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15, 2023

“푯대의 삶” (A Life of The Goal)

Preacher:
Series:
Passage: 빌립보서 (Phillippians) 3:12-14
Service Type:

“푯대의 삶”

(A Life of The Goal)

1-15-23

본문말씀: 빌립보서 (Phillippians) 3:12-14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 가노라 (Not that I have already obtained all this, or have already arrived at my goal, but I press on to take hold of that for which Christ Jesus took hold of me.)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Brothers and sisters, I do not consider myself yet to have taken hold of it. But one thing I do: Forgetting what is behind and straining toward what is ahead,)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 가노라 (I press on toward the goal to win the prize for which God has called me heavenward in Christ Jesus.)

[설교 요약]

            저는 지난 2주간 ‘서로 사랑하자’ 그리고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라’는 제목의 메시지에 이어 오늘 신년 마지막 메시지로서 “푯대의 삶”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 좇아 가노라” (v.13-14)고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이 바울이 푯대를 삼고 추구한 것일까요?그것은

  •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 (That was apprehended of Jesus)입니다: 사도는 <12절>에서 “~ 오직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 가노라” (v. 12)고 고백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예수께 잡힌 바 된 것’일까요? 이것은 ‘완전한 사람’, ‘온전히 이룸’이라는 의미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성품’을 뜻합니다.
  • 앞에 있는 것” (What is ahead)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히. 11:1)라고 정의하듯, 푯대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달려가는 것입니다 (v.13).
  • 부르신 부름의 상” (The prize for which God has called us)입니다: 사도는 또한 “(나는) 푯대를 향하여 ~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 가노라” (v.14)라 고백합니다. 이 ‘부르심의 상’은 마지막 날 ‘의인의 부활’로 다시 살아나며, 천국에서 누리게 될 ‘영생의 기쁨과 의의 면류관’입니다.

마치 마라톤 선수가 결승점을 향해 달려가듯, 오늘 사도 바울은 우리 크리스챤의 삶은 그 ‘결승점을 향하여 달려가는 삶’이라고 상징화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비젼의 삶’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우리 각자에게 적용해 본다면, 우리의 신앙과 전공공부와 직업 그리고 삶 전체가 ‘푯대’ (=목표)를 향해 잘 연결되어 있을 때, 진정한 ‘비젼의 삶’을 사는 것임을 저는 믿습니다.

그럼으로 이 ‘비젼(=푯대)의 삶’의 중심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계셔야 합니다. 바라기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연합함으로 ‘공부’와 ‘직장’과 그 모든 삶의 영역이 연결됨으로 마지막 골인점을 향해 달려가는 성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지난 2주간 신년 메시지로서 ‘서로 사랑하자’ 그리고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라’는 메시지를 나누었습니다. 오늘 신년 메시지 마지막 시간으로 “푯대의 삶”이란 제목으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이것이 곧 ‘비젼의 삶’ 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만나고나서 그의 마지막 호흡이 멈추는 순간까지 늘 추구했던 삶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그 목표, 곧 푯대를 향하여 날마다 달려간다고 오늘 말씀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저는 우리 크리스챤의 삶의 목표는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 것일까를 큰 그림에서 살펴보는 시간되기 원합니다. 바라기는 우리 각자가 주님 만나는 그날까지 앞을 바라보며 달려갈 그 푯대는 과연 무엇인지를 오늘 말씀 가운데서 더욱 깨닫아 나가고, 깨닫은 만큼 각자의 삶을 통해 추구해 나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저는 수년전부터 집사람과 함께 집근처의 ‘헬스센터’에서 일주일에 두 세번 정도 건강을 위해 운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다니다 보면 한가지 재미있는 현상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학기초나 특히 새해가 되면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그러다가, 한주 두주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한명 두명 빠져나가다가 다시 종전처럼 비슷한 숫자의 사람만 남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새로운 시작의 시기인, 새학기나 새해가 되면 소위 ‘새해결심’ (new year resolution)을 함으로써 ‘올해는 열심히 운동하여 살도 빼고 건강해지겠다!!’고 마음먹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씩 지나면 귀찮아서든지, 바빠서든지 이런저런 이유로 그 마음먹은 계획을 실천하지 못하고 중도에 하차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운동에 관한 것이든, 학업이나 진로에 관한 것이든, 그리고 신앙 (=영성)에 관한 것이든 관계없이 새로운 해를 새로운 소망과 계획으로 시작하는 여러분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계획은 했다가 조그만 어려움이나 난관이 닥치면 쉽게 포기하는 ‘작심삼일’의 ‘새해결심’이 아니라 한걸음 한걸음 거룩한 목표를 향하여 올 한 해 뿐 아니라, 여러분 평생을 통하여 끝까지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고백하는 ‘푯대의 삶’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푯대의 삶’이 무엇인지를 살펴봄에 있어서 먼저, 사도 바울이 <빌. 3장> 전체에서 고백하는 핵심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성경학자는 <빌. 3장>의 핵심 요절로서 <9절>의 말씀,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 부터 난 의라”는 말씀이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9절>에 이어지는 오늘 말씀에서 사도가 진정으로 자랑하고 분명히 붙잡았다고 확신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그는 무엇이 자신의 의로움 (=자랑/ 근거)이 아닌지를 대조적으로 강조합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 앞의 <5-6절>에서 그가 주장하듯이 ‘난지 팔일만에 할례 받음’도 아니고, ‘율법에 능통한 바리새인’이었다는 사실도 아니요, 더욱이 ‘하나님을 향한 잘못된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하던 박해자’였던 자신의 과거의 모습은 더더욱 아니었다고 그는 토로하는 것입니다 (v.5-6). 반면에 자신이 의롭게 된 근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오늘 말씀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이 바울이 푯대를 삼고 추구하는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첫째)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 (That was apprehended of Jesus)입니다. <12절>에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 가노라” (v. 12) 사도는 자신이 잡고자 열심히 좇아가는 것은 바로 ‘예수께 잡힌 바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일까요? 어떤 성경학자는 그것은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구원받은 성도는 결코 자신의 구원을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크리스챤의 삶은 구원을 위해 힘쓰는 삶이 아니라, 받은 구원에 감격하고 그로 인해 열매 맺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은 어떤 우리의 노력이나 행위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선물’ (엡. 2:8)임을 사도는 분명히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예수께 잡힌 바 된 것’일까요?

이것을 <공동번역>에서 보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드신 목적이 바로 이것”이라고 번역하고, <표준새번역>에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이 말씀이 뜻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붙드셔서 구원하신 목적이 이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먼저 나를 붙드시고 사로잡으신 구원의 목적이 바로 이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완전한 사람’ 혹은 ‘온전히 이룸’이라고 해석하는 신학자들도 있고, 오늘 <빌립보 3장>의 개념에서 본다면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을 통한 ‘그분의 장성한 성품을 닮는 삶’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선하시고 아름다우신 장성하신 성품으로 자라나는 것이 사도 바울이 진정으로 추구한 그의 푯대요, 또한 우리 모든 성도의 푯대인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앞에 있는 것” (What is ahead) 입니다. 푯대는 ‘뒤에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앞에 있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v.13)라고 사도는 선언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온 힘을 다해 잡고자 힘쓰는 푯대는 앞서도 살펴보았듯이 자신의 할례 받음과 유대주의 정통에 속한 하나님께 대한 잘못된 열심으로 되돌아 가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그것은 지난 과거에 속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미래에 있는 것임은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다시 말해, 바울이 추구한 삶은 이미 과거에 존재했던 그 무엇이 아니라, 앞으로 미래에 이루어질 그 어떤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푯대를 바라보며 달려가는 삶은 정확히 ‘믿음의 본질’과 일치함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서 기자가 ‘무엇이 믿음인가?’에 대해 <히브리서 11장>에서 정의하면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히. 11:1)라는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삶이 그러하듯, 푯대의 삶 또한 미래에 속하였기에 믿음을 통하여 장차 주어질 그 실상과 증거를 바라보며 ‘앞에 있는 것’을 향해 달려 가는 것입니다. 미래에 속한 푯대를 바라보며 달려가는 삶은 오직 진정한 믿음을 통해서만 바라볼 수 있고,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셋째) “부르신 부름의 상” (The prize for which God has called us) 입니다. 사도는 또한 푯대는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라고 <14절>에서 밝힙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 가노라” (v.14)라고. 여기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 무엇을 뜻할까요? 그것은 첫째), ‘의의 부활’입니다. 사도는 같은 본문 빌립보서 3장의 마지막절에서 마지막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의 형체로 변화하여 부활하게 될 우리 성도의 모습을 이렇게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빌. 3:21)

그리고 두번째는) ‘천국’입니다. 바로 천국에서 누릴 ‘영생의 기쁨과 의의 면류관’입니다. 사도 바울이 순교를 당하기 얼마전에 쓴 마지막 편지로 전해지고 있는 편지가 그의 영적 아들인 디모데에 보내는 두번째 편지인 것입니다. 그 편지에서 사도는 그의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그야말로 큰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장군과 같이 기쁨과 확신에 차서 선포하는 것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 4:7-8)라고. 사도는 머지않아 자신도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을 성령을 통해 직감하고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서 자신뿐 아니라 모든 선한 싸움을 다 싸운 성도들에게도 의로우신 재판장 되신 우리 주께서 천국에서 예비하신 ‘의의 면류관’을 주실 줄을 확신한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목표로 삼고 달려가는 푯대입니다.

여기서 저는 말씀을 마무리해 가면서 우리 함께 오늘 말씀을 큰 그림에서 다시한번 이해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앞서도 잠시 살펴 봤드시, 사도 바울이 우리 크리스챤의 삶은 마치 달리기 선수가 결승점을 향해 달려가는 경주와 같다고 영적인 비유를 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영적 개념으로서의 ‘달리기 경주’가 시작되는 출발점은 어디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 (=예수 믿고 구원받음)일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골인점은 이미 살펴봤듯이 주와 함께 ‘영광의 몸’을 입는 순간이요, ‘천국에서 의의 면류관’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각자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만이 남았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무엇보다도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이미 달리기 경주의 출발점에서 떠났습니까?

만약 믿음으로 출발점을 떠나셨다면, 현재 성도 여러분이 선 자리는 어디입니까? 제가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푯대의 삶”은 곧 “비젼의 삶”이라고 선언한 것도 이것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듯이 현재 우리 아포슬교회는 성도들이 대부분 청년들인데, 그 중에서 대다수가 유학공부를 하거나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여러분 대부분 한국의 가족을 떠나 멀리 미국에 와서 공부하고 진로를 개척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러분 각자의 꿈과 미래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이 꿈이 곧 신앙적 (=영적) 차원에서는 ‘비젼’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아포슬교회의 경우는 한국에서 이미 주님을 영접하고 신앙생활 하다가, 미국 유학 공부하러 온 청년들의 경우를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교회를 거쳐갔던 이와 같은 청년들의 ‘비젼’에 있어서 몇가지 문제점을 저는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청년들이 신앙은 좋은데 자신의 전공과의 관계를 잘 연결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전공에 대한 흥미를 잘 느끼지 못하고, 졸업하고 나서 이 전공을 평생 직업으로 삼고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고, 또한 전공과 신앙과의 함께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는 접점을 잘 찾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둘째는 전공공부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 전공을 통해 하나님께 쓰임받는 삶을 살고자 하는 확신도 있는데, 이런 경우는 ‘자신과 하나님의 신뢰관계’에 대한 근본적 의문과 갈등을 겪는 경우를 의외로 적지 않게 보게 됩니다. 이 두경우 모두 한마디로 한다면 ‘자신의 전공과 신앙’을 건강하고 성숙되게 ‘비젼’으로 발전시키는데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전공과 신앙에 대한 비젼의 문제는 청년교회인 우리 교회에서는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각자 고민할 뿐 아니라 함께 기도 가운데 그 비젼을 찾아 나가야 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제가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며 성도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무엇이 과연 무엇이 여러분의 비젼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공부하는 전공은 다를 수 있고, 직업과 삶의 모습은 다를 수 있다 할찌라도, 우리 성도의 푯대는 동일해야 함을 믿습니다. 저는 이 비젼은 오늘 사도 바울이 간절히 잡고자 추구했던 ‘푯대의 삶’이 되어야 함을 확신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시요,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삶’입니다. 탁월한 논문과 좋은 학위를 받는 것도 중요하고, 졸업 이후의 훌륭한 직장도 비젼을 성취하는데 매우 중요한 도구가 되겠지만 이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푯대가 아닙니다. 이것은 도구입니다. 그 어떤 학위나 직장, 심지어 아무리 헌신적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삶 자체도 엄밀하게 볼때, 우리의 푯대는 아닙니다. 우리 성도의 푯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시요, 그분과 연합하는 삶이요, 그분의 아름다움으로 날마다 변화되어 가는 성화의 삶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영적 달리기는 시작되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구원받은 믿음의 자녀가 됨으로 달리기 경주를 시작하셨습니까? 만약 시작하셨다면 현재 여러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더 중요한 질문은 여러분은 현재 무엇을 바라보며 달려가고 있습니까? 바라기는 여러분이 힘쓰고 노력하는 전공 공부와 직장의 일이 여러분의 신앙과 하나됨으로 귀한 열매 맺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복되게 쓰임 받는 성도 여러분의 삶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나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 모든 ‘비젼과 푯대’의 핵심은 언제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 (빌.3:7-9)고 사도는 고백합니다. 이 선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고, 그 안에서 발견됨으로, 언젠가 마지막 주님 만나는 날 의의 면류관을 영광 가운데 받는 축복된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