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ober 15, 2023

“교회의 시작” (The Beginning Of The Church)

Preacher:
Passage: 사도행전 (Acts) 2:42, 46~47
Service Type:

“교회의 시작”

(The Beginning Of The Church)

10-15-23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2:42,46-47

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라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설교 요약]

우리는 <사도행전 2장> 마지막 부분 (42~47절)에 언급된 초대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이번주와 다음주에 ‘교회란 무엇인지?’를 함께 묵상해보기 원합니다. 먼저 이번주엔 ‘초대교회는 어떤 교회였는지?’ 그리고 다음시간엔 ‘오늘 우리는 어떻게 진정한 주의 몸된 교회를 회복해 갈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에 보았듯이, 오순절날 베드로의 설교로 3천명이 죄를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말의 능력이 아니라, 그날 불의 혀같이 임하셨던 성령의 능력이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과 그 곳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임하신 결과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성령께서 권능으로 임하신 날이 ‘기독교회’의 생일임을 우리는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출발하게 된 초대교회, 곧 예루살렘교회는 어떤 특징들이 있을까요? 그들은

  • 말씀의 가르침을 받는 공동체”였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이들은 사도를 통해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는 공동체였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v.42)라고. 이들은 생명되신 말씀의 젖을 사모함으로 영적으로 건강하게 자라난 공동체였습니다.
  • 교제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저희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v.46)라고 기록합니다. ‘날마다’ (continuing daily) 기쁨과 열정 가운데 모이기를 힘썼다는 것입니다.
  • 셋째,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공동체”였습니다: <행. 2:44-45>에 보면 교인들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 몸의 지체로서 자원함으로 서로의 필요를 아름답게 채워 갔던 것입니다.
  • 넷째, “예배하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살아 있는 예배’의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고)” (v.42), 또한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고, 하나님을 찬양” (v.46-47)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도전한 ‘산 제사’ (a living sacrifice)의 예배가 아닐까요?

바라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충만하신 권능을 의지하여, 모이기를 힘써서 말씀 가운데 자라 나감으로 함께 떡을 떼며 서로의 상처를 싸매 주고 함께 기쁨을 나눠 가지는 주의 귀한 공동체 되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들은 흔히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말하곤 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교회가 처음 출발했던 초대교회 당시의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회복하자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슬로건이 계속해서 존재하는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 이유는 이 땅에 크고 작은 교회는 많지만, 초대교회가 보여준 믿음과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의 신실한 모습을 실천하는 교회는 지극히 적음을 반증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말은 멋지게 할 수 있지만, 실제로 ‘함께 말씀의 가르침을 받아서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힘쓰는 교회’, 그리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서로를 뜨겁게 사랑함으로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고 영적으로 부흥되어가는 교회’는 결코 흔치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초대교회와 같은 교회 공동체는 오늘날 불가능한 것일까요?

전세계 사람들이 즐거움과 기쁨으로 기념하는 <크리스마스>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데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입니다. 그런가 하면, 최근 몇 주 동안 함께 살펴보듯이 우리 ‘기독교회’의 생일이 바로 <오순절>인 것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는 바로 오순절날에 주님의 제자들에게 불의 혀 같은 성령강림의 역사를 통해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 살펴본대로, 사도 베드로가 모인 사람들 가운데서 이 놀라운 현상은 구약성경에서부터 예언을 통해 약속된 성령강림의 역사라는 것과,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음을 증거하는 것임을 선포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의 구원자되신 ‘나사렛 예수를 너희가 못박아 죽게 했다’고 베드로가 모여든 사람들을 향하여 도전했을 때, 그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아 주의 제자가 되는 역사가 그날 하룻동안만 3천명이나 더했던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의 영, 성령의 권능이 없으면 불가능할 역사가 발생한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회가 태어난 첫날에 벌어진 상황인 것입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 교회 공동체는 과연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지를 이번 주와 다음 주에 걸쳐서 살펴보기 원합니다. 먼저 이번 주에는 사도행전에서 밝히는 처음 태어난 초대교회는 과연 어떤 모습인지를 살펴보고, 다음 주는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성도는 이런 초대교회의 진정한 생명력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 것인지를 함께 묵상해보기 원합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오순절 성령강림의 날에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께서 그리스도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긴 역사를 통하여 약속하신 구원자이심>을 선포하고 나서, ‘이런 그리스도 예수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고 도전했습니다. 그때 모인 사람들 가운데서 3천명이 회개하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 받고, 영생을 얻는 구원의 역사가 벌어졌던 것입니다. 이것이 곧 ‘기독교회의 탄생’이라고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눈 여겨 보아야 할 사실은 이렇게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아니 성령님의 강력한 임재하심으로 탄생한 교회는, 이제 이 교회가 막 출발하는 그 시작점부터 어떤 특징을 나타내는지를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초대교회의 특징일까요? 그것은

첫째, “말씀의 가르침을 받는 공동체”였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가 어떤 모습인지를 오늘 본문말씀은 이렇게 먼저 묘사하고 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저는 믿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v.42)라고. 이 말씀은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처음 세워진 예루살렘교회는 사도들을 통해 성경적이고 건강한 말씀이 선포되고, 말씀의 가르침을 공동체가 추구하고 나아가야 할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성도 개인과 교회 공동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은 제가 새삼 강조하지 않터라도 성도 여러분 대부분은 이미 아실 것입니다. 비록 여러분이 이런 저런 이유로 말씀을 매일 매일 묵상하거나, 체계적인 성경공부를 지속적으로 행해 나가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만이 개인과 공동체를 본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음을 여러분은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기초가 되지 않는 신앙적인 열심은 경우에 따라서 도리어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독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이해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초대교회에서부터 거짓교사를 통해 이미 존재했던 수없이 많은 잘못된 가르침은 교회공동체 안에 엄청난 해악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말씀의 가르침을 따라 잘 성장해 나가야 하겠지만, 아무 말이나 무턱대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도리어 <행. 17장>에 나오는 베뢰아 사람들처럼 진리의 말씀에 대한 진지함과 간절함으로 그 말씀을 묵상하고 분별하여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곧,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던 것)” (행. 17:11)입니다. 그만큼 성경말씀을 대하는 성도의 마음가짐은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신사적이다” (noble)는 표현은 다른 말로 “마음이 트였다” 혹은 “고결하다”는 의미로써 그만큼 거짓 가르침에 잘 빠지는 사람들의 모습처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데살로니가 사람들처럼 무조건 의심하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베뢰아 사람들은 열린 마음과 영적 지혜와 날카로운 분별력을 가지고 열린 마음 가운데 분명히 진리를 추구하는 간절함으로 ‘그 가르침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를 날마다 성경 말씀에 비추어 살펴보고 확인해 나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그의 영적 아들인 디모데에게 그의 마지막편지에서 밝히고 있듯이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만이 성도 개개인을 그리고 교회공동체를 온전히 가르치시고 든든히 세워주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함 이니라” (딤후. 3:16-17)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초대교회는 이렇게 신령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고, 그 말씀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났던 공동체였습니다.

둘째, “교제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오늘날 흔히 ‘친교’ 혹은 ‘교제’ (fellowship)라고 하면, 주일날 예배 마치고나 혹은 특정 요일에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잠시 서로 대화 나누거나, 좀더 나아가면 우리 교회처럼 식사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교제의 전부로 이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원래 성도의 교제는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성도의 교제는 우리의 그것과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전혀 힘쓰니라 ~ 날마다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v.42-46)라고.

초대교회 공동체에 있어서 ‘교제’는 어떤 특별한 날, 가끔씩, 교회 프로그램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마디로 교인들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저자 누가가 강조하는 것과 같이 이 교제는 ‘날마다’ (continuing daily)행해졌던 것입니다.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고, 또한 집에서 떡을 떼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함께 식사하며 삶을 구체적으로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하면 어떤 성도님은 ‘목사님, 그 당시는 아직 사회가 발달하지 않고, 하는 일이 별로 없어서 날마다 성전에 모이고 집에서 떡도 떼고 했지, 요즘같이 사회가 복잡하고 발전된 상황 속에서 일하고 공부하면서 그렇게 자주 모인다는 것은 솔직히 불가능하지 않은가요?!’라고 말하고 싶은 분들도 있으리라 저는 미루어 짐작해 봅니다. 물론, 그런 반론의 제기도 충분히 수긍히 가는 측면도 있습니다. 그만큼 사회는 복잡 다난하게 발전했고, 그만큼 우리를 바쁘게 몰아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그러나, 제가 여러분에게 한가지 반문하고 싶은 것은 이렇게 현대사회가 바쁜 것이 우리가 더 가까이 교제하고 삶을 나누지 못하는 절대적인 이유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좀 솔직히 말하자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도 여전히 우리들 대부분은 자신이 관심있는 취미활동이나 좋아하는 일에 있어서는 일주일에 몇번이고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것 아닌가요? 문제는 ‘내가 과연 그 모임이나 그 일에 가치와 의미를 두는가?’하는 것 아닐까요? 사실 이제 처음으로 태어난 예루살렘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함께 모여 삶을 나누는 것을 진정으로 기뻐했고 가치있게 여겼던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그분의 제자로서 대가지불의 삶을 결정했을 때, 누리게 될 참된 유익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매와 논밭을 백배나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막. 10:29-30)고 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만약 우리가 주님을 위해 대가지불을 했을 때, 지금 이 세상에서 ‘형제와 자매와 부모와 논밭’을 백배나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주어진 믿음의 가족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그분의 몸된 교회공동체를 복된 가족으로 약속하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말로 만이 아니라, 머리로 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맺어주신 믿음의 가족을 인정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고, 더 깊이 사랑할 수 있을까요?!

셋째,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공동체”였습니다: 우리가 한가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초대교회 가운데서도 가장 먼저 탄생한 사도행전 2장의 ‘예루살렘교회’에서 지금 살펴보는 공동체의 특징은 이 교회가 적어도 1년이나 10년, 혹은 20년의 긴 시간을 지내면서 시행착오를 겪고 더 노력하고 영적 지도자들의 모범을 통해서 이루어진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지금 살펴보는 공동체의 특징은 즉시 일어난 현상이란 겁니다. 이 모습은 교회가 시작됨과 동시에 누가 약속한 것도 아닌데 서로 자원함과 기쁨으로 열심을 다해 하나됨으로 행한 결과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도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영적으로 함께 성장했다는 것이요, 구원받은 성도들 안에서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고 깊은 교제를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이것과 함께 어쩌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 바로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공동체’가 되었다는 점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 <42절>과 <46절>사이에 있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v.44~45)라고. 초대교회 성도들은 ‘다 함께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서로의 필요에 따라 나눠 주었다’고 사도행전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말씀은 오늘날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 이슈가 됨을 저는 잘 압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얼핏 들으면 초대교회는 마치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 국가’체제와 비슷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뿐 아니라 오늘날 기독교 사이비종교집단에서 사악하게 교인들의 전재산을 자기들에게 갖다 바치는 근거로 이 말씀을 악용하는 예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사도행전 2:44-45>말씀 뿐 아니라 신.구약 성경 그 어디에도 교회가 성도 개인의 재산을 몰수하거나 소유권을 박탈하여 교회에 갖다 바치게 하는 식의 행태를 정당화한 곳은 없습니다. 그럼으로 교회공동체가 오늘날 공산주의식의 ‘사유재산을 거부하고, 공동소유를 추구한다’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특별히 성도가 서로의 필요를 따라 서로 도와주고, 나눠주는 이 모든 돌봄의 행위는 그 어떤 교회의 강제적 명령이 아니라, 오직 성도 개인의 자발적인 선한 믿음과 사랑의 동기가 이런 지체의 필요를 채워주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함께 모든 물건을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서로의 필요에 따라 나누는 모습이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조차 하나의 큰 이슈가 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저는 이 이슈의 중심에는 교회가 추구하는 것이 사유재산을 인정하느냐 아니냐 라는 법과 제도의 문제라기 보다는, 실제로 예루살렘교회와 같이 우리 교회는 ‘도움이 필요하고, 물질이 필요한 곳에 자발적으로 그 필요를 따라 채울수 있는 믿음의 공동체로 성숙했는가? 하는 점일 것입니다.

이점에 있어서 성경은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성품으로 우리를 집중하게 합니다. 구약성경은 거듭 거듭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신. 24:17,27:19; 시. 68:5,146:9; 사. 1:17,23) 그분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으로 소외되고 약한 자들을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초대교회에서는 언제나 이런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하심을 좇아 주 안에서 하나된 공동체로서 서로를 돌아보는 서로가 되어야 함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고린도서에서 몸의 지체로서 서로를 책임져야 함을 도전한 이유인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느니라” (고전. 12:24-25)고 바울은 왜 우리가 서로의 필요를 채워 주어야 하는 공동체인지를 고린도 성도들에게 역설하는 것입니다.

넷째, “예배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첫 초대교회인 예루살렘교회가 비록 완벽한 교회는 아니었다 할찌라도 수천년이 지난 오늘날도 변함없이 우리 구원받은 믿음의 공동체가 본받고 돌아가기를 원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는 그 핵심은 ‘예배하는 공동체’임을 강조하고 있다고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다른 특징들이 아무리 멋지고 대단할 찌라도, 만약 그 공동체의 중심에 예배가 빠져 있다면, 예배가 살아 있지 않다면, 그 공동체는 결코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몸이라고 불릴 수 없고, 하나님의 성전된 교회라 불릴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만 보더라도, 예루살렘교회가 얼마나 삶과 예배가 함께 아우러진 공동체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데로 성도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던)” (v.42)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고, 하나님을 찬양” (v.46-47)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예배’라고 하면 응당 ‘주일예배’나 ‘새벽기도’ 혹은 특정기간의 부흥회 등을 예배라고 인식합니다. 그러나, 저자 누가가 말하는 예루살렘 공동체의 예배, 곧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예배는 일상의 삶과 예배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되는 <살아 있는 예배>임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살아 있는 예배자로 세워지는 성도 개인과 공동체가,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우리 성도를 향해 도전한 <‘산제사’ (a living sacrifice)의 예배>가 아닐까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라고 말입니다. 단지 주일날 한두시간 드리는 예배가 전부가 아니라, 그것은 한주를 여는 첫 시작이요, 본격적인 예배는 우리 각자가 삶의 현장 가운데, 강의실에서 연구실에서 그리고 직장과 비즈니스현장에서, 또한 열심을 다해 서로 모이기를 힘씀으로 함께 떡을 떼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우리의 몸과 삶 전체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산제사로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첫 초대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와 같은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은 오늘날 실현 불가능한 것일까요? 저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만약 성도 여러분과 제가 우리의 힘과 노력에 의지하지 않고, 아포슬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충만하신 권능을 의지한다면 가능할 것입니다. 만약 모이기를 폐하는 자들의 습성을 따르지 않고, 날마다 모이기를 힘써서 말씀 가운데 자라나가고, 함께 떡을 떼며 서로의 상처를 싸매 주고 함께 기쁨을 나눠 가질 수만 있다면 가능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각자의 삶 가운데, 그리고 우리가 함께 연합함으로 하나되어 감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영적 예배를 드리는 우리 아포슬 공동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