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29, 2023

“제자입니까” (Are You Disciples of Jesus?)

Preacher:
Passage: 마태복음 (Matthew) 4:18-20
Service Type:

“제자입니까”

(Are You Disciples of Jesus?)

1-29-23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4:18-20

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설교 요약>

주님은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를, 그리고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나를 따르라”고 부르심으로 제자 삼으셨습니다 (v.21-22). 이와 같이 주께서 제자를 삼으시는 오늘 본문 <마태복음 4장>은 예수님의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시작하는 첫 단계에서 행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주께서 이 땅에서 제자 삼으신 자들의 숫자는 120여명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행. 1:15). 그러나 오늘날 교단을 초월해 그리스도인, 곧 주께서 ‘나의 제자’라고 부르신 성도의 숫자는 25억명을 능가하고 있습니다.

이런 엄청난 주의 ‘제자의 <배가/증가>’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물론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하심과 주의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한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 주님은 그의 제자들을 통해서 그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시고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마. 4:19)고 약속하셨듯이 말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의 마지막 말씀, <마. 28장>에서 부활하신 주께서 제자들을 향해 “~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마. 28:18-20)고 명하신 이유입니다. 주님의 그의 사랑하는 제자를 통해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으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켜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예수님의 합당한 제자일까요?

첫째, ‘회개하는 자’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를 언제나 “나의 제자’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선포하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v.17)는 말씀은 ‘회개’의 중요성을 깨닫게 합니다. 회개하지 않고는 천국시민이 될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을 따르는 자’입니다: 주님은 그분의 제자를 삼으실 때, 언제나 “나를 따르라 ~” (Follow Me) (v. 19a)라고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주님을 따르는 것일까요?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즉각적인 따름’입니다. 주님의 12제자들처럼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즉각적으로 따르는 순종을 의미합니다.

셋째, ‘사람을 낚는 어부’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안드레에게 “~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v. 19)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사람을 낚는 어부’ (fishers of men)란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거물을 내려서 세상이라는 바다에 나아가 죽었던 생명들을 살리는 사람’입니다.

넷째, ‘스승을 닮아가는 자’입니다: 주님의 제자된 우리는 스승되신 예수님을 닮아가는 자입니다. 그것은 1) ‘철저하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심’ 2) ‘사랑의 섬김’ 그리고 3)’’성령충만’하심으로 행하신 장성한 분량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날마다 푯대되신 주님을 향하여 말입니다.

[설교 전문]

            우리가 크리스챤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을 의미할까요?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의 자녀로서 빛과 소금의 삶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일까요? 물론 우리는 압니다. 참된 크리스챤의 삶의 중심에 있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임을 말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볼 때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 (=크리스챤)’이라고 곧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불리어진다면, 과연 ‘누가 그리스도의 사람인가?’라는 보다 본질적인 질문을 해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제자”라고 부르시고 인정하시는 사람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럼으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제자인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시행착오를 겪기도 하고, 낙심될 때도 있지만, 오늘 말씀 가운데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다시 한번 일어서서 육신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주님의 성령과 함께 주님의 충성된 제자로서 모두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메시야로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먼저 무엇을 하셨는지에 대해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주님은 요단강에 가셔서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침례에 순종하셨고, 그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렸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마. 3:17)는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을 들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40일 금식하신 후 마귀에게 시험받으셨으나, 말씀으로 그것을 물리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포함된 <마태복음 4장>을 시작하며 <1-11절>까지의 기록입니다.

그 이후에 ‘이사야’선지자의 예언의 말씀과 같이 주님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땅과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셔서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700여년 전에 살았던 이사야는 이런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의 사역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v.15-16)라고. 어둠으로 덮인 세상 가운데 생명의 빛되신 그리스도의 여명이 서서히 비치어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저자 마태는 이렇게 진술합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v.17)라고. 주님은 이때부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천국을 선포하심으로 그의 메시야 사역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말씀이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데로 주님은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서 또한 세베대의 두 아들, 곧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나를 따르라”고 부르심으로 제자 삼으심을 보게 됩니다 (v.21-22).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예수님의 사역은 총체적으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또한 병자를 고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는 것임을 마태는 <23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못지 않게 중요한 사역이 바로 주께서 그의 제자를 삼으시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주께서 이 땅에서 제자 삼으신 자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주님의 공생애 3년반 동안 특별히 함께 먹고 마시며 훈련하신 12제자들과 70명의 제자를 따로 세워 둘씩 전도여행을 보내며 훈련하신 것을 <누가복음 10:1-16>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하늘로 승천하시며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 1:4) 고 말씀하셨고,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합심하여 기도할 때 ‘성령이 불의 혀같이 임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곧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입니다. 그때 모인 제자들의 수는 120명 (행. 1:15)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 120명의 제자들이 그 당시 주께서 제자 삼으신 제자들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단을 초월해서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챤의 수는 대략 25억이 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심히 놀라운 제자의 배가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엄청난 복음 전파가 어떻게 가능 했겠는 가에 대해서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섭리하셨기 때문이요, 예수께서 성령을 통해 역사하심이 때문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은 복음의 편만한 확장의 중심에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셔서 제자 삼으신 그 부르심에서 시작되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치 어느 깊은 산골에서 샘솟는 샘물이 골짜기를 타고 흘러 작은 시내를 이루고, 또 시냇물이 합해져서 나중에는 거대한 강물을 이루듯, 오늘 <마. 4장>에서 주께서 처음에 12명의 제자들로 시작한 메시야로서의 천국복음의 사역은 이 땅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도 인정하듯이 기독교회 2천년 역사는 주께서 그의 몸된 교회, 즉 ‘자신을 믿는 자들이 모인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를 통하여 그의 영 성령의 능력으로 이 땅에서 이루어진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그의 천사들을 앞장 세우셔서 이제 시작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신 것이 아니라, 그의 몸된 교회, 곧 제자들의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병자들을 고치는 메시야로서의 표적과 기사가 복음서의 주를 이룸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그의 사역에서 그 무엇보다도 심혈을 기울인 것은 ‘제자 삼으신 사역’임을 저는 의심치 않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마태복음의 마지막 말씀, <마. 28장>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구원사역의 완성을 위해 무엇을 핵심적인 사역으로 두셨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 28:18-20) 주님은 이제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남겨진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이런 중대한 미션과 함께 신실한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말씀의 골자는 ‘너희는 가서 제자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처음 12사도를 부르셔서 제자 삼으셨듯이, 그리고 70명의 제자들을 세워 제자 삼으셨듯이 이제 그분을 믿고 영접한 우리들에게도 주님은 ‘너희는 가서 제자 삼으라’거룩한 명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의 은혜와 능력을 세상 가운데 어떻게 흘러 넘치게 부어 주시는 가의 핵심인 것입니다. 바로 우리를 통하여 수없이 많은 세상사람들을 제자 삼음으로써 입니다. 이것이 그분의 모든 신실한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지상명령’인 것입니다.

어떤 선교사나 헌신된 소수의 크리스챤만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에게 한사람도 예외없이 주님은 ‘가서 제자 삼으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이해했다면, 과연 예수님의 제자는 어떤 존재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저는 누가 예수님의 합당한 제자일까요? 하는 점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무엇보다도 제자는

첫째, ‘회개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제자는 누구입니까? 제자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가 제자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거듭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를 언제나 “나의 제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부르듯이 ‘그리스도인’ ‘크리스챤’이라고 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으로 제자라는 용어는 오늘날 교회에서 특별히 열심있는 성도들이 ‘제자훈련’ 받고나서 붙여지는 타이틀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도 살펴보았듯이, 주께서 메시야로서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첫 말씀으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v.17)고 선포하셨습니다. 이 회개는 천국백성의 출발점이요, 동시에 주의 제자로서의 시작점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뿐 아니라, 사도 요한이 도전한 것처럼 ‘날마다 자신의 죄를 진실하게 회개하는 것’은 언제나 주의 제자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을 따르는 자’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주님은 그분의 제자를 삼으실 때, 언제나 하신 한가지 분명한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부르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 ~” (Follow Me) (v. 19a)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주님을 따르는 삶일까요?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먼저 확인해 보자면, 주께서 두 형제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을 각각 부르셨을 때에 그들은 지체하지 않았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부르심에 대한 즉각성’ 입니다. 주께서 부르셨을 때에, 베드로와 안드레의 경우는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v.20)고 했고, 야고보와 요한의 경우는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v.22)고 그들이 어떻게 주님의 부르심에 반응했는지를 기록(밝히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의 ‘긴박성’ (urgency)을 뜻합니다. 만약 나사렛 예수님이 구원자 (그리스도)시요, 그분을 믿고 영접함으로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이 ‘제자의 삶’이라면, 이런 제자로의 부르심은 결코 늦추거나 뒤로 미룰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런 주님의 제자로의 부르심을 부인하거나 혹은 늦추고 지연하는 것도 결국 구원받은 자의 삶이 아니다고 주님은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알수 있는 구절이 <누가복음 14장>인데, 주님은 <천국잔치에 초대>하는 비유의 말씀을 통해 바로 <주의 제자로의 부르심>을 설명하심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어느날 ‘한 사람이 잔치를 베풀고 그의 종을 보내어 그 잔치에 사람들을 초청’했는데, 그 초대받은 사람이 모두 그 초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눅. 14:19)라고 하고, 또 다른 사람은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럼으로 가지 못하겠노라” (눅. 14:20)라고 말입니다. 이럼으로 주님은 그들이 자신의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눅. 14:24). 고로 주님의 제자로서의 긴급한 부르심에 이런저런 핑계를 들어 지연하고 거부하는 것은 천국잔치에 참여할 자격, 곧 ‘천국백성의 자격’이 없는 것임을 주님은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예수님의 제자로의 부르심에 순종으로 주님을 따라 나아가고 있습니까?

셋째, ‘사람을 낚는 어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잘 나와 있듯이 예수님은 두 형제,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이렇게 분명하게 약속하셨음을 봅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v. 19)라고. 여기서 ‘사람을 낚는 어부’ (fishers of men)란 어떠한 사람을 뜻할까요? 물고기를 낚는 대신 사람을 낚는 사람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보고와 요한’이 물고기를 잡는 어부 출신이었음을 염두에 두시고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들이 지금까지는 물고기 잡는 어부였다면 앞으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도록 주께서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고려해 볼 때, ‘사람을 낚는 어부’는 결국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거물을 내려서 세상이라는 바다에 나아가 죽었던 생명들을 살리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본다면,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자신이 믿지 않는 이방인을 구원시키는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이렇게 감당한다고 고백합니다.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롬. 15:16)라고. 그리고 이것은 제가 앞에서 주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마. 28장> 마지막 <18-20절>의 미션이 바로 ‘제자 삼으라’는 것인데, 이것이 오늘 말씀의 개념으로 하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라’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나 안드레 뿐만이 아니라, 모든 주님의 제자들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서 세상 사람들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주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을 낚는 어부의 핵심적인 미션인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넷째, ‘스승을 닮아가는 자’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내가 누구 누구의 제자’라고 한다면, 그것이 학문의 세계든지, 무예나 예술 혹은 종교의 세계에 있어서도 그 스승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노력하는 자들이 제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과 우리 성도들의 관계에서 적용해 본다면, 주님의 제자된 우리 성도들도 그분의 장성한 성품을 좇아 날마다 한걸음 한걸음씩 자라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그 무엇보다도 본질적으로 주님의 삶을 통해 우리가 그분을 닮아 가야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첫째) ‘철저하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 하심입니다. 주님의 이 순종의 크라이막스는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둘째) ‘사랑의 섬김’입니다. 주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말로 만이 아니라, 그 섬김의 삶으로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 셋째) ‘성령의 충만’입니다. 앞서도 잠깐 살펴봤듯이, 예수님은 공생애를 준비하는 첫 단계 즉 ‘침례 받으심’에서부터 성령의 비둘기같이 임하는 충만을 받으셨음니다. 또한 40일간 금식하시고 주리셨음에도 성령께 충만하신 이끄심을 받음으로 마귀의 시험을 말씀으로 물리치신 것입니다 (마. 4:1-11). 아니 주님의 이 땅의 삶 전체가 곧 성령의 충만한 권능과 은혜로 행하신 삶이셨습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하나님 뜻에 순종하심과 사랑의 섬김 그리고 성령충만의 삶은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그분의 제자된 우리 모두의 추구해야 할 푯대의 삶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의 제자입니까? 만약 여러분이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면, ‘성령충만’ 받는 것이 더 이상 선택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받아야 하는 것처럼,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으신다면 여러분은 이미 제자인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인식할 때, 우리는 다음의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과연 주님의 합당한 제자인가?”라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의 이 땅에서의 남은 삶이 주님 보시기에 충성되고 신실한 주의 제자 되어서 주님 만나는 날 ‘잘했다’ 칭찬받고, 주님과 함께 주인의 잔치에 참예하는 축복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