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ober 22, 2023

“그리스도의 몸” (The Body Of Christ)

Preacher:
Passage: 사도행전 (Acts) 2:42,46-47
Service Type:

“그리스도의 몸”

(The Body Of Christ)

10-22-23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2:42,46-47

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라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EThey devoted themselves to the apostles’ teaching and to fellowship, to the breaking of bread and to prayer.)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Every day they continued to meet together in the temple courts. They broke bread in their homes and ate together with glad and sincere hearts,)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praising God and enjoying the favor of all the people. And the Lord added to their number daily those who were being saved.)

[설교 요약]

지난 시간에 우리는 첫 초대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는 어떤 교회인지를 이해해 보았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초대교회가 가졌던 그 순수한 그리스도의 몸된 특성을 회복하고, 누려 나갈수 있을 것인지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먼저 ‘교회’는 헬라어, 원어로 '에클레시아'로써 "불러내다, 따로 세우다, 모으다"라는 뜻이고, '성구사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모인 공동체"라고 교회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요? 그것은

첫째, "말씀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1-32)라고 주님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된 우리들은 계속해서 그분의 말씀 안에 거함으로 그의 참된 제자가 되고, 명령하신 ‘서로 사랑’하기를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연결되어야” 합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여러 곳에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 (The body of Christ)으로 비유합니다. 그 이유는 ‘연결됨’의 중요성을 강조함 일 것입니다. 한 몸이 아프면 같이 고통을 느끼고, 한 몸이 영광을 받으면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고전. 12:26-27).

셋째, “예배로 하나되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예배를 통해 진정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모습처럼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함께 떡을 떼고, 전혀 기도에 힘쓰며 하나님을 찬양하여 ‘산 제사’로 예배를 드림으로 주님의 몸을 이룰수 있습니다.

넷째, “구원받는 자가 날마다 더해야”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v. 47)고 예루살렘교회 공동체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말씀 가운데 하나로 연결되어 하나님을 찬미할 때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그들을 칭찬하고, 계속해서 구원받는 역사가 벌어집니다. 이것이 성령의 권능으로 성장하는 교회인 것입니다. 이런 복된 주님의 몸된 아포슬 공동체 되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교회’가 무엇인지를 알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첫 초대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는 어떤 교회인지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먼저 예루살렘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올바른 말씀의 젖을 먹고 자라난 교회였습니다. 이런 영성을 토대로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모이기를 힘쓰고 함께 교제하고,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공동체가 예루살렘 교회임을 알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예루살렘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이들은 “기도하기를 온전히 힘쓰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자들”이었습니다. 바로 날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자기자신과 주의 몸된 공동체 전체가 드려지는 살아 있는 예배를 드리는 공동체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순절날 불의 혀같이 성경의 임하심으로 태어난 예루살렘교회의 특징이었습니다. 이제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그렇다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초대교회가 가졌던 그 순수한 그리스도의 몸된 특성을 회복하고, 또한 풍성하게 누려 나갈수 있을 것인지를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저는 과연 아포슬교회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으로 변화되며, 그리하여 장성하게 자랄수 있는지를 여러 주동안 묵상하는 가운데 요즘 ‘독서토론’시간에 함께 읽고 소감을 나누는 C. 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를 떠울리게 되었습니다.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의 후반부에 보면, 그는 <기독교는 쉬울까, 어려울까?>라는 흥미로운 소제목의 장이 나옵니다. 그장에서 루이스는 어떤 사람에게는 기독교는 무척 어렵고, 그러나 또 어떤 사람에게는 기독교는 쉽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에게 기독교는 어려운 것이고, 또 어떤 사람에게서 기독교는 쉬울 뿐 아니라 신나고 흥미진진한 것일까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지난 장에서 ‘그리스도로 옷입는다’ 혹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 일단 하나님의 아들인 것처럼 ‘분장한다’는 기독교의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많은 일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전부입니다. 기독교가 줄수 있는 것은 오직 이것 뿐 입니다”라고 그는 강조합니다. 이것은 무슨 말일까요? 이것은 기독교는 단순히 ‘선량한 사람’ ‘도덕적인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게 하는 것이 그 목표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선생님이 기하학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으로 예를 들어 이렇게 설명합니다. “선생님들은 반에서 가장 게으른 아이가 결국은 가장 힘들게 공부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 말의 의미는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이 두 아이에게 기하학원리를 설명할 때, 수고할 준비가 되어 있는 아이는 그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게으른 아이는 그냥 외어 버리려 들 것입니다. 당장 노력이 덜 드니까요! 그러나 여섯달 쯤 지나 시험을 치를 때가 되면, 게으른 아이는 성실한 아이가 단 몇 분 만에 이해하고 재미있어 하는 내용을 공부하기 위해 몇 시간씩 들여가며 고역을 치러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게으름을 피우면 결국 더 많이 공부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기독교는 그 무엇보다도 <본질>을 잘 잡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여기서 루이스가 우리에게 분명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기독교는 좀더 나은 사람으로 성숙되어지게 하는 종교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변화케 하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 거듭난 자들의 영적 사건을 사도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라고 선언한바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애벌레에서 하늘을 나는 나비로 변화되는 것인데, 우리가 진정한 크리스챤이 된다는 것은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본질적 변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우리 성도가 “그리스도를 옷입는다”라고 말한 뜻이요, 또한 C.S 루이스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는 일단 하나님의 아들인 것처럼 분장한다”라고 기독교의 핵심을 상징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장 감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할찌라도 말입니다. 그럼으로 이것이 ‘순전한 기독교’ 마지막 장의 주제가 ‘새사람’인지에 대한 이유일 것입니다.

여기서 ‘새사람’은 그 어떤 나의 ‘인격적, 도덕적, 철학적 노력’에 의한 좀더 변화되고 성숙된 새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아들 안에만 있는 생명, 곧 ‘영원한 생명’ (조에)를 통한 ‘새사람’으로의 변화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내 죄가 사함받고 그분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20)라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크리스챤의 이런 인간 존재의 상상하기 (설명하기)조차 힘든 변화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교회가 무엇인가?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공동체가 과연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첫 출발점이자 근거가 된다고 저는 믿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교회'라는 단어의 의미가 그 점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교회>는 헬라어, 원어로 '에클레시아'로써 "불러내다, 따로 세우다, 모으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성구사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모인 공동체"라고 교회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공동체의 한 부분, 곧 손과 발과 같은 지체가 된다는 것은 옛날보다 좀더 성숙된 인격과 고상한 신앙심을 가진 존재로 발전했다는 것 아니라, 본질적으로 아담에 속한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새사람'을 입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의 생명을 통해 '새사람'으로 거듭남으로 첫사람 아담에 속하여 원죄를 물려받은 '옛사람'을 벗어 버리게 된다는 것 (= 옛사람이 죽음)이요, 이렇게 예수님을 믿음으로 '새사람'되어 따로 세우심을 받아 한 몸이 된 사람들의 공동체가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런 교회의 본질을 우리 각자가 영적으로 이해하는 만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그의 생명 가운데 서로 연결되어 함께 자라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신앙고백을 통해 그의 생명으로 새사람 되고, 이렇게 다시 태어난 자들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으로 연결된 것이 교회임을 깨닫고 있는가 가 매우 중요한 영적 깨닫음이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사도 바울이 표현한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든가, C. S 루이스가 말한 '하나님의 아들인 것처럼 분장한다'는 표현을 쓰면서 "이것이 기독교가 줄 수 있는 전부입니다"고 강조한 핵심인 것입니다. 크리스챤은 '새사람'이요, 교회는 세상에서 따로 불러내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새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머리로 한 몸이 되어 함께 자라는 영적 공동체입니다.

이것을 이해했다면, 우리는 이제 좀더 쉽게 오늘날 우리 아포슬 교회를 포함한 모든 주님의 몸된 교회가 어떻게 자라날수 있을 것인지를 이해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요? 그것은

첫째, "말씀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제가 앞서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모인 공동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주님을 믿는 신앙고백이 어떻게 우리를 하나로 연결해 줄까요?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가 아닐까요!? 우리 성도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의 말씀, 그 생명의 말씀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이점을 예수님 자신도 이렇게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1-32)라고. 또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 15:7)고 말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을 신뢰하고 사랑한다는 뜻이요,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말씀을 더욱 알아 나가기 원할 것이요 그분의 말씀을 지켜 나가고자 힘쓸 것이라는 것은 더 길게 설명할 필요조차도 없는 진실일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이라고 신앙으로 고백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더욱 알아 나가기를 힘쓸 것이요, 그 말씀을 따라 지켜 나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요. 8:31>에서 주님께서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내 말에 거하면”이라는 영어성경, KJV에서 보면 “If you continue in My Word”입니다. 우리 말로 직역하면, “만약 너희가 계속해서 나의 말에 거하면”입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며 그분이 영적으로 주시는 자양분을 공급받고,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 영적으로 자라나게 될 때 그분의 참된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될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저는 여기서 주께서 ‘계속해서’ (continue)라고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놓쳐서는 안됨을 확신합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유익한 주의 말씀을 어떤 인간적인 선입관이나 육신적인 판단이 아닌 성령의 도우심으로 깨닫고, 깨닫은 말씀을 어떤 고통이 있더라도 대가지불을 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결단과 용기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결되기 위한 우리 각자의 영적 기초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기초가 되어 함께 나누는 설교말씀과 크고 작은 공동체 모임 가운데서 생명의 말씀으로 서로 연결되고, 함께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든든히 세우지 못합니다. 오직 주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는 함께 세워지는 것입니다.

둘째, “연결되어야” 합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 (The temple of God)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거기에 비해 ‘그리스도의 몸’ (The body of Christ)으로 설명하는 곳이 훨씬 많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우리 ‘인간의 몸’ (The body of human)은 그 특성상 유기적으로 하나로 연결되어야 함께 성장할 뿐 아니라 생존할 수도 있음을 강조하고자 함이 아닐까요? 바로 머리를 중심으로 손과 팔과 다리와 온 몸의 각 지체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끊임없이 머리를 통해 판단하고 지시함으로써 손과 발등 온 몸이 일사분란하게 한 몸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몸의 지체중 눈과 코, 손과 발 그 어는 한 부분도 몸에서 따로 떨어져 나간 상태를 우리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상태가 되었다는 것은 끔찍한 것입니다. 더 이상 서로가 연결되지 않고 분리되어 한 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간의 ‘몸’이 교회라는 ‘영적 공동체’를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뜻은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과 같은 신약성경의 기자들이 교회를 ‘한 몸’ (one body), 곧 ‘그리스도의 몸’으로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연결됨’의 중요성을 강조함 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첫번째 편지에서 이점을 이렇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 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고전. 12:26-27)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의 한 몸으로 연결하게 하신 이유는 한 지체가 고통을 받을 때 다른 지체도 고통을 받게 하며, 또한 한 지체가 영광을 받을 때 다른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게 하고자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아포슬 공동체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한지체가 아파할 때 함께 고통을 느끼고 있습니까? 아니 그 지체가 현재 어떤 고통과 아픔 가운데 있는지를 관심 갖거나 인지하고 있습니까? 더 나아가 한 형제가 자매가 영광을 받았을 때 진정 함께 기뻐하고 즐거움을 나누는 공동체입니까?

셋째, “예배로 하나되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첫번째 질문과 대답은 언제나 깊은 영적 메아리로 저에게 다가옵니다. 그 첫번째 질문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근본목적은 무엇인가?” 입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히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삶이 가장 아름답고 축복되게 열매 맺게 된 상태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우리의 신실한 신앙의 선조들은 말씀과 기도와 묵상 가운데 깨닫았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와 같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자일까요?’ 저는 <예배하는 자>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자가 그분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그분의 자녀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 성도 대부분은 우리 각자가, 그리고 교회 공동체가 ‘참된 예배자’로 서야 하며 그리고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함에 동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 어떻게 이런 참된 예배자, 곧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자로 살아 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난 시간, 예루살렘 교회 성도의 모습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듯이, 이들은 그들의 말씀묵상과 성도의 교제 그리고 기도와 찬양이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또한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고, 함께 떡을 떼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던 것입니다. 어디까지가 말씀공부요, 어디까지가 친교며, 어디까지가 찬양과 예배라고 분리하기가 힘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로 어울어져 말 그대로 삶 전체로 ‘산제사’로 드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살아 있는 예배’가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오늘 이 주일 아침 함께 모여 함께 말씀보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이 공예배가 귀중한 만큼, 오늘 이 예배를 마치고 각자 자기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서 우리가 다시 만날 때까지 공부하고 일하고 아이 키우며 일상의 삶 가운데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의 예배로 드리는 것은 진실로 중요한 예배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우리 각자는 이 세상을 본받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온전한 뜻을 분별함으로 거룩한 산제사의 예배를 드릴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과 같지 않고, 함께 모여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랑과 선행을 격려함으로 살아 있는 예배를 드릴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 “구원받는 자가 날마다 더해야”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예루살렘교회의 특징을 누가가 설명하면서 마지막 구절에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v. 47)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초대교회였던 예루살렘교회는 날마다 함께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였고, 믿지 않는 예루살렘 백성들로 부터도 칭찬과 인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요즘말로 ‘믿으려면 저 정도는 믿어야 된다’고 인정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전하는 예수님의 복음만이 아니라, 저들의 삶의 모습이자 열매를 통해 인정받고, 더 나아가 칭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들의 최대의 약점이라고 말한다면 제가 지나친 표현일까요? 과연 우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읍니까? 과연 우리의 삶의 모습을 보고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향기를 드러내고 있는가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그들의 정체성을 도전함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람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고후. 2:15-16)라고. 우리는 과연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 한국이나 미국 할 것없이, 예루살렘교회와 같이 날마다 구원받는 자가 더하는 진정한 성장을 하는 교회가 얼마나 되는 것인지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큰 교회냐? 작은 교회냐? 를 따지기 이전에 늘 같은 얼굴 같은 멤버로 정체된 교회는 아닌지? 혹은 교인수는 늘어났는데 실제로는 예수님을 처음 믿고 구원받은 자가 아니라 ‘옆교회에서 옮겨온 신도들’ 소위 ‘수평이동해온 신도들’이 대부분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살아 있고 생명력 넘치는 주님의 교회는 이와 같이 예수님을 알지 못했던 자들이 먼저 믿었던 자들의 모습을 보고 함께 교회 출석하게 되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날마다 구원받게 되는 이런 생명의 역사가 넘치는 교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아포슬 교회는 과연 어떤 교회일까요? 만약 우리 주께서 우리를 평가하시면 어떤 공동체라고 평가하실까요? 바라기는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함께 자라나고, 그분의 사랑 가운데 함께 연결되어, 날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살아 있는 제사를 드리며, 우리 공동체를 통하여 구원받는 자들이 날마다 더하여지는 복된 주님의 몸된 아포슬 공동체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