는 이렇게 말씀하고 싶습니다. “그 어떤 인간도 무한하신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그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그분의 모양데로 지으신바 된 그의 자녀된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기를 원하시고, 더욱 더 자세히 밝히시기를 매우 기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참되신 하나님을 올바로 이해하면 할수록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면 날수록) 그분을 더욱 더 사랑할 수 있으며, 그분 안에서 허락하신 영생과 축복된 삶을 누려나갈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계속해서 자라남으로 그분을 더욱 사랑하고, 허락하신 자녀의 권세를 누려 나가야 한다고 패커 목사는 주장한다고 저는 이해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 나간다’는 것은 우리 크리스챤의 평생에 걸친 긴 미션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그 광대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다 안다고 말할 사람은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만큼 그분에 대한 이 복된 지식이 우리를 살리고 열매 맺게 하는 기름진 영적 토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호세아 선지자가 이스라엘민족을 향해 도전하는 핵심인 것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호. 6:1,3)는 것입니다. 온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그 중심에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라’라는 메시지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을 경험해 나가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바로 앞의 두번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 나가는 것’에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왜 굳이 사족처럼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을 ‘그분을 아는 지식’으로써 마지막에 나누고자 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제 경험을 기초로 생각해 볼 때,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말 그대로 하나의 ‘지식’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동방의 의인’으로 불리우는 ‘욥’이 등장합니다. 그는 알 수 없는 수많은 고난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 욥기가 끝나는 마지막 장에서 이렇게 의미심장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 42:5)라고.

여기서 욥이 고백하는 핵심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동안 그 자신은 ‘스스로 누구보다도 믿음 좋고, 하나님을 잘 안다’라고 자부했었지만, 그동안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 안다고 생각한 것은 단지 ‘머리로만 아는 수준’이요, 그분에 대해 ‘귀로만 듣는 수준’임을 욥이 철저하게 깨닫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는 지금까지 당신을 너무도 오해했고, 그릇 깨닫았습니다!’라고 고백하고 탄식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런 그의 고백은 하나님을 향한 회개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욥. 42:6) 욥은 그 값비싼 고난이라는 비용을 지불하고나서, 이제 머리로서가 아니라 삶의 경험을 통하여 살아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경험해 나갈 수 있을까요? 구약의 ‘미가’라는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700여년 전 남 유다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 이스라엘백성을 향해 기대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이렇게 잘 밝히고 있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 6:8) 하나님은 그분의 의를 따라 행하며, 이웃에게 자비를 행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의 자녀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결국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온 힘과 뜻을 다해 묵상하고, 그 말씀에 나를 순종하고자 하는 십자가의 결단 가운데 가능하지 않을까요? 날마다 순간마다 겸손히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나의 연약과 실수’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이제는 하나님 아버지를 귀로가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있게 해 주실 것을 간구하는 가운데 가능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지식에 날마다 자라나가는 축복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