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ober 29, 2023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Silver Or Gold I Do Not Have)

Preacher:
Passage: 사도행전 (Acts) 3:3~6
Service Type: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Silver Or Gold I Do Not Have)

10-29-23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3:3-6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걷으라 하고

[설교 요약]

오늘 본문말씀은 나면서부터 40여년간 평생을 걷지 못하고 앉은뱅이로 살아가던 한 걸인을 베드로가 낫게 하는 내용입니다.

베드로는 그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걷으라” (v.6)고 말했고, 그는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미했던 것입니다 (v. 7-8).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앉은뱅이었던 자가 낫게 되었다는 의미일까요? 그것은

          첫째, “하나님은 우리를 치유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보면, 죽은 자를 살리는 이적을 포함한 크고 작은 수많은 병고침의 사건이 나옵니다. 이 모든 ‘표적’ (a miraculous sign)의 목적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미래에 완성될 구원’을 증거하기 위함 입니다. 그럼으로 앉은뱅이가 걷게 될 때, 그는 즉각적으로 하나님을 찬미하며 감격했던 것입니다 (v.7-8).

둘째, “이 권능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임함”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요지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성령의 권능을 받게 됨으로 진정한 ‘그분의 증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성령강림’때의 첫번째 설교 뿐 오늘 본문사건에 이어지는 두번째 설교에서도 그 주제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임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시고, 권능을 주심으로, 주님을 믿는 믿음이 그 사람을 낫게 했다는 것입니다 (행. 3:16).

셋째, “내 안에 있는 <앉은뱅이>는 무엇인가”를 깨닫게 합니다: 베드로는 이 치유사건으로 인해 모인 사람들을 향해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3:19)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1차적으로는 불신자들을 향한 메세지이지만, 동시에 이미 예수님을 믿었지만 영적 충만을 누리지 못하는 성도에게도 해당됩니다. 날마다 나의 죄와 허물을 주께 자복하지 못하고, 영적 힘과 기쁨 없이 영적 앉은뱅이처럼 살아가는 성도들을 향한 도전이자 초청인 것입니다.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육신의 건강 뿐 아니라, 우리를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앉은맹이’처럼 얽어 메는 모든 죄와 헛된 것들에서 자유케 되어 하나님을 찬미하며 충만한 기쁨을 누리는 성도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가 한 앉은뱅이를 걷게 하는 놀라운 사건에 대해 함께 말씀의 은혜 나누기 원합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앉은뱅이의 삶’을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두발과 발목에 힘을 주어 일어나지 못하고, 걷고 뛰며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행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이런 불행한 앉은뱅이가 되어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은 아닌지 각자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우리를 얽매고 있는 모든 무겁고 힘겨운 마음의 상처들과 자라온 환경의 어두운 영향의 굴레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떨쳐버리고, 기쁨과 감사로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복된 성도 여러분의 남은 인생 되시길 소망합니다.

<사도행전 3장>은 시작하면서 오늘 본문에서 사건의 배경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v.1,2) 초대교회 당시 주님의 제자들은 매일 ‘제삼시 (오전 9시)’, ‘제육시 (정오)’ 그리고 ‘제구시 (오후 3시)에 이렇게 하루 세번 기도시간을 정해 드렸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기도방법은 초대교회 당시 제자들 뿐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기도로 헌신하는 전통으로써 구약시대에서부터 신실한 유대인들이 지켜 오던 종교적 전통이었던 것입니다 (단. 6:10). 이날도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고자 올라가고 있을 때, 한 사람과 마주쳤던 것입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걸을 수 없었던 장애인, 곧 ‘앉은뱅이 된 자’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대략 40세가 넘은 나이였음(행. 4:22)을 다음 장, 4장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 날도 자기 스스로는 걸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가진 것이 넉넉해 어떤 보조 기구를 만들어 바퀴를 굴리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텐데, 그는 지금 그런 형편이 전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전혀 걸을 수 없는 장애의 몸으로서 40년이 넘는 기간을 오직 남의 도움을 받아야만 옮겨 다닐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날도 사람들이 그를 메고, 성전 곧 ‘미문’ (the gate called Beautiful) 이라 불리는 문 앞으로 그를 데리고 온 것입니다. 성전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한 푼 동냥을 구걸하기 위함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오늘 본문에서 보는 것과 같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시간에 맞춰 올라가고 있었고,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그는 이것을 놓치지 않고 두사람에게 구걸을 했던 것입니다. 평생 그가 해 왔듯이 말입니다. 아마도 그 당시 베드로와 요한이 그리 값비싸고 화려한 옷을 입었을 것 같지는 않았을 것 같고, 이렇게 행색이 특별해 보이지 않는 그들에게 이 앉은뱅이도 별 기대없이 습관적으로 ‘한푼 달라’고 했지 않았을까 여겨집니다.

그런데 사건은 여기서부터 발생합니다. 이 소망 없는 걸인은 별 생각없이, 기대없이 ‘한 푼 달라’고 구걸했는지 모르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이 사람을 살짝 바라보고 못본 척 지나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그를) 주목했던 것” (looked straight)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그에 대한 관심과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우리를 보라” (Look at us!) (v.4)라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기대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말을 듣고는 혹시나 돈 몇푼 얻을까 하여 <5절>의 기록처럼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 (보았던)” (v.5) 것입니다. 제가 추측하기는 이 걸인은 ‘이렇게 행색이 대단해 보이지 않는 양반들이 뭐 별것을 주겠어?!’라는 식의 의구심과 ‘혹시 알아?!’라는 기대감이 뒤섞인 가운데 비록 짧은 순간이긴 하지만, 그들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그리하여 그가 두 사도를 바라보았을 때,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v.6)는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베드로가 “은과 금은 네게 없거니와” (v.6a)라고 첫마디 말을 했을 때, 그는 ‘그러면 그렇지! 내가 별 것 없는 줄 알았어!’ 라고 실망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걸인이 체 낙심의 감정에 사로잡히기도 전에 이어서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v. 6b)고 믿기지 않는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베드로가 그에게 그가 기대하는 데로, 금이나 은 몇냥 정도 손에 쥐어 주었다면 그는 그것 만으로도 감지덕지하며 ‘이것이 얼마만에 얻는 큰 횡재야!’라고 하며 무척 좋아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받았다고 달리진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베드로는 걸인이 자기 귀를 의심케 하는 발언을 합니다.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6)고 말입니다.

지금까지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 그러나 그가 간절히 듣기 원했던 말, “일어나 걸으라”는 말을 이 앉은뱅이 된 사람은 듣는 것입니다. 아마도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가 의사였던 점을 고려해볼 때, 누가는 이런 심히 놀라운 기적적인 치유의 순간을 짧지만 매우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가 베드로의 이 엄청난 말의 사실여부를 확인할 틈도 없이, 베드로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킵니다. 바로 이 순간에 발생한 상황을 누가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걷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 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v.7,8)라고 말입니다. 이 앉은뱅이 걸인이 꿈에도 바라지 못한 기적이 벌어진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는 순간 발과 발목에 힘을 얻게 되고, 그는 마치 생기 넘치는 어린 아이처럼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 (찬미)했던 것입니다. 혼자서 두 발로 일어서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걷고 뛸 수 있다는 것이 어찌 꿈엔 들 기대했겠습니까? 그는 감격 속에 온몸으로 기쁨을 만끽하며 이 놀라운 하나님의 치유하심의 권능을 찬양했던 것입니다.

이제 이 시점에서 제가 성도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앉은뱅이었던 자가 낫게 되었다는 의미일까요?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은 우리를 치유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서 벌어진 놀라운 치유의 사건뿐만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에서 기록된 기적적인 병고침의 역사는 앞서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을 통해 잠시 살펴본 것처럼, 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것인가, 아니면 그 당시 사도시대때만 적용되는 것인가에 따라 신학적으로 크게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었습니다. 주로 보수신학을 중심으로 한 ‘존 맥아더’와 ‘찰스 스탠리’ 목사 등과 같은 목회자들이 오늘 본문의 앉은뱅이의 병고침을 비롯한 초대교회의 기적적인 병 고침사건은 사도시대때만 국한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소위 ‘오순절파’로 불리는 은사주의를 지향하는 신학자들은 오늘날도 사도시대때 일어났던 기적적인 병고침은 여전히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자신의 믿음에 기초하여 성경지식과 신학관에 따라 오늘 본문과 같은 표적사건을 오늘날도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분별해 나가야 하겠지만, 이것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서든 관계없이 ‘이런 치유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권능>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엄격히 살펴봤을 때, 초대교회의 사도시대 때라고 해서 이와 같은 초자연적인 치유의 사건은 그리 흔한 사건은 아님을 신약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공생애 기간인 3년 반을 사역하실 때, 여러가지 많은 병자들을 낫게 하시고, 심지어 죽었던 자들을 다시 살리셨지만 그것도 현실적인 기준에서 본다면 그 당시의 전체 병자와 죽어 가는 자들과 비교해 본다면 지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무엇일까요? 주님의 권능과 치유하고자 하는 뜻이 그것까지 이기 때문일까요?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이런 놀라운 치유의 역사는 하나의 ‘사인’ (표식)을 주고자 함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도는 말할 것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의 사역조차도 장차 주어질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완전한 구원의 역사를 하나의 “표식” (the Sign)으로 보여주시는 것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이것을 <이적/표적> (The miraculous Sign)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런 기독교적인 모든 초자연적인 현상의 목적은 하나님의 권능과 장차 그분의 완전한 구원역사, 곧 주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날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되고 주께서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고 고통과 아픔과 상처를 싸매어 주시고, 주 안에서 잠자던 모든 자를 다시 살리실 미래를 강력하게 보여주는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우리가 이적을 일으킨 그 어떤 사람에게 영광과 이목을 집중해서는 안되는지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것이 ‘평생을 앉은뱅이로 살았던 사람’이 병고침을 받게 되자마자, 거의 동시적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어린 아이처럼 뛰며 기뻐했던 이유였던 것이라 믿습니다. 이 앉은뱅이였던 사람은 오직 하나님만이 이런 권능을 행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심을 영적으로 깨닫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 권능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임함”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예수님 당시나 2천년이 지난 지금이나 구약성경만을 믿는 정통 유대인들과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성경의 하나님,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구약성경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믿음은 거의 비슷하다고 표현해도 별 무리가 없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유대인들의 믿음과 우리 기독교인들의 믿음을 본질적으로 갈라놓게 되는 그 중심에는 ‘나사렛 예수님’이 있음을 우리 모두는 동의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도행전>이 이제 시작한지 몇 장이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증인이 되리라” (1:8)고 약속하셨으며, <2장>에서 주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2:33)고 증언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베드로는 자신이 전하는 모든 메시지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2:36)

이 모든 말씀을 통해 우리 인간들이 내려야 할 분명한 결정의 순간이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당시 베드로의 메시지를 들은 삼천명과 같이 마음에 찔림바 되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v.37) 라고 외침으로 생명의 주님 앞에서 정직히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분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하든지, 아니면 유대종교 지도자나 많은 유대인들처럼 예수님을 끝까지 거부하든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핏보면 비슷한 듯 보이면서도 유대교와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다른 신앙임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핵심인 것입니다. 정통유대교 신자들은 지금도 나사렛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구약의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신 우리 모든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 곧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주님의 모든 사도들과 성도들이 한결같이 예수님 이외에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4:12)고 증언했지만,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오늘 베드로를 통하여 행한 이적은 초자연적 능력,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왜 그리고 누구에 의해 일어나게 되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단 마귀도 때에 따라 엄청난 이적을 행할 수 있음을 성경은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상 그 자체에 현혹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앉은뱅이에서 나음을 입은 자가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있음을 보고, 사람들이 크게 놀라며 솔로몬의 행각 (정자)에 모여들었을 때, 베드로가 백성들을 향해 반문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3:12)고 말입니다. 이 놀라운 일이 어떻게 일어난 줄 아직도 깨닫지 못하겠느냐 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베드로의 설명이 <사도행전>에서의 그의 두번째 설교에 해당하는 <행. 3:12-2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 골자는 모든 유대인들이 그들의 조상으로 믿고 자랑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이 권능의 역사를 행하셨는데, 그 일을 직접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심으로’ (3:13), 즉 ‘그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통해 이 사람이 낫게 되었다’ (3:16a)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3:16b)고 베드로는 병고침의 권능은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곧 그분을 믿는 믿음을 통해 그분의 영 성령의 영광스런 권능으로 이루어진 역사임을 분명히 증거하는 것입니다.

셋째, “내 안에 있는 <앉은뱅이>는 무엇인가”를 깨닫게 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이 자리에 참석하여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 모두 건강한 두발과 두손으로 자유롭게 이 자리에 나올수 있었지만, 어쩌면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론 자유롭지 못하지 않느냐고 질문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아마도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행하지 못하고, 영적으로는 많은 얽매인 것들에 사로잡혀 고통과 아픔 가운데 앉은뱅이와 같은 부자유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이 여러분들이 어릴 적 성장과정에서 형성된 상처와 열등감이거나, 사람과의 관계성의 문제 혹은 이런 저런 우리가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살아온 환경의 부정적인 영향력으로 인해 아직까지도 실제로 여러분을 ‘앉은뱅이’로 얽어 매고 있는 그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제가 묻고 있는 것은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진정 자유케 되기 원하는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를 믿고 따르는 그의 제자에게 참된 자유를 주시겠다고 약속히 않으셨습니까?! “너희가 내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1,32)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한가지 분별해야 하는 것은 ‘우리를 앉은뱅이로 주저앉게 하는 것’은 지금 말씀드린 것과 같은 ‘어릴 시절의 마음의 상처나 환경에서 오는 열등감이나 편집증 혹은 중독현상’과 같이 내가 어느 정도 자각하고 벗어나기를 원하지만 아직까지도 극복하지 못하는 정신적 영적 아픔이 있지만, 또 다른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나 스스로 결정했고 확신과 자부심으로 붙들고 있는 것들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오랜 기간 형성된 ‘나 스스로 형성한 가치관’ ‘철학’ ‘세상과 심지어 성경을 평가하는 나의 기준’이 그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이미 예수 믿은 크리스챤이 되었다면, 좀처럼 노골적으로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잠재적으로 여러분의 무의식 속이나 생각 깊은 속에 잠복해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 여러분의 믿음 특별히 예수님을 믿는 순전한 믿음의 순간에 뛰어나와 여러분의 믿음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결정적인 순간, 이렇게 스스로를 높이고자 하는 자아와 자기중심의 가치관은 여러분의 발목을 잡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발에 힘을 주어 굳세게 일어나 뛰기도 하고 걷기도 하고, 기쁨과 감격으로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도록 여러분을 붙잡는 것입니다. 이런 여러분의 자아와 가치관은 무엇입니까? 아니면 성도 여러분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어린 암사슴처럼 가볍게 뛰지 못하고, 하나님을 기뻐하고 감격하지 못하게 여러분 안에서 강하게 붙드는 것이 무엇인지 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 할찌라도 결론은 같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3:19)라고 베드로는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컷 신앙생활 한다고 했지만, 여전히 목마르고 답답한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 말씀은 물론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 영생의 구원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저의 경험을 통해 말씀드리면, 이 말씀은 동시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영적으로 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음의 상처와 벗어버리지 못한 어두운 환경의 영향력으로 인해 기쁨과 감사와 은혜를 누리지 못하며 무미건조하고 생명력없는 무기력한 신앙생활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해당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없이 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의 은혜가, 그 속에서 생수의 강이 넘치는 감격의 삶이 주께서 약속하신 것과 같이 주 앞에서부터 우리 각자에게 넘치도록 부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는 우연히 정해진 기도를 드리려 성전에 올라가다가 나면서 앉은뱅이로 소망 없이 살아가던 걸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치유하는 권능을 행했습니다.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의 권능입니다. 오늘날 동일한 기적의 치유가 일어날 것인지는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제가 한가지 확신하는 것은 영광과 권능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선하신 뜻을 따라 우리 각자를 얽매는 모든 상처와 아픔 그리고 잘못된 모든 습관의 굴레에서 치유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을 통해 자유케 되고, 성령의 은혜로 그 속에서 생수가 끝없이 솟아나는 날을 주시기 원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나의 모든 허물과 죄를 주께 회개함으로 여러분을 ‘마음과 영적 앉은뱅이’로 얽어 매었던 모든 죄와 어두움의 굴레를 벗어 버리고, 날마다 유쾌하게 되는 날을 풍성히 누리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