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22, 2023

“광야 가운데” (In The Wilderness)

Preacher:
Series:
Passage: 창세기 (Genesis) 28:16-17
Service Type:

“광야 가운데”

(In The Wilderness)

1-22-23

본문말씀: 창세기 (Genesis) 28:16-17

16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When Jacob awoke from his sleep, he thought, “Surely the Lord is in this place, and I was not aware of it.”)

17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나님의 문이로다 하고 (He was afraid and said, “How awesome is this place! This is none other than the house of God; this is the gate of heaven.”)

[설교 요약]

오늘 말씀의 배경이 되는 <창세기 28장>은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는 길에서 벌어진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아버지 이삭은 야곱을 진정으로 축복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 (v. 3-4)라고. 이삭은 앞장 <창. 27장>에서는 속아서 야곱을 축복했지만, 지금은 진정으로 그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또한 야곱이 가나안의 딸 가운데서 아내를 (형 에서처럼) 고르지 말고, 외삼촌 라반의 딸 (외삼촌 집안은 하나님을 믿는 가정) 중에서 아내를 택하라고 당부합니다.

이제 야곱은 형을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 (서울~부산 왕복거리)으로 먼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그가 한곳에서 날이 어두워져 돌을 베개하고 잠을 잤는데 매우 놀라운 꿈을 꾸게 됩니다. “꿈에 본 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 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고, 또 본 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v. 12-13a) 라고.

놀랍게도 하나님은 야곱이 자신 혼자라고 여겼던 광야에서 꿈에 나타나셔서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v. 15)

그렇다면, 무엇이 야곱에게 있어서 광야일까요?그곳은

  • ‘고통의 장소’ 입니다: 야곱 한사람만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광야는 실로 우리 모두에게 ‘고독과 고난’의 장소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건강하고, 명예를 누린다 하여도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삶은 그 ‘죄와 죽음’의 막강한 힘으로 인해 ‘고통의 광야’가 되는 것입니다 (롬. 7:19~24).
  •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이 광야는 고통의 장소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의 장소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나서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v.16)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광야의 인생길에서 우리의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진정한 이유인 것입니다.
  • ‘하나님의 훈련의 장소’입니다: 성경에서 야곱만큼 혹독하게 하나님의 훈련을 받았던 인물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셨기에, 그의 ‘움겨잡고 빼앗는’ 모난 성품을 깍아 나가고 성숙된 인격으로 다듬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이 광야는 우리 모든 성도들에겐 ‘영적 훈련의 장소’인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삶의 광야가 변하여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명과 기쁨의 동산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지난 주간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이 땅은 실로 광야와 같은 곳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거칠고 마음 둘곳 없는 광야, 두렵고 들짐승과 같은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 광야입니다. 현재 여러분이 통과하는 광야는 어디입니까? 그 광야에서 여러분은 안전합니까? 만족합니까? 이 광야 같은 세상 가운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러나 이 광야를 통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되며, 두려움이 변하여 확신과 능력으로 변화되는 복된 장소 되기를 기대합니다.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이 걸어가는 힘든 광야가 변하여 역전의 축복된 장소가 되는 삶이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이 되는 <창세기 28장>은 이삭과 리브가의 쌍둥이 둘째 아들인, 야곱이 형을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에 잠시 피신해 있고자 떠나는 데서 시작됩니다. 야곱이 형과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형 에서의 <장자의 축복>을 가로챘음으로 에서가 극도로 야곱을 미워했고, 그를 죽이고자 함을 어머니 리브가가 눈치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머니 리브가는 맏아들 에서의 노기가 풀리기까지 잠시동안 둘째 아들 야곱을 그의 외삼촌이자, 자신의 친정 오빠인 라반의 집에 피해 있으라고 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먼저 <창. 28장>에서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떠나기 전에 먼저 아버지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을 하고, 또한 분명히 당부하고 있음을 유의해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첫째> 앞서도 잠간 언급했지만, 야곱은 엄마와 합작해서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축복권을 가로챘던 것입니다. 그 사건이 바로 앞장 <창. 27장>에서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 사건에 이어 오늘 <창. 28장>에 이어지는 스토리를 통해 야곱이 형의 분노를 피해 도망가는 장면에서 그 태도가 180° 바뀐 한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야곱의 아버지 이삭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속아서 야곱에게 축복을 주지만, 나중에는 자발적으로 온 진심을 다해 그를 축복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일까요? 저는 이런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깨닫았다고 믿습니다. 자기의 장자권을 경홀히 여기고 야곱에게 판 에서가 아니라 비록 올바른 방법은 아닐찌라고, 간절히 ‘장자의 축복권’을 소망했고 그로 말미암아 혹독한 훈련의 대가를 지불하겠지만,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받을 합당한 아들임을 이삭을 깨닫았다고 말입니다.

그럼으로 이것이 <창. 28장>을 시작하면서 아버지 이삭이 이와 같이 야곱을 진정으로 축복하는 이유라고 저는 믿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게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v. 3-4)라고.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넘치게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축복이요, 동일하게 자신에게 이어졌던 복을 남김없이 지금 야곱에게 부어지도록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삭은 비록 자신이 고기를 좋아함으로 큰 아들 에서를 편애하긴 했지만, 하나님의 뜻은 야곱을 통해 그 장자의 축복이 이어짐을 이 순간 확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이삭은 야곱을 축복할 뿐 아니라, 또한 그에게 분명한 당부 (=명령)를 잊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방여인, 즉 가나안 사람의 딸 중에서 아내를 찾지 말고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으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외삼촌의 집안은 요즘으로 하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의 집안’이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 이삭은 그의 아들이 신앙의 결혼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사실 이삭과 리브가 부부는 이 일로 매우 상심하고 힘들어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큰 아들 에서가 가나안 땅의 이방여인 헷족속의 딸을 아내로 맞음으로 인해 깊은 근심에 빠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창. 27:46). 언제 기회가 될 때,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에서는 세상적으로는 활달하고 포용력 있는 장점을 가졌지만, 영적인 면에 있어서는 전혀 분별력이 없고 불신앙적인 삶을 거침없이 살았습니다. 그는 이방여인이 그의 부모를 기쁘게 못하고 그들의 근심이 되게 했고, 그의 부모가 야곱에게 외삼촌 가정과 같이 신앙에서 자란 여인과 결혼하라는 당부를 들었음에도 그는 아브라함의 서자요, 그 아내 사라의 여종인 애굽 여인, 하갈에게서 태어난 ‘이스마엘의 딸’을 아내로 다시 맞았습니다. 에서는 부모가 어떤 결혼을 기뻐하는지를 안타깝게도 영적으로 분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v. 6-9).

이와 같이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은 이후에 형으로부터 극심한 분노로 인해 외삼촌 집으로 먼길을 떠나게 되었음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이 가는 외삼촌 라반의 집은, 자신의 집이 있는 ‘브엘세바’에서 그곳 ‘밧단아람’ (=하란)까지 대략 800~900km를 걸어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거리는 ‘서울과 부산’을 왕복하는 거리에 해당합니다. 오늘날 처럼 비행기나 기차 혹은 자동차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는 오직 걸어서 가야만 상황이었기에 그 장거리 여행에 어떤 위험과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을지는 짐작하기도 힘든 것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야곱은 길을 떠나게 되고 오늘 본문 앞의 <10절>에서 그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v. 10-11)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사건의 배경이 됩니다.

그동안 야곱이 자란 성장배경에서 본다면, 형 에서가 들사람이 되어 산으로 들로 쫓아다니며 짐승을 사냥한데 비해, 야곱은 평소 집에서 엄마 주위를 맴도는 ‘마마보이’ 처럼 집사람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랬던 그가 하루 아침에 광야로 내쫓긴 것입니다. 아니 그가 쫓겨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초한 잘못된 행동의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광야로 몰린 삶은 누구를 원망할 수 없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에게 있어서 한없는 위로가 되고 또한 감격하게 되는 것이 있음을 우리는 분명히 목격하게 됩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 외롭고 단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광야생활’의 그 첫출발점에서 야곱을 만나 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유명한 ‘사닥다리의 꿈’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 꿈의 내용이 <12절>에서 오늘 본문 바로 앞 절인 <15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꿈에 본 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 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고, 또 본 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 (v. 12-13a) 과연 야곱이 꿈에 목격한 것은 무엇일까요? 여기에 대해 ‘매튜헨리’는 이렇게 주석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하늘과 땅 사이에 끊임없는 교통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영의 눈을 열어서 볼 때, 세상만사의 모든 이치가 하늘의 하나님께서 섭리하심으로 시작되고, 끊임없이 그 만드신 땅의 피조물과 교통하심으로 운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순간 하나님은 야곱의 영의 눈을 이런 하나님의 자신을 향한 섭리하심을 보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가 바로 이 사닥다리라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길과 진리요, 생명되신 주님’ (요. 14:6)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 자신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보게 될 큰 역사를 제자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진실로 ~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요. 1:51)고.

그렇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돌 베개하고 잠잔 그 위로 하늘에 닿는 사닥다리를 통해 하나님의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야곱에게 할아버지 아브라함, 아버지 이삭에게 주신 동일한 축복을 주셨습니다. “ ~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v. 13-14)라고. 그런데 만약 하나님께서 여기까지만 말씀하셨다면, 아마도 야곱은 여전히 불안했으리라 짐작합니다. 그의 이런 심경을 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이렇게 신실하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v. 15)

이제 그렇다면, 제가 오늘 성도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 야곱에게 있어서 광야일까요? 하는 것입니다. 우선 야곱에게 있어서 광야는 첫째, ‘고통의 장소’ 입니다: 앞서도 살펴보았듯이, 야곱은 ‘루스’라는 이름의 지역을 통과하면서 불안한 미래 가운데 두려워했습니다. 사랑하는 부모를 떠나 이 광야 가운데 홀로 남겨진 신세가 된 것입니다. 어쩌면 한국과 다른 지역에서 부모를 떠나 멀리 이곳 미국으로 유학 공부하러 온 청년 여러분의 모습이 ‘광야에 홀로 남은 야곱’과 같음을 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부모와 떨어져 왔든, 혹은 함께 왔든 상관없이 우리 인간의 삶은 거친 광야요, 고독과 고통의 바다와 같은 것임을 여기 예배에 참석한 성도 여러분은 모두 이해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비록 젊은 청년이라 할찌라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인생의 광야가 이토록 고독과 고통을 가져오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 본질적인 이유는 우리 인간의 죄로 인함이요, 그 죄가 가져온 죽음 때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 모든 인간의 실존인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실존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너무도 적나라하게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19,24)라고. 우리 모두는 세상의 도덕과 본래적인 양심을 통해 죄를 미워하고 악을 거부하며 살고 싶지만, 그 죄의 막강한 힘 아래로 끌려가는 인간의 절망적인 실존을 바울은 “내가”라는 1인칭으로 자신에게 투영하여 토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은 죄라는 막강한 힘과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암울한 그림자로 인해 고독할 수 밖에 없고, 고통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무엇보다도 우리 모든 인간이 마주하는 광야인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장소’입니다: 제가 앞에서 광야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고통받고 고독으로 신음하는 장소라고 말씀드렸는데, 이것은 역설적으로 이 광야는 또한 그로 인해 하나님을 참되게 만나는 장소가 되어질 수 있음을 우리는 야곱을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야곱이 이 외로운 광야에서 한 꿈을 꾸고나서 온 세상이 전혀 새롭게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꿈은 무엇입니까? 자기가 누워있는 그 위로 사닥다리가 하늘에 닿아 있고, 그 위를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며 하나님께서 그 위에서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꿈입니다. 이 꿈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이 홀로 일 것 같은 광야 가운데서도 야곱과 함께하시고 그를 떠나지 않으시고, 버리시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v.15) 하나님은 이 광야에서 뿐 아니라, 야곱이 어디를 가든지 그와 함께하시며 그를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가 뜻한바를 다 이루고 이 곳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때까지 하나님은 그를 떠나지 않으시겠다고 맹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영원토록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광야에서 야곱이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돈도 아니요, 명예도 아니요, 학위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요, 그분의 끝까지 지켜 주심입니다. 이것이 동일한 여러분의 최우선적인 필요 아닐까요?!

여기서 한가지 이해하게 되는 것은 ‘왜 하나님은 갑자기 야곱에게 나타나신 것일까?’라고 질문을 해보게 됩니다. 그 대답은 하나님이 갑자기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미 야곱이 태어나던 그 순간부터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문제는 야곱이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비록 야곱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할아버지로 두었고, 이삭을 아버지로 둔 엄청난 믿음의 집안에서 자라났지만 그는 이 광야에서 홀로 하나되기 전까지는 하나님께서 이처럼 신실하게 그와 함께 하심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만큼 영적으로 어두웠다는 것입니다. 앞서 보았듯이, 그가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 광야가 ‘루스’에 불과했지만, 그분을 만나고 나서는 “벧엘” 곧 ‘하나님의 집/문’이 된 것입니다. 바로 이 광야가 하나님을 만나는 최적의 장소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왜 야곱이 다음과 같이 고백하는지에 대한 이유입니다. “야곱이 잠을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v.16)라고. 과거에도 교회를 다녔고, 믿는 가정에서 자라났지만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사랑의 관계>가 맺어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광야에서 야곱은 비로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복된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인생이라는 고난의 광야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셨습니까?

셋째, ‘하나님의 훈련의 장소’입니다: 우리 모두 압니다. 하나님의 연단과 훈련이 없으면 우리는 결코 영적으로 성숙될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은 어리석은 부모님처럼 우리를 방치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때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훈련과 연단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why me?!’라고 아프게 부르짖습니다. 때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영적 시험에 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과 인격적 관계 (=영생의 관계)를 맺은 그의 자녀를 결코 방치해 두시지 않습니다. 위대한 예술가의 손에서 거칠고 모난 돌덩어리는 깍여 나가고 점점 더 아름다운 조각작품으로 탄생하듯이, 하나님은 그의 자녀를 결코 무관심하거나 방치시켜 두시지 않는 것입니다. 훈련과 연단으로 깍아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된 야곱의 삶을 읽어가다 보면, 그가 이 광야를 거쳐 지나고나서 20여년의 세월을 지나 또 한번의 위기의 상황을 맞게 됨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딸 디나의 강간사건으로 그의 아들들로 인한 피 비린내 나는 보복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야곱이 가장 먼저 시급하게 한 것은 그의 식구들과 그 딸린 모든 자를 데리고 바로 이곳, 벧엘로 다시 올라갔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야곱의 본질적인 변화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창. 35:3) 여기서 볼 수 있는 야곱은 한층 더 영적으로 승화되고, 그 어떤 위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나아가 문제를 해결함 받고자 하는 것에 최우선 순위를 둠을 보게 됩니다. 그는 딸 디나의 강간당함과 그로 인한 아들들의 잔인한 보복사건을 이제 더 이상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이제까지 자신과 가족들에게 남아있는 우상을 제거하는 것을 진정한 문제해결로 파악했습니다. 그는 자기들 안에 있는 모든 영적 불순물, 모든 눈에 보이는 또한 보이지 않는 우상들을 거두어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정결하게 의복을 갈아 입었습니다 (창. 35:1-5). 모든 환경을 통하여 훈련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 더욱 성숙되고 아름답게 빗어져 가는 야곱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야곱과 같이 모든 상황을 통하여 여러분을 훈련하심으로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지지 않을 정금같은 믿음의 삶’으로 빗어 나가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훈련의 손길을 신뢰하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현재 여러분의 광야는 어디입니까? 바라기는 이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여러분의 광야가 변하여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명과 기쁨의 동산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광야 같은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그 신실하심으로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인내함으로 거칠고 모난 우리 각자의 성품이 깍여 나감으로 아름답고 장성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변화되는 복된 성도 여러분의 인생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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