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mber 19, 2017

“고난도 함께” (Share in His sufferings)

Preacher:
Series:
Passage: 로마서 (Romans) 8:17,18
Service Type:

고난도 함께”

(Share in His sufferings))

11-19-17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8:17,18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것 이니라 (Now if we are children, then we are heirs – heirs of God and co-heirs with Christ, if indeed we share in His sufferings in order that we may also share in His glory)

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없도다 (I consider that our present sufferings are not worth comparing with the glory that will be revealed in us)

<론>

오늘날 크리스찬의 가장 큰 문제의 하나는 바로 ‘고난’ 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라고 저는 이해 합니다. 마치 ‘믿음좋으면 만사형통하고, 고난이 많은 삶은 믿음에 문제가 많다는 식으로…’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는, 우리 주님께서는, 그리고 그의 참된 제자들은 이 고난의 문제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고난을 옳바르게 이해하는 출발점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충성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축복이 무엇인지를 ‘고난’ 이라는 통로를 통해 바르게 이해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사랑하는 자녀된 우리 각자의 삶속에서 허락하신 고난을 기쁨과 감사와 확신 가운데 받아들이고 이겨 나감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날마다 성장해 나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기대 합니다.

<론>

저는 그동안 몇번의 설교를 통해서 <로마서 8장> 에서 사도바울이 최선을 다해 우리 성도들에게 밝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크리스찬의 ‘놀라운 영적 신분과 영광된 상태’ 가 무엇인지를 살펴 보았습니다. 특별히, <8장 14~16> 에서 사도바울이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자녀 (=영적 출생)가 될뿐 아니라 (v.14), 내가 양자의 영을 받음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더욱 사랑하고 (v.15), 더 나아가서 나를 심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나의 영으로 더불어 증거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깨닫고 누리게 된다 (v.16) 는 점을 자세히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 크리스찬의 삶에 있어서, 처음 중생하는 첫 영적 출생뿐만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라고 진실로 고백하는 사랑의 깨닫음과 더 나아가서 성령께서 인쳐주심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증거하여 주시는 우리 크리스챤의 가장 영광스러운 성령 체험에 이르기까지 성령님은 우리 크리스챤의 삶에서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신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런 우리 성도들의 영광스러운 신분을 가장 최고조로 밝히고 난 다음 (v.14~16), 갑자기 ‘고난의 문제’ (The matter of sufferings) 을 들고 나옵니다. 성도여러분은 솔직히 ‘고난’ 이 반갑습니까? 고난을 사랑합니까?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고난’ 을, ‘핍박’ 을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고난의 정의’ (the concept of sufferings)에서 잘 이해할수 있습니다; ‘Baker’s Evangelical Dictionary of Biblical Theology’ 에서 보면, 고난은 육체적인 and/or 정신적인 고통/괴로움의 경험(the experience of physical pain and/or mental distress) 이라고 정의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고난이 달콤하고 우리 인간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자연스레 끌리는 그런것이다’ 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고난은 육체를 입고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서 고통스러우며 괴로운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사도바울이 오늘 <롬. 8:17,18> 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고난은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는 당연히 받아야만 하는 것이고, 고난이 없는 크리스챤은 상상할수도 없다> 라고 고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 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은 바울은 고난이 반갑고 즐거워서가 아니라, 고난의 가치를 이해했고, 그 고난을 통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도달할수 있는 지극히 영광스러운 삶을 성령의 은혜로 깨닫았기 때문 일 것 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16절> 까지 크리스챤의 놀라운 영적 신분을 선언하고 나서, 갑자기 이어서 ‘고난’ 이라는 꺼리끼는 주제를 끄집어낸 이유일 것 입니다. <이 ‘고난’ 이 없이는 결코 그리스도와 함께 받게될 유업에 합당한 후사 (heirs) 로서 합당치 않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이 ‘고난의 문제’ 를 언제나 그의 섬기는 교회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결코 빠트리지 않고 언급하는 이유는 그가 한사람의 ‘위대한 신학자’ 로서가 아니라, 언제나 <성도들을 삶의 현장에서 섬기고 영적으로 지도하는 한사람의 목회자 (영적 지도자)로서 대했다>는데 있습니다. 그 ‘직접적인 배경 로마서가 쓰여질 초대교회 당시 성도들이 당했던 환란과 핍박이 심히 컸기 때문 입니다. 어떤 성도들은 이렇게 질문 했을 것 입니다; “사도바울, 당신의 주장은 좋소. 우리 크리스챤의 신분이 크고 영광스럽다는 점은 아주 좋아요.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고통과 죽음의 위협 가운데 있소. 이것이 정말 영광스러운 삶이 맞다는 말이요!?” 라고 의문을 제기하는 것 입니다. 왜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하심을 받는 자녀라면, 이런 고통과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 주시지 않느냐는 것 입니다. 사도바울은 특별히 그가 섬기는 양들의 삶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고난의 문제’ 를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분명히 밝히고자 하는 것 입니다. 어떻게 우리 크리스챤이 이 ‘고난을 이해하고, 고난을 대처해야 하는지?’ 를 분명히 밝히고, 그의 영적 자녀들을 돕기를 원했던 것 입니다. 이 고난의 문제는 사도바울이 사역했던 초대교회때 뿐 아니라, 오늘날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 크리스챤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가 아닌가요?! 이제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성도들은 고난을 받아야만 하고, 사도바울이 선언했드시 그 고난을 통하여 어떻게 영광된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인지 살펴 보겠습니다.

  • 우리 성도들은 고난을 받아야하는 것일까요?” (Why should our Christians take sufferings?):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후사이기 때문 (Because we are heirs of God) 입니다; 지난번에 ‘후사들’ (heirs) 은 ‘부모나 그 누구로 부터 법적으로 그들의 재산을 상속받을 자’ 들임을 살펴 보았습니다. 다른말로는, ‘상속자’ 라고도 합니다. 사도바울이 ‘우리 크리스챤이 하나님의 후사’ 즉 ‘상속자’ 라는 점에서 강조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로마법에서 부모의 상속자가 되기 위해서 그 자녀가 받아야 할 훈련과 고통의 시간의 당위성’ 일 것 입니다. 이점을 잘 나타낸 것이 <갈라디아서 4장> 입니다. 여기에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성도들에게 ‘우리 크리스챤과 율법과의 관계성’ 을 이렇게 설명 합니다; ‘우리가 어렸을때는 가정교사와 같은 율법에 의해서 지도함을 받고 그 밑에서 통제함을 받지만, 이제 성장하고 나서는 그 율법의 종으로 있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유하다’ (갈. 4:1~7) 고 설명하면서, 우리 성도들의 율법과의 관계를 잘 설명하는 것 입니다. 율법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가 성장하고 그분의 상속자가 되기위해 반드시 필요한 가정교사요 후견인 (v.2) 이지만, 그것은 정해진 기간까지만 이라는 것 입니다.

이점을 ‘고난’ 에 적용해 봅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해할수 있을까요? 그것은 <고난 또한 율법과 같이 우리 하나님의 자녀가 그분의 상속자로서 성장하고 영광된 신분에 걸맞는 영적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라는 사실 입니다. 사도바울 당시, 로마시민의 특권과 부모의 상속자의 영광을 얻기위해 그 자녀들이 견뎌내고 치뤄내야 했던 과정은 매우 혹독했다는 것을 우리는 로마시대의 역사적인 문헌을 통해 목격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이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로마제국의 시민이 되고, 그부모의 유산을 물려 받기 위해서도 그 부모가 정해준 가정교사 밑에서 그토록 혹독한 훈련을 끝까지 견디고 참아내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긴다면, 하나님의 놀라운 상속자인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그 훈련과정인 고난을 끝까지 인내함으로 이겨 나가는 것> 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느냐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고난은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 속한 모든 유업을 물려 받기에 합당한 장성한 자녀의 영적 상태로 훈련하기 때문’ 이라는 것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후사로서 고난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그리고 자부심 가운데 받아가고 있습니까?

둘째, ‘그리스도의 고난 함께 나누어야 하기 때문 (Because we also  need to share in Christ’s sufferings) 입니다; 사도바울은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후사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받기위해 그분의 고난도 함께 나누는 것’ 이라고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여기에서 밝히고 있는 ‘고난의 정의’ 는 우리가 매우 조심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 입니까? 그것은 ‘내가 당하는 고난은 본질적으로 <나의 고난/my sufferings> 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 His sufferings>이라는 것 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심각하게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내가 겪는 고난은 나의 고난이기 이전에, 나의 주인되시는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것 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산상수훈에서 자신으로 인해 우리가 겪게 될 고난이 얼마나 축복되고 영광스러운 것인지의 역설적인 진실을 밝히신 이유 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 5:11,12) 라고.

사도바울이 이 고난의 문제를 설명하면서, 이 고난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 이라고 설명 합니다. 그 말의 뜻은 ‘그리스도 때문에 당하는 고난’ 이라는 뜻 입니다. 물론, 고난이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실수와 죄로 인한 고난, 나를 더 영적으로 훈련 시키기 위한 고난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의 중심을 사도바울은 지금 ‘그리스도의 고난’ 이라고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된 크리스챤의 신분은 ‘그리스도의 생명’ 을 통해, ‘그의 십자가 위의 죽으심과 부활’ 을 통해서 가능 하게 되었다는 것이요,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되어짐을 통해서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 (롬. 6장) 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만 하는 것은 ‘그분의 생명 뿐 아니라 그분이 받으셨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는 점’  이라는 것 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자의 당연한 삶의 자세라는 것 입니다. 주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 7: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다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말을 지켰은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 15:18,20) 고. 이 고난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 하는 것 입니다. (벧전. 4:12~16/ 골. 1:24,25) 사도바울이 고백했드시 자신의 최대의 기쁨과 영광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육체에 채우( )” (. 1:24,25) 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여러분의 삶속에서 채우고 있습니까? 그것을 즐거워 합니까?

셋째, ‘장차 주어질 영광과 족히 비교할수 없기때문 (Because our present sufferings are not worth comparing with the glory, will be revealed in us) 입니다;  ‘장차 주어질 영광과 족히 비교할수 없다’ 는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현재의 고난> 과 <미래의 영광> 을 한번 비교해 보자. 이것은 <미래의 영광이 현재의 고난에 비교조차도 할수 없을 정도로 크고 가치있다> 는 뜻 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 <밭에 감추인 보물> 로 비유하시면서, ‘만약 사람이 밭을 갈다가 보화가 거기 묻힌것을 발견하게 된다면, 곧 바로 가서 자기가 가진 전 재산을 모두 팔아서라도 그 밭을 사지 않겠느냐!?’ 고 우리에게 도전하고 계십니다 (마. 13:44). 바로 우리 성도가 주님의 고난을 나눠 가지고, 그분과 함께 고난에 동참하는 본질적인 이유도 이와 같음을 저는 깨닫습니다. 장차 밭에 감추인 엄청난 보화를 나의 얼마 않되는 전 재산을 투자하는 구입하는 것과 비교할수 없을만큼, 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장차 주와 함께 받게 될 유업은 크고 영광스럽다는 것 입니다. 비교가 불가능 하다는 것 입니다.

사실, 이 세번째 ‘고난’ 에 대한 사도바울의 설명은 매우 소망스러우면서도, 사실 막연하다고 느끼는 성도들이 적지 않음을 저는 잘 압니다. 사도바울이 지적한 ‘앞으로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게 영광된 삶’ 은 매우 감격스럽고, 현재의 고난과 비교할수 없도록 크다는 것은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가슴에 잘 와 닿지 않기 때문 입니다.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압니까? 그것은 ‘이런 영광스러운 성도의 삶은 내가 상상하거나 스스로 설득함으로서 이해되거나 깨닫아 질수 있는것이 아니다’ 는 점에 있습니다. 그럼 무엇 입니까? 여기에 다시한번 ‘성령님의 우리 성도들을 향한 절대적인 영향력’, ‘그분의 도우심과 은혜의 절대성 필요성이 있음을 우리는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우리 성도의 가장 영광스러운 상태, 즉 성령께서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 하신다고 선언하고 나서 곧 바로 ‘고난’ 또한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비로소 밝힌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성령의 증거하시는 은혜 없이는 ‘고난의 용광노’ 를 견뎌낼 자가 없기 때문이요, 성령의 증거 없이는 ‘고난을 견뎌야 할 이유도, 능력도, 필요성도 도무지 깨닫을수 없기 때문’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영으로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라고 증거하심을 통해 주의 고난에 동참하고자 하는 확신과 기쁨과 이유를 분명히 붙잡고 있습니까?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고난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날마다 깨닫아 나가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여러분의 남은 삶속에 채워 나가고 있습니까? 고난은 결코 달콤하고 즐거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픔이요, 고통이요, 꺼리낌 입니다. 누구도 우리의 자연적인 상태가 ‘고난’ 을 즐거워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베드로은 이렇게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있는 자로다 영광의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벧전. 4:13,14) 라고. 바로 우리 위에, 그리고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아들이요 딸임을 증거하시는 성령님의 인치시는 증거를 받아 그리스도의 고난에 충성되게 동참하고, 즐거움과 기쁨으로 고난을 이겨나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 합니다. 이 고난을 통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지지 않을 정금과 같은 귀한 믿음의 삶을 소유하는 하나님의 자랑스러운 아들과 딸 모두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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