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8, 2023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다” (Be Freed From Your Suffering)

Preacher:
Series:
Passage: 마가복음 (Mark) 5:32~34
Service Type: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다”

(Be Freed From Your Suffering)

1-8-23

본문말씀: 마가복음 (Mark) 5:32~34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But Jesus kept looking around to see who had done it.)

33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Then the woman, knowing what had happened to her, came and fell at His feet and, trembling with fear, told Him the whole truth.)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다 (He said to her, “Daughter, your faith has healed you. Go in peace and be freed from your suffering.”)

[설교 요약]

            우리는 지난 주 “사랑”에 대한 메세지에 이어, 오늘 두번째 “건강” (=강건)의 신년 메시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은 혈루증으로 오랫동안 고통받던 한 여인을 치유하시면서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먼저 <마가복음 5장>에서 보면 그녀가 난치병으로 인해 12년동안 여러 의사들로부터 많은 괴로움을 받았지만 효험이 없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v.26). 한마디로 절망적인 상태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녀는 주님의 일행과 마주쳤는데, 많은 군중 사이에서 믿음으로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고, 그 결과 주님의 권능이 기적과 같이 그녀의 혈루 근원을 마르게 치유하였습니다.

이 순간 그녀의 난치병은 치유함을 받았지만, 주님은 그녀를 그렇게 가게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많은 군중사이에서 주님이 그녀를 주목해 보셨고, 그때 그녀는 그동안의 모든 삶을 두려움과 떨림으로 주께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다” (v.34)라고.

주님은 그녀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평안히 갈 것을, 그리고 건강할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이 주께서 그녀를 그냥 말없이 가게 하시지 않은 이유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은 그녀와 “사랑의 관계를 맺으셔서, 참된 평화를 주시고자 함”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육신의 건강뿐 아니라 마음과 영혼 존재 전체의 강건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는 지금 건강한 자입니까? 여러분에게 육신의 질병은 없습니까? 악한 영의 공격에 시달리지는 않습니까? 노이로제, 강박관념, 스트레스와 긴장 가운데 병약한 정신상태에 처해 있지는 않습니까? 건전한 자존감을 갖지 못하고 남과의 비교를 통한 끊임없는 우월감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고통받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쁜 생활 습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게으름과 나태’ ‘육체적 향락과 세상적 유혹’에 힘없이 끌려 다니는 병약한 자아의 상태에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이 모두 우리 인간의 병든 모습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영혼의 의사 되신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질병과 아픔 그리고 상처를 다 내어 드리고 그분의 권능으로 치유함을 받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이런 영육간에 온전케 되는 회복의 역사가 여러분 모두에게 올 한 해 넘치게 임하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지난 주, 새해 첫 말씀으로 “서로 사랑하자”는 말씀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왜 우리 크리스챤은 서로 사랑해야만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지를 말씀을 통해 묵상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우리 주님의 이 땅의 사역 가운데 혈루증으로 오랫동안 고통받던 한 여인을 치유하신 사건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주님은 그녀의 질병을 치료하시며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오늘 2번째 신년 새해 메시지를 통해 성도 여러분 각자의 삶 가운데 아직까지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고 병들고, 갇힌 것이 있다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자유케 되는 권세의 은혜가 임하는 새로운 한 해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마가복음 5장>은 예수께서 거라사인 지방을 지나가시다가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과 마주치시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그 귀신들린 자는 여러 번 쇠사슬을 끊고, 밤낮 무덤 사이에서 소리지르며 돌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였지만,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v.8)라고 명하셨고, 이로서 그 사나이는 제 정신으로 돌아와서 주님을 따라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허락지 않으시고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v.19)고 명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행할 수 있던 최선은 주께서 그에게 행하신 권능과 주께 받은 은혜를 친족과 이웃에게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나서, 유대인의 예배장소인 회당을 대표하는 ‘회당장’ 의 한사람인 야이로가 예수님을 찾아와 그 발 아래 엎드려 그의 어린 딸이 죽게 되었으니 속히 가서 딸 위에 손을 얹어 죽음에서 구원을 얻게 해 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 (v.22-23). 그리하여 주께서 자자들과 여러 일행과 함께 야이로의 딸에게로 가고 있는 장면에서 또 한명의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녀는 열두해동안 ‘혈루증’으로 고통받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그녀의 힘든 상황을 마가는 이렇게 자세히 묘사합니다.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v.26)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많은 의원들에게 괴로움을 받았다’는 말은 적지 않은 의사들이 그러하듯 처음엔 자기가 책임지고 병을 완치시켜 줄  것처럼 큰 소리치다가, 이래저래 치료하면서 많은 치료비만 허비했음에도 효험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금방이라도 고칠 수 있다고 요즘말로 ‘희망고문’하고서는 결국 그녀에게 깊은 실망과 함께 생계가 파탄이 날만큼의 어려운 처지에 빠지게 했다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그녀는 여러 의원들로 인해 많은 괴로움을 받은 것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녀에게 한줄기 서광이 비췄습니다. 그녀가 주님과 마주친 것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그녀가 사는 동네를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그녀가 먼저 듣고 기다렸던 것인지, 안면 우연히 길을 가다가 그녀가 예수님의 일행과 마주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녀가 예수님이 자신의 이 난치병을 고쳐 주실 수 있는 분임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 그녀의 마지막 희망을 희망을 걸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전에 들었거나, 그분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이라 추측해 봅니다. 이찌되었건 예수께서 일행과 함께 야이로의 딸을 고치시고자 그의 집으로 가고 계실 때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고 밀더라” (v.24)고 저자 마가는 그 때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녀가 그 인파속을 헤집고 들어와 예수님의 뒤로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댔던 것입니다. 왜 그녀는 이런 행동을 한 것일까요? 마가는 이렇게 그녀가 속으로 생각한 것을 밝힙니다. “이는 내가 그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v.28)라고. 그녀는 이 절박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의 병을 고쳐 주시리라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은 유대인의 사회에서 10년이 넘도록 ‘부정한 여인’으로 취급 받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알고 있던 ‘혈루병’은 오늘날 ‘부인병’에 속하는 것으로서 ‘여성이 하혈을 할 때 그것이 그치지 않는 증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율법에 있어서는 이 ‘혈루병’은 그 피의 유출로 인하여 ‘부정한 병’으로 판단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녀는 자신의 병으로 인해 고통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당시 사회로부터 부정한 자로 취급을 받았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사실이 그녀를 더욱 힘들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당시 ‘부정한 자’와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접촉한 자도 부정하게 취급됨으로, 사람들이 그녀를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게 따돌리고 업신 여겼으리라 짐작하기에 부족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녀가 왜 <28절>에서 보듯이 주님 앞으로 나아가 병 고쳐 주시기를 구하지 않고, 주님 뒤로 가서 조용히 그분의 몸에 손을 댔는지 하는 이유가 아니었을까 하고 저는 이해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부정하다고 간주되었던 병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국 그녀가 그 간절한 믿음으로 인해 그 심한 병은 고침 받았습니다. “내가 그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v.28)는 그녀의 믿음은 놀랍게도 주님의 능력으로 인해 응답 받은 것입니다. 주님의 옷에 손을 데는 순간, 그 출혈의 근원이 마름을 그녀는 느낄수 있었던 것입니다.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그녀 자신이 즉시 온 몸으로 느꼈다는 것입니다.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v.29)고.

한편, 저는 여기서부터가 우리가 결코 놓쳐서는 안되는 ‘영적 교훈’이 있다고 믿습니다. 사실 그녀가 예수님에게서 기대한 것은 ‘조용히 주님의 능력으로 치유함을 받고나서, 쥐도 새도 모르게 그 자리를 뜨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녀의 ‘베스트 시나리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녀를 그렇게 보내지 않으심을 봅니다.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 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v.30)라고 묻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누가 손을 댓는지도 이미 알고 그렇게 묻으시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그녀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캐 묻으시는 주님이 야속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순간 소리없이 일어난 이 엄청난 권능의 사건을 알지 못하는 제자들은 단지 많은 무리들이 뒤에서 따라오며 주님과 일행을 밀쳤기 때문인데, 주님께서는 ‘그걸 몰라서 묻으시느냐?’고 답답하다는 식으로 이렇게 반문합니다.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v.31)라고.

그러나, 주님은 제자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곧 바로 ‘깨끗함’ (=치유함)을 받은 그 여인을 주목하셨으며, 그로 인해 그녀는 경건한 두려움으로 떨며 그분 앞에 엎드려 이 일의 전후 상황을 다 고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그녀를 조용히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을까요? 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굳이 자신의 아픈 (=부끄러웠던) 과거를 드러내게 하신 것일까요? 주님의 그 마음의 동기를 이해하는 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적 교훈임을 저는 믿습니다. 이것은 바로 ‘그녀와 주님의 사랑과 인격적 관계의 시작’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두려움 가운데 자신의 난치병으로 인한 지난 날의 고통과 절망의 시간들을 고백한 그녀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다” (v.34)라고 말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권능으로 그녀가 고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그녀를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얍복 강가에서 밤새도록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 하겠나이다” (창. 32:26)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새 이름을 주셔서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 곧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의미의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어찌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길수 있으리오마는 하나님은 이런 야곱의 간절한 하나님의 추구를 귀히 여기시고 ‘네가 나와 겨루어 이겼다’고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같은 의미에서 주님은 그녀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모든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자신에게 나아온 그녀의 용기와 믿음을 귀하게 여기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평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그녀에게 선언하신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다”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것이 단순히 ‘너의 질병이 치료함 받아라’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앞서도 살펴보았듯이, 그 여인이 용기를 내어 주님의 옷에 손을 데었을 때 그분의 치유의 능력이 즉시 그녀의 병 근원을 마르게 했습니다. 그럼으로 그분의 능력으로 ‘그녀의 혈루 근원이 마르게 된 것’ (v.29)입니다. 따라서 이미 그녀의 육신적인 질병이 치료받았다면, 주께서 굳이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다”라고 말씀하는 자체가, 어떻게 본다면 불필요하다고 까지 느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점은, 주님의 말씀에서 ‘단지 육체적인 질병이 없어졌다고 해서 그 사람이 건강해졌다고 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녀가 육신의 병이 치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조용히 보내지 않으시고 그 삶의 고통스럽던 과거를 고백하게 하시고 다시 한번 ‘병에서 놓여 건강하기를 축복’하시는 주님의 의도가 여기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과연 무엇이 우리는 ‘병’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막. 5장>에서 살펴본대로 주님은 육신적으로 고통받는 3명의 인물을 치료해 주셨음을 보게 됩니다. 첫번째 인물은 ‘더러운 (악한) 귀신들린’ 자였고, 두번째는 오늘 메세지의 주인공인 ‘혈루병 걸린’ 여인이고, 세번째는 병명을 알수 없으나 ‘갑작스런 병으로 죽게 된’ 회당장 야이로의 12살난 딸입니다. 물론 주님은 그의 긍휼과 권능의 능력으로 그들 모두를 고쳐 주셨지만, 진정으로 중요한 한가지는 바로 ‘우리 존재 전체가 건강해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몸과 마음과 영혼’의 강건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그것은 주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만약 그 여인이 몰래 병고침만 받고 떠나갔다면, 육신의 병은 고쳤을 진 모르겠지만, 영적인 병은 여전히 치유 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유대인들의 율법에 의하면 혈루병은 부정하게 취급을 받았기에 만약 그녀가 몰래 그 병만 치유받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면, 그녀는 평생토록 주님으로부터 몰래 물건 훔치듯 병 고침 받음에 대한 양심의 가책, 그리고 자신의 병이 하나님으로부터 깨끗함을 받았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죄의식에 시달렸으리라 추측해 봅니다. 이것이 주께서 그녀를 부르시고 자신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자 하시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녀에게 육신의 병에서 놓여 건강하게 될 뿐 아니라, 그분의 사랑과 은혜로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녀를 죄와 질병에서 깨끗케 하심으로 주님 안에서 누리는 참된 평화와 기쁨을 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주께서 그 당시 죄인취급 받던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저런 죄인과 함께 교제할 수 있느냐고 주님께 따져 묻었습니다. 그때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느니라 ~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 9:12-13)라고 주님은 말씀하신 것을 봅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이 죄인으로 취급하던 세리들 뿐 아니라, 스스로 의롭다고 믿었던 바리새인들도 모두 동일한 죄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의사가 육신의 병든 자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라면, 영혼의 참된 의사되신 예수님 자신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영적 병이 든 (= 영적으로 죽은) 우리 인간들을 살리시고자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바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확히 주께서 육신의 병에서 고침을 받았음에도 그녀를 모른 척 가게 내버려 둘 수 없었던 이유입니다. 주님은 육체적일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그녀를 고쳐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딸아 ~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라”고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이제 제가 말씀을 마무리하며 성도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병든 자입니까? 어떤 것에 얽매이고 고통받고 있습니까? 혹시 어떤 육신의 질병을 앓고 있습니까? 아니면 <막 5장>에 나오는 ‘귀신들린 자’처럼 영적으로 악한 영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노이로제, 강박관념, 스트레스와 긴장 가운데 병약한 정신상태에 처해 있습니까? 아니면 스스로에 대한 건전한 자존감을 갖지 못하고 남과의 비교를 통한 끊임없는 우월감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고통받고 있습니까? 혹은 여러 해가 지나도록 ‘나쁜 생활 습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게으름과 나태’ ‘육체적 향락과 세상적 유혹’이 분명 잘못된 죄악의 길임을 알면서도 힘없이 그 안으로 끌려 들어가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병약한 자아의 상태에 있습니까? 이것이 모든 우리 인간의 병든 모습입니다. 그럼으로 영혼의 의사 되신 예수님은 이런 우리의 병들고 연약한 모습을 대신 담당하시고자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고, 건강한 자를 치료함이 아니라 병든 자를 치료하시고자 주님은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런 나의 병든 몸을, 나의 얽매이고 고통받는 실상을 철저히 깨닫고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의 허물과 죄를, 육신의 질병과 마음의 상처 그리고 영적 고통을 숨김없이 주께 아뢰고 그분의 치유하시는 은혜를 믿음으로 간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자기를 믿는 유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1-32)라고. 우리 주님은 모든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만이 줄 수 있는 그 진리를 통해 자유로와 질 수 있는 것임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의 질병이든, 정신적인 고통이든, 혹은 악한 영의 공격이든 관계없이 우리를 모든 고통과 억압으로 가두는 ‘죄와 죽음’에 속한 것에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실 수 있는 것은 오직 아들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로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올 2023년 한 해는 주께서 주시는 진리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도 여러분 삶의 모든 구체적인 영역에서 자유가 선포되고 풍성하게 경험되는 한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얽매고 있는 모든 육신적, 정신적, 영적 질병과 상처로부터 자유케 되기를 소망합니다. 바라기는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는)” (눅. 4:18-19) 복된 새해가 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