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28, 2023

“염려와 평화” (Anxiety And Peace)

Preacher:
Series:
Passage: 빌립보서 (Phillippians) 4:6~7
Service Type:

“염려와 평화”

(Anxiety And Peace)

5-28-23

본문말씀: 빌립보서 (Phillippians) 4:6~7

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Do not be anxious about anything, but prayer and petition, with thanksgiving, present your requests to God.)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And the peace of God, which transcends all understanding, will guard your hearts and your minds in Christ Jesus.)

[설교 요약]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그들이 누릴 실제적인 평화와 만족의 삶은 어떻게 가능한지를 이렇게 밝힙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v.6)고.

바울은 거듭해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기뻐할 것’을 도전합니다 (2:18; 3:1; 4;4). 그 이유는  3가지인데, 첫번째) ‘복음의 진보’ 때문이요 (1:12), 둘째) ‘그리스도를 소유’했기 때문이며 (3:8-9), 셋째) ‘자족’하기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4:11-12).

이제 무엇이 인간을 불안으로 빠트리는 요인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첫째, “상실감” 때문입니다: 인간은 근원적인 ‘고독과 외로움’을 느끼는데, 그것은 ‘상실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한데서 기인한다고 성경은 밝힙니다. 이러한 불안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공동체를 통해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사랑으로 섬겨 나갈 때 극복할 수 있습니다 (히. 10:24).

둘째, “의무불이행” 때문입니다: ‘의무불이행’이란 ‘무언가를 행하지 않았다’는 뜻인데, 그로 인해 마음의 부담과 가책을 겪으며 평화가 없는 불안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셋째, “죄의식” 때문입니다: 우리 크리스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죄씻음 받고 영생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육신을 입고 살아가기에 허물과 죄를 범하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이로 인하여 크고 작은 죄의식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겸손히 우리의 죄를 고백할 때,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깨끗케 하십니다 (요일. 1:8-9).

따라서 오늘 말씀에서 ‘어떻게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지?’를 결론적으로 바울은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1. 먼저 ‘우리 자신에게 말을 걸어야’합니다: “내 영혼아 ~ 어찌하여 불안해 하는고” (시. 42:5)라고, 자신을 향해 분명하게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을 것’ (v.6a)을 선언해야 합니다.
  2. 동시에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우리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야’ (v.6b) 합니다: 이러할 때, 상상을 초월한 하나님의 평화가 넘치게 우리를 지켜 주시는 것 (v.7)입니다. 이것이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도 ‘자족할 수 있는 삶’입니다. 이런 평화와 만족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오늘날 현대인의 삶을 고통에 빠트리는 근본적 요인의 하나가 ‘스트레스와 긴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스트레스와 긴장’은 그 중심에 ‘염려’가 있음을 봅니다. ‘알수없는 미래에 대한 염려’ ‘해결되지 않는 일에 대한 염려’ ‘인간관계와 하는 공부 혹은 직장일, 그리고 프로젝트 등’에 있어서 끊임없는 긴장 가운데 그 사회가 발전하면 할수록,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이 전문화되면 될수록 우리는 이런 수없이 많은 스트레스와 긴장을 일으키는 염려의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언급한 스트레스와 염려에 대한 예들이 성도 여러분에게 구체적으로 들리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존 맥아더목사가 말한 것처럼 ‘그만큼 오늘날 우리를 위협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그 염려의 종류는 수없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에 보내는 편지를 마무리해 나가면서 어떻게 성도가 누릴 실제적인 평화와 만족 (기쁨)의 삶은 가능할 것인지를 이렇게 영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v.6)고. 이런 평화와 만족을 누려 나갈 수 있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제가 대략 3년전 즈음에 빌립보서를 성도 여러분과 함께 강해설교로 나눈바 있습니다. 먼저, 이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더불어 <옥중서신> (감옥에 투옥되어 있을 때 보낸 편지)의 하나인데, 기억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이 빌립보서의 주제는 ‘기쁨’입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기쁨’입니다. 사도 바울 자신은 현재 감옥 안에 비록 감금된 몸이지만, 그는 도리어 감옥 밖의 자유롭게 생활하는 성도들을 향해 거듭거듭 ‘기뻐하라’고 진정과 사랑으로 도전하고 격려하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아이러니 한 것 같습니다.

그 격려의 말은 다음과 같은데,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2장에서 “나와 함께 기뻐하라” (2:18), 또 3장을 시작하면서 “주 안에서 기뻐하라” (3:1), 그리고 오늘 본문 앞의 <4절>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4:4)고 거듭 거듭 기쁨의 삶을 누려 나갈 것을 촉구하고 도전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도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토록 ‘항상 기뻐하라’고 도전하는 것일까요?” 저는 빌립보서를 통해서 사도가 그 이유를 3가지로 밝히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첫번째)는 ‘복음의 진보’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과 그의 여러 동역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함으로 겪었던 그 수많은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고난이 도리어 그리스도의 복음에 진보를 거쳐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그가 깨닫게 된 것입니다 (빌. 1:12). 이것은 놀라운 복음의 역설이요, 그리스도의 복음의 비밀 안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롬. 1:16). 둘째)로는 ‘그리스도를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그 유명한 고백, “내가 그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빌. 3:8,9)에서 보듯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으로 인하여 그동안 자신이 그토록 자랑하고 소중하게 여겼던 할례와 바리새인의 전통 등과 같은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소유한 기쁨 때문입니다. 셋째)는 ‘자족’했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삶이 가능한가? 를 결론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족하는 삶’을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내가 ~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1~12)라고 자신의 개인적인 영적 경험을 통해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사랑하는 빌립보 성도가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풍성히 누리고 있는 이 기쁨을 평화와 만족의 삶을 자족을 통해 누리길 간절히 원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어떻게 사도가 오늘 본문에서 빌립보 성도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 성도들에게 도전하는 ‘염려하지 않는 삶’, 곧 ‘평화와 만족의 삶’은 가능한 것일까요? 저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한 한가지 중요한 점검사항이 있는데, 그것은 무엇이 우리 인간을 불안으로 빠트리는 요인인지?를 살펴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첫째, “상실감” 때문입니다: 인간은 본래적으로 인간 존재 깊은 밑바닥에서부터 ‘고독과 외로움’에서 비롯된 알 수 없는 상실감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을 기독교적 시각에서 볼 때, 우리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는 데서 기인함이라 이해됩니다. 생명되신 하나님과의 단절은 우리 모든 인간의 존재 밑바닥에서부터 세상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깊은 상실감을 남긴 것입니다. 이 상실감은 알 수 없는 염려와 불안으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어릴 때는 부모와 가족으로부터 떨어지게 될 때 말할 수 없는 불안과 공포를 느끼게 되고, 청년의 시기에서는 또래집단에서 제외될 때 참기 힘든 고통을 경험하게 되어 심하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성인이 된 이후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가족이나, 직장조직 그리고 사회공동체, 취미공동체, 종교공동체 등과 같은 그룹 속에서 자신이 소속되기를 원하고, 그 안에서 각자 자기 존재의 이유를 발견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우리 인간은 ‘외로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그 어디인가에 소속되어 누리는 안정감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소속감은 단지 우리 인간이 ‘외로와서’라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우리 인간의 본질은 홀로 살아가도록 창조된 존재가 아님을 강하게 시사하는 것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특별히 우리 기독교는 그와 같은 의미에서 ‘우리 인간을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 연합되어 살아가는 존재’임을 매우 중요한 삶의 가치로 두는 종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함께 모여 예배 드리는 이 교회 공동체는 바로 예수님을 머리로 한 ‘그분의 몸’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성경은 특별히 우리 성도가 예수님을 머리로 그분의 몸으로 ‘하나로 연결될 때’ 참으로 축복된 존재가 되고, 능력과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공동체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역설적으로 강조됨을 봅니다. 다시 말해, 교회공동체가 말로 만이 아니라, 실제로 서로를 용납하고, 사랑으로 섬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복음 송가’ 가사처럼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임을 우리 공동체가 사랑으로 경험하고, 영적 가족의 소속감을 함께 누리고 있는 가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기자는 주의 몸된 공동체가 어떤 아름다운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브리서 10:24-2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브리서 10:24-25). 그럼으로 우리의 근원적 상실감을 우리를 창조하시고 또한 구원하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회복과 함께 하나로 불러 주신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받아들이고 함께 연합하는 안정감을 누릴 때 이 불안은 점점 더 사라질 것입니다.

둘째, “의무불이행”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의무불이행’은 크게 두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소극적으로는 ‘부담’ (가책)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과욕’ (불만족)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먼저 ‘소극적’이라는 의미는 적극적이지 않다는 뜻이요, 쉬운 말로 ‘좀 게으른 스타일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단지 신앙생활 뿐 아니라 매사의 삶에서 응당해야 할 바를 잘 행치 않고 미루는 경향을 보이는 것입니다. 잠언서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잠언 26:15)라고, 이토록 게으름에서 오는 부담을 토로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사람은 자신의 이런 삶의 자세를 스스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잘못되었음을 잘 알기에, 마음에 늘 ‘부담’과 ‘가책’을 품고 살게 되는 것이요, 이것이 평화가 없는 불안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의 ‘적극적’이라는 의미는 일반적으로 말해 ‘부지런하고 자기 발전의 의욕이 강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런 스타일은 다른 사람들보다 확실히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계획한 목표를 성취할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물론 이런 모습은 자신을 발전시키는 바람직한 자세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에게도 ‘불안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음을 봅니다. 아니 어쩌면 게으른 사람보다 더욱 강렬하게 초조와 긴장이 솟아오름을 보게 됩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열심히 살았지만, 힘써 달려왔지만 스스로 정해 놓은 목표와 야망이 너무 높아 현재의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과욕’이요 ‘불만족’이라고 불리어지며, 이로 인해 자기 스스로 설정한 높은 목표로 인하여 현재의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고 불안과 스트레스를 받는 것입니다. 만족과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셋째, “죄의식” 때문입니다: 제가 앞에서 우리 인간을 염려로 빠트리는 첫번째 요인으로 ‘상실감’을 말씀드렸고, 그 ‘상실감’은 본질적으로 성경에서 밝히고 있듯이 우리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가 단절되면서부터 기인한다는 점을 언급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 그 긴밀했던 생명과 사랑의 관계가 끊어지게 된 것일까요? 무엇때문에 ‘죄와 죽음’이 우리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불행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 인류의 첫 조상 아담의 범죄’로 인한 원죄를 물려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그분과 깨어진 관계를 가져오게 된 원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선언하듯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3)라는 것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힘과 노력으로 자신의 죄를 씻을 수 없고, 영광되신 하나님 앞에 설수 있는 자는 없는 것이다. 오직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는 깨끗이 씻음바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됨으로써 만이 깨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럼으로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 더 이상 여러분은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의 생명과 은혜’의 통치 아래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 까지만 생각해본다면, 우리 거듭난 성도에게는 더 이상 우리 안에 죄가 존재하지 않는 것같이 여겨 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동안 로마서를 비롯하여 여러번 신약서 말씀을 통해 성도 여러분과 살펴보았듯이 ‘우리 크리스챤의 실존은 <예수 믿는 순간 우리의 영 (신분)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죄와 사망이 지배하는 영역에서 은혜의 지배하는 영역으로 옮겨진 바 되었지만, 우리 육신 (=몸)은 여전히 죄가 거하는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소위 ‘구원파’라 불리는 일부 기독교 이단의 주장과 같이 ‘우리가 구원받았으면, 결코 두번 다시 죄를 짓지 않는다’는 비성경적 주장을 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주장은 별로 놀랍지 않은 것이 이미 초대교회때부터 성도를 현혹했던 ‘영지주의’사상 곧 ‘영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는 거짓 가르침에서부터 온 것입니다. 성경은 결코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일. 1:8-9)라고 사도 요한은 분명히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도 실수하고 죄 저지르는 존재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에도 우리 성도는 ‘죄를 감추고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죄를 고백함으로 하나님의 죄 용서와 깨끗케 하심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육신에 거하는 죄로 말미암아 우리를 염려로 몰고가는 ‘죄의식’에서 우리는 어떻게 자유로울수 있을 것인가가 이제 우리의 남은 마지막 질문일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성경 가운데서 가장 적절한 대답의 하나가 바로 오늘 말씀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v.6)라고. 이 말씀에서 먼저 주목해 볼 점은 사도는 “우리 크리스챤은 결코 염려하지 않는 존재입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와 반대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v.6a) 성도들에게 도전한다는 자체는, 안타깝게도 우리는 여전히 수없이 많은 염려에 얽매여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전제한 말씀인 것입니다. 사도는 ‘이제 더 이상 끊임없이 염려하는 육신의 습관을 그치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v.6b)고 성도들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그렇게 할 때 ‘우리 인간이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성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v.7). 바로 ‘오직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뢸 때’,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놀라운 평화로 우리를 지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귀신들린 아들’의 아버지가 예수께 나아와 아들의 귀신 쫓아 주시기를 구하며,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막. 9:18)라고 고했습니다. 주께서 그 아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나서, 제자들이 조용히 주님께 묻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막. 9:28)라고. 그때 주님은 이런 중요한 대답을 하십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막. 9:29). 저는 이 주님의 말씀에 우리 성도의 신앙의 승패가 달려 있다고 믿습니다. ‘기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단순히 남의 병을 낫게 하는 치유의 능력을 받는 것 뿐 아니라, 우리 성도가 살아가며 누려야 할 영적 승리와 풍성한 삶을 가져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이 기도의 중요성을 놓쳐 버리거나 무시하지는 않는지요?!

사도는 먼저 우리의 의지(선택)를 사용하라고 도전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v.6a) 하루에도 수십번, 수백번 스믈스믈 올라오는 <염려와 근심>이라는 영적 암을 우리는 과감하게 성령의 칼로 도려내고, 치유함 받고자 하는 굳센 마음이 있는지를 스스로 결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하나님(성령)께서 알아서 해 주시겠지!?’가 아닌 것입니다. 시편기자와 같이 자신을 향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시. 42:5)고 자신을 추스려 나가며 우리의 눈을 하나님께로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을 하나님께 아뢰라” (v.6b)는 의미일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 길게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이것은 한마디로 ‘하나님과의 더 깊은 영적 대화요, 교제’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말씀을 ‘자족’이라는 말씀으로 마무리하기 원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사도 바울이 기쁨으로 충만한 이유가 ‘복음의 진보’와 ‘그리스도를 소유’했고, 또한 ‘자족’했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자족’은 자신이 기뻐했던 모든 이유를 아우르는 결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삶은 비록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복음의 진보를 가져왔기에, 또한 보화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삶이기에 그는 자족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비록 가난하든지 부유하든지, 병들든지 부유하든지 그 가운데서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비결을 배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자족은 능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족’을 하나의 ‘성향’으로 말하지 않고, 자족은 ‘능력’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과 형편 가운데서도 자족할 수 있는 능력인 것입니다. 주의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이 자족함이 사도를 그 모든 극심한 핍박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샘솟는 평화와 만족의 삶으로 그를 인도했던 것입니다. 바로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의 영, 성령 안에서 그의 다스림 아래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인 것입니다. 바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스트레스와 긴장, 짜증과 염려라는 현대인의 고질적인 병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능력인 자족을 통하여 넘치는 기쁨 안에서 충만하게 살아가는 복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