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mber 12, 2017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All who are weary and burdened)

Preacher:
Passage: 마태복음 (Matthew) 11:28~30
Service Type: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All who are weary and burdened)

11-12-17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11:28~30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Come to me, all you who are weary and burdened, and I will give you rest.)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Take my yoke upon you and learn from me, for I am gentle and humble in heart, and you will find rest for your souls.)

30 이는 멍에는 쉽고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For my yoke is easy and my burden is light.”)

<론>

우리 주님은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진정으로 소망스러운 초청을 하십니다. 그것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8) 는 것 입니다. 예수님의 이 초청의 내용은 무엇이고, 또 누구를 대상으로 하시는 말씀일까요? 어쩌면 우리 모두는 한사람도 예외없이 각자의 무겁고 힘든 삶의 무게로 피곤하고 지친 삶을 날마다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 모두는 각자의 상황과 형편에 관계없이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모두 예수님의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는 자비로우신 부르심에 응답하고, 그분안에서 진정한 안식을 누리는 축복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소원 합니다.

<론>

오늘 <마태복음 11장 28~ 30절>, 끝절까지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향한 주님의 초청’ 은 언제나 저에게 말할수 없는 위로와 소망을 줍니다. 어떤 나의 잘못과 실패 가운데서도 조건없이 받아 주시고 또 한번의 기회를 주시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 말 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은혜로운 주님의 초청을 옳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오늘 이 본문말씀이 ‘성경문맥 안에서’ 어떻게 사용되어졌고, 어떤 의미로 쓰여 졌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우리가 꼭 살펴보아야 할 옳바른 성경이해의 첫 걸음이라 하겠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11장> 은 크게 세단락으로 나눠집니다; 그 첫번째 단락은 <침례요한에 대한 주님의 평가>가 ‘1~19절’ 까지 이어 집니다. 두번째 단락은 ‘20~ 24절’ 까지인데 <회개하지 않는 마을에 대한 주님의 엄중한 경고> 가 선포 됩니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 세번째 단락은 ‘25~30절’ 끝절까지의 <무거운 짐진 자들을 향한 주님의 초청> 이 그것 입니다.

첫단락에서 ‘침례요한’ 은 우리가 잘아는데로 ‘그리스도의 오심’ 을 알리고 그 길을 준비한 위대한 선지자 입니다. 주님의 그에 대한 평가처럼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침례 요한보다 인물은 없었다” (v.11a) 는 것 입니다. 그러나, 그의 한계가 무엇인지도 주님은 지적 하셨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로 부터 시작되는 ‘새시대’ 에 속한 자가 아니라 ‘옛시대’ 에 속한 자 였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바로 하늘 나라에서는 아무리 작은 이라도 요한보다 크다” (v.11b) 는 것 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v.6) 고 침례요한의 의구심에 대해 안타까워 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이 하신 말씀이 ‘침례요한이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이 아님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그는 구약의 수많은 성도들과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새 언약시대’ 에 속한 자가 아니다는 뜻 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은 지극히 어린 심령이라 할찌라도 새시대에 속한 우리 모두에게는 열려 있는 것 입니다. “ ~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 하나이다” (v.25) 라고… 비록 영적으로 아직 어린 초신자들에게도 영적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그리스도 안에 감추인 비밀을 드러내 보이셔서 깨닫게 하는 것 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새언약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놀라운 신분과 은혜에 감사 합니까?

그리고 나서, 둘째 단락에서 ‘고라신과 벳새다, 그리고 가브나움’ 에 대한 강한 책망을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어떤 마을보다도 주님의 권능과 복음의 메세지를 더 많이 들었음에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 입니다. 중요한 포인트는 ‘회개하지 않은 굳고 완악한 마음’ 입니다. 회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의 죄를 깨닫음으로, 그 죄된 자리에서 돌아서는 것’ 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내 죄를 인식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죄의 자리에서 떠나는 것까지가 바로 회개인 것 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많은 능력과 은혜를 경험하고도 여전히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 임하게 될 엄중한 심판을 경고 하셨습니다;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v.23) 고.

그렇게 심판의 말씀을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선포’ 하시고 나서, 주님은 이제 ‘용서와 사랑의 초청’ 을 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이제 그러면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볼 점은 이것 입니다; 누가 과연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인까요? 하는 것 입니다.

첫째, ‘세상의 죄의 짐으로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프랑스의 작가, 알베르트 카뮈는 그의 철학에세이 ‘시지프스의 신화’ 에서 ‘부조리 (absurdity) 한 인간의 삶’ 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책에서 카뮈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시지프스를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신의 노여움으로 인해 큰바위를 산 꼭대기 위로 밀어 올리고 그것이 굴러 떨어지면 다시 밀어 올리는 끊임없이 반복된 일을 감당해야만 하는 형벌을 받게 됩니다. 오늘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은 카뮈의 소설의 주인공, 시지프스처럼 그 원인을 알지 못하고 그 끝을 알수 없는 삶의 부조리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삶의 고통’ 이라는 무게를 힘겹게 지고 날마다 돌을 굴려 올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문제는 이 부조리한 삶이 언제 끝날지 알수 없다는 것이요, 해결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많은 사상가, 철학자, 그리고 도덕주의자들은 그들이 가장 정직하게 고백할수 있는 말은 ‘그 수고와 고통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는 것 입니다. 그리고 ‘인생은 부조리하다’는 것 입니다. ‘인생은 불합리하고 그 의미를 알수 없다’ 는 것 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발견한 정직한 고백 입니다. 오늘 주님의 초대는 일차적으로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모든 인류를 향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초청인 것 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든 인간은 한사람도 예외없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었고, 죄와 죽음이 우리를 지배하는 삶을 살게 되었기 때문’ 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하게)” (. 3:23) 된 것 입니다. ‘죄와 사망이 왕노릇’ (롬. 5:21) 하게 된 것 입니다. 주님은 이 끝없는 인생의 불합리함과 무의미함속에서 절망하며, 그 가운데 또다시 삶의 무거운 다리를 내디디는 모든 인생들을 향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8) 고 은혜와 긍휼의 초청을 하십니다. 이 시간, 우리 가운데 단 한사람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아직 영접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분을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 자녀의 권세를 누리고 주께서 약속하신 참된 안식을 누리시는 축복이 임하시길 간절히 소원 합니다.

둘째, ‘죄의 짐에서 벗어날수 없으매 절망하는 입니다: 이 두번째 ‘죄의 짐으로 절망하는 자’ 와 첫번째의 ‘죄의 짐으로 고통하는 자’ 와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두번째 사람은 ‘자신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이유를 알고 있다는 것’ 입니다. 그것이 ‘육신에 속한 죄’ 때문 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통해 내 속에 선한 것이 없으며, 죄가 내게 왕노릇 하고 있다는 것’ 을 절실히 깨닫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러나, 이 두사람의 공통점은 ‘둘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다는 것’ 입니다.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로, 내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지 못한 것 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사람은 비록 성령의 빛으로 자신의 죄와 사망의 무거움 짐을 처절하게 인식해 가지만,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함으로 절망하는 자들인 것 입니다. <로마서 7장> 에서 사도바울이 묘사한 영적으로 갈등하고 고뇌하는 한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악은 행하는도다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 7:19,24) 이사람은 첫번째 주님의 초청의 대상인 ‘인생의 불합리함과 의미없음’의 이유도 원인도 모르는 자가 아닙니다. 다행히, 이 사람은 ‘이 힘들고 무거운 짐이 원인이 무엇 때문인지!?’ ‘고통과 괴로움의 시작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 죄의 결과인 것’ 입니다. “내 속에 거하는 죄” (롬. 7:20) 때문 인것 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다” (롬. 7:14) 는 것을 알기 때문 입니다. 어떻게 압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영, 성령을 비춰 주심으로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 입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누구도 자신의 죄를 깨닫을수 없고, 하나님의 율법을 행하고자 하는 선한 마음을 품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구원’ 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고 그리스도인은 절규할수 없습니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이미 건져 주신지 그는 잘 압니다.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 주셨음을 그는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은 성령의 빛으로 자신의 영적 상태를 새벽미명처럼 점점 더 깨닫게 해 주신 자들에게 은혜의 초청을 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셋째,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안식을 주실분 임을 믿는 입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은 단순히 교리적으로나 이론적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 성령을 통해서 진실되게 평화와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 입니다. 저는 한가지 성도 여러분에게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한다’ 는 것을 어떻게 이해 합니까? 이것이 어떤 상태라고 이해 합니까? 이것은 주님의 막연하고 알듯말듯한 상징적인 약속이 아닙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확증하여 주시는 삶이기 때문 입니다. 다시말해, 내가 경험하고, 이해하고, 부인할수 없는 진실한 삶의 체험을 통해 성령께서 증거하시는 역사이기 때문 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최종적인 영광된 삶이 바로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 멍에는 쉽고 짐은 가벼움이라” (v.28~30) 고 초청 합니다. 결론적으로, 누가 과연 이 초대를 받아 들일까요? 그는 나사렛 예수님이 ‘자신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모두 벗게 하시고, 편히 쉴수 있게 하실수 있는 유일한 분임을 신뢰하는 자’ 일것 입니다. 나에게 영생을 허락하실 뿐 아니라, 약속하신 성령을 통하여 진정한 풍성한 삶을 허락하시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임을 신뢰하는 자 입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불안과 불만과 불안정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믿지 않는 자들처럼 힘들게 살아가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함으로 진정한 자유와 안식을 소원하는 자일 것 입니다. 이 평화와 안식이 말만이 아니라, 삶에서 2000년 교회 역사를 통해 진실한 성도들의 삶가운데서 언제나 넘쳐 흘러 나았음을 믿는 자일 것 입니다. 예수님은 명절 끝날에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 7:37,38) 고. 그리고, 이것이 무슨 뜻인지에 대해 사도요한은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 7:39) 고 주님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고 하신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바로 ‘성령의 임하심’ 입니다. 아니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듯이’ 충만하게 부으시는 ‘성령충만’ 의 역사인 것 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의 충만하신 임재 가운데 여러분에게 참된 안식을 줄수 있음을 신뢰하고 그렇게 간구 합니까? 그리고 그 안식을 받았습니까?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은혜로운 약속은 과연 현실적으로는 이루어질수 없는 신기루와 같은 것 일까요? 죽어서 천국에서나 경험할 먼 훗날의 이야기 일까요? 물론 그것이 아니다면, 여러분과 저는 주님의 이 안식을 오늘 이 시간부터 누려야만 할 것 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 14:17) 라고 사도바울은 성령 안에서 누리게 되는 의로움과 평화와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하신 임재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통치함을 받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고 사도 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하신 은혜는 주의 사도들과, 수없이 많은 믿음의 증인들을 통해 이 평화와 기쁨의 샘솟듯 하는 삶으로 열매 맺었음을 우리는 2000년 교회역사를 통해 목격 합니다. 이 진정한 평화가, 주님의 안식이 성도 여러분의 삶속에 넘쳐 나시길 소원 합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주님의 기쁨과 평화가 성령님의 은혜로 성도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의 삶속에서 오늘 이 시간부터 영원토록 흘러 넘치기를 소원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