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30, 2022

“교회의 부흥” (The Church Revival)

Preacher:
Passage: 에베소서 (Ephesians) 2:20~22
Service Type:

“교회의 부흥”

(The Church Revival)

1-30-22

본문말씀: 에베소서 (Ephesians) 2:20~22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Built on the foundation of the apostles and prophets, with Christ Jesus Himself as the chief cornerstone.)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In Him the whole building is joined together and rises to become a holy temple in the Lord.)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And in Him you too are being built together to become a dwelling in which God lives by His Spirit.)

[설교 요약]

            우리는 ‘교회’에 관련한 두번째 주제로 말씀 나누고자 합니다. 앞선 시간에 ‘어떻게 교회를 ‘성전’이라고 영적으로 정의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시간에는 ‘어떻게 교회의 부흥은 가능할 것인가?’를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먼저 저는 ‘무엇이 진정한 교회의 부흥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무엇이 교회의 부흥이 아닌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 <획일화>되는 것은 부흥이 아닙니다
  • <비성경화>는 부흥이 아닙니다
  • <세속화>는 부흥이 아닙니다

이제 그렇다면 무엇이 진정한 교회의 부흥을 가져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첫째, <구원의 확신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다윗은 고난 가운데서도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34:10)고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했습니다. 동일하게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이기를 힘쓰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미 (행. 2:46-47)함으로 진정한 교회의 부흥을 가져왔던 것은 ‘구원의 기쁨과 확신’에서 출발합니다.

둘째, <말씀에서 자라나야>합니다: 참된 영적 부흥은 말씀의 진리에서 공동체가 눈뜨게 될때 가능합니다. 계속되는 에베소서 말씀을 통해 깨닫는 것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과 특권은 ‘죄사함’으로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서 충만하게 확장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 (빌.3:7-8)을 고백한 뜻입니다. 말씀을 통한 성숙은 교회 부흥의 핵심입니다.

셋째, <영적 다양성이 있어야>합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고후. 3:17)고 사도는 영적 자유가 우리 신앙의 본질임을 선언합니다. 이것은 언제나 참된 신앙은 자유함에 있다는 것입니다. 억압하거나 강요하기 전에 자발적인 은혜에 대한 자발적인 결정입니다. 바로 주의 영, 성령님이 계신 곳에는 자유로운 영적 다양성 가운데 연합되어지는 공동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을 노래’ (엡. 5:19)하는 하나된 아름다운 교회의 부흥이 우리 안에서 시작되기를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캘리포니아의 ‘새들백교회’의 ‘릭 워랜’목사는 ‘목적이 이끄는 교회’ (한국판으론 ‘새들백교회 이야기’로 출판됨) 라는 그의 책을 시작하면서 독자의 마음에 강한 파도를 일으켰습니다. 적어도 저의 마음에 큰 파도의 물결을 일으켰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파도타기는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파도를 타는 기술이다. 하나님은 파도를 만드신다. 우리는 단지 그 파도를 타는 것이다 ~ 오직 하나님만이 교회를 자라게 하신다. 오직 하나님만이 마른 뼈들의 골짜기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으실 수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파도, 즉 부흥의 파도, 성장의 파도,를 만들어 내실 수 있다 ~ 나는 가장 위대한 교회는 아직도 세워지지 않았다고 믿는다. 어쩌면 당신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그 일을 시키실 바로 그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에 기록된 초대교회 뿐 아니라, 지금과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더욱 강력한 성령의 파도를 일으키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성령을 통해 지금까지 한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 거대한 영적 파도를 일으키셔서 교회를 부흥케 하시고, 그의 선하신 뜻대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거대한 성령의 파도를 경험하길 원합니까? 우리 아포슬교회 가운데 능력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능력의 은혜를 경험하길 소원합니까?

우리는 지난 시간에 사도가 교회를 ‘시민’ ‘가족’ 그리고 ‘성전’이라고 묘사하고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세 단어 사이에는 <관계>라는 원리가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왕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성도 상호간에 있어서 ‘천국시민’이라는 것은 명예롭고 영광스러운 호칭이지만,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관계와는 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가족’이 될 때 우리는 왕이신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모시는 더 깊은 친밀감과 특권의 관계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교회가 ‘성전’이 된다고 했을 때, 이 표현은 가장 영적인 클라이막스가 됩니다. 그 이유는 ‘건물’의 특성상 ‘서로가 하나로 결합되고 연결되는 관계가 되지 못할 때, 필연적으로 파괴되고 붕괴되는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교회는 일반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건물 구조물인 벽돌 하나 하나 상호간에 가장 촘촘하고 견고하게 잘 결합되듯이, 성도 상호간에 빈틈없이 하나로 연결될 뿐 아니라, 이런 공동체 안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이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성전’이라는 최상의 영광스런 명칭으로 불리어질 수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제가 ‘성전’이란 제목으로 교회의 영적 개념을 지난 시간 살펴보았다면, 오늘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보다 실제적이고, 적용하는 차원에서 ‘교회’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다시 말해, 말씀을 기초해서 실제적으로 참된 ‘교회의 부흥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를 함께 고민하고 이해해 나가길 원하는 것입니다.

먼저 저는 ‘무엇이 진정한 교회의 부흥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무엇이 교회의 부흥이 아닌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획일화>되는 것은 부흥이 아닙니다. 얼핏 볼 때, 교회가 외적으로 성장하고 부흥하는 것으로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나 교회의 몇몇 지도자의 획일화된 방침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임으로 외적 성장을 가져오는 교회는 부흥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도리어 영적으로 침체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뒷부분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영적 자유함’ (=자발성)은 ‘영적 부흥’의 중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비성경화>는 부흥이 아닙니다. 물론 어느 교회인들 자신들이 ‘비성경적인 교회’가 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없을찌라도, 실제로는 성경의 가르침을 떠난 공동체가 너무도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말씀에 근거하지 않는 교회성장, 그리고 잘못된 교리나 그릇된 말씀의 적용에서 오는 어떠한 교회성장도 교회부흥이 아님을 저는 믿습니다. 셋째, <세속화>는 부흥이 아닙니다. 저도 목회자로서 교회성장을 위한 고민이 많습니다. 특별히 학생교회 목사로써 어떻게 더 많은 학생들을 만나고, 교회가 성장할 것인가에 대한 저의 고민은, 대상과 방법은 다를찌라도 모든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의 기도제목이자 고민이라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적인 방법을 동원해 교회를 성장시키고자 하는 것은 부흥이 아님을 우리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세속화’입니까? 저는 ‘세속화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세상적인 방법으로 교회가 변질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과연 무엇이 세속화인가?’는 결코 그렇게 간단하게 정의되는 것은 아닙니다. 더 깊은 묵상과 영적 성찰을 통해 분별해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적어도 진정한 교회의 부흥을 원한다면, 악마가 파우스트에게 세상의 능력과 성공을 줄 것처럼 속삭이는 세속화를 통한 교회의 성장이라는 잘못된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망각한 단순한 교회의 외적 성장을 늘 우리는 경계하고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무엇이 진정한 교회의 부흥을 가져오는 것일까요? 교회의 참된 부흥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첫째, <구원의 확신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제가 앞 시간에 ‘교회의 기초 (=터)’에 대해 살펴보면서 사도가 오늘 본문에서 언급한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v.20a) 여기에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the foundation of the apostles and prophets) 라는 것인 곧 ‘교회가 지어지는 기초’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이 교회의 터는 사도가 이 편지를 쓸 당시까지 구약에 속해 있던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과 그 당시 사도와 성도들의 ‘믿음으로 인하여 흘렸던 순교의 피와 댓가지불의 고난’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이들 모든 믿음의 선진들에게서 이런 고난과 순교까지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감당할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구원에 대한 확신’입니다. 시편의 기자들과 여러 성경기자들이 끝없이 선포하는 하나님을 향한 그 기쁨과 감사와 승리의 고백은 죄사함 받아 구원받음으로 그분의 자녀가 되었음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34:10)고. 그런데 어떤 상황에서 그가 이런 고백을 하는지 아십니까? 다윗은 사울 왕이 자신을 죽이고자 집요하게 쫓아오자 그 당시 적국이었던 가드의 아비멜렉 왕에게 가서 몸을 피했다가 생명의 위협을 직감하고 나서 지금 왕 앞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미친 시늉을 하며 이 위기를 모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그는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시.34:19)라고.

이 구원의 확신에서 교회는 비로소 진정한 영적 부흥을 시작할 수 있음을 저는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죄사함 받은 성도가 날마다 누리게 되는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구원의 확신과 은혜를 통하여 우리는 함께 연결됨으로서 그 확신과 은혜를 더불어 누려 나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구원의 은혜로 충만한 공동체를 이뤄 나갈 때, 초대교회와 같이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행.2:46~47)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둘째, <말씀에서 자라나야>합니다: 사실 ‘말씀에서 자라나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지당한 말이라고 여러분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매우 심각한 점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앞선 ‘교회의 잘못된 부흥방식’을 설명하면서 ‘비성경화’는 부흥이 아님을 말씀드렸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정한 부흥은 언제나 성경말씀에 대한 영적 각성과 말씀에 대한 성숙에서 비롯되었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에베소서>말씀의 진리를 함께 묵상해 가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녀의 은혜와 특권’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이해해 나가고 있습니까? 왜 여러분은 죄사함을 받아야 된다고 믿습니까?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범죄함 때문입니까? 그 때문에 원죄를 유전 받음으로 여러분과 제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까? 이것을 한마디로 한다면, ‘조상 잘못 만나서’입니까? 아담과 하와, 첫 조상 때문에 우리는 지금 이런 고생을 하는 것입니까? 어떻습니까? 이것도 사실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죄사함 받아야 하는 진정한 이유가 아니라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진정한 이유가 아니라고 에베소서는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음을 여러분은 간파하셨습니까?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4~5)라고 사도는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기도 전에, 아니 천지를 창조하시기도 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죄사함을 받고 구원함을 받는 것은 매우 중요한 거듭난 자의 조건이 되는 것이지만, 이미 아담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죄사함’이 전부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이것이 얼마나 큰 영광이요 특권인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나를 살리셨다는 것은 예수의 핏 값으로 대신 나의 죄를 용서함 받았음을 뜻할 뿐 아니라, 이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다시 살게 됨으로 완전한 인간 아담이 누렸던 것을 비교할 수 없이 능가하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능력과 특권을 누리게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의 생명으로 다시 살며, 그분이 내 안에 내가 그분 안에 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진리를 통해 점점 더 우리의 어둡던 영적 눈을 열어 주실때 깨닫게 되는 성도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 살펴보고 있는 교회는 이런 영광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그분의 아들을 통해 하나로 연결되고, 이 교회를 통하여 세상에 모든 피조물이, 심지어 하늘의 정사와 주관자들까지 다스리시고자 함임을 사도는 이 편지를 통해 선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에베소서 이 말씀 한권 안에 포함된 엄청난 진리의 보물을 발견해 나가고 있습니까? 이것을 여러분의 보물로 누려가고 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떄문이라” (빌. 3:7~8)고 사도는 고백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고 여러분의 삶을 결정하는 중대한 지식이라고 믿습니까? 이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는 것이 진정한 교회를 부흥을 가져오는 근거라고 믿습니다.

셋째, <영적 다양성이 있어야>합니다: 저는 교회가 획일화되는 것은 교회가 외적으로 보기에 아무리 성장해 보인다 할찌라도, 결코 부흥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주된 이유는 교회는 ‘영적 다양성’을 그 본질로 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것이 ‘제 팔 제 흔들기 식’으로 각자 자기 주장을 하는 곳이 교회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교회가 무엇인지를 말씀을 통해 살펴 본 것이 바로 그것 아닙니까?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 혹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을 이루고, 그분을 주춧돌로 모두 하나로 연결된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통일과 연결은 교회의 본질적인 특징입니다. 그러나, 제가 다시한번 강조하고 경계하기 원하는 것은 ‘획일화’는 결코 통일도 아니요, 교회의 성장이나 부흥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고후. 3:17)고 사도는 영적 자유가 교회공동체의 심오한 원리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 영’이 누구십니까? 주의 영은 곧 ‘성령’이십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보았듯이, 교회를 하나님이 거하실 거룩한 성전으로 계속해서 지어나가시는 진정한 책임자요 인도자가 성령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바로 주의 영, 성령께서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교회는 필요에 따라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가 있어서 중요한 결정을 이끌어 가고 교회의 방향성을 정할 수도 있지만, 교회는 본질적으로 성령의 통치하에 있음을 우리 모두가 인정하고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로 만이 아니라, 성도 한사람 한사람이 ‘왕 같은 제사장이요, 택하신 족속’임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존중하고 서로를 세워주는 모든 성도들이 제사장되는 공동체로 자라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목사나 몇몇 소수에 의해 획일화되어 일사 분란하게 굴러가는 교회가 아니라, 각자의 자발성과 창조성의 다양성을 성령의 통일된 다스림 가운데 영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면, 이것이 진정한 교회의 부흥으로 연결될 것을 저는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말씀을 마무리해 나가면서 <에베소 4장>에서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격려하고 있습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여러분의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십시오” (엡. 5:19)라고. 시와 찬미와 영적인 노래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 중심으로 주님을 노래하는 성도의 상태는 어떤 상태일까요? 그것은 교회 지도자의 지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조직화되어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성경과는 무관하게 무비판적으로 현실을 부인하는 맹신적 집단이 되었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이런 마음의 중심으로 주님을 노래하는 영적 상태는 각자가 받은 구원에 대한 감격 가운데 지속적으로 말씀의 진리에서 자라남으로 성령님의 충만하신 은혜와 다스림으로 만족과 기쁨으로 하나되는 교회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참된 교회의 부흥임을 믿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주님의 몸으로 지어져가는 아포슬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