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mber 5, 2023

“우리의 사귐” (Our Fellowship)

Preacher:
Passage: 요한일서 (1 John) 1:3~4
Service Type:

“우리의 사귐”

(Our Fellowship)

11-5-23

본문말씀: 요한일서 1:3~4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설교 요약>

저는 오늘 ‘사랑의 사도’라 불리는 사도 요한이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던 여러 성도들에게 보낸 첫번째 편지 내용의 일부인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성도의 사귐’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먼저 <요한일서>말씀의 주요한 두가지 주제는

  • 첫째) 초대교회 당시 성도들을 미혹케 했던 <거짓 가르침> 곧 ‘영지주의’를 경계하라는 것
  • 두번째) <성도의 교제> (the fellowship of saints)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두번째 주제인 성도의 ‘교제’ 바로 ‘성도의 사귐’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를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볼 때, ‘교제’ (fellowship)라는 헬라어 원어는 <코이노니아>로써 ‘동료의식, 교제, 사귐, 공동체, 공유, 상호교류, 우정’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이 ‘교제/사귐’을 가진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알수 있고 (창.2:18), 이것은 영원히 사랑 안에서 교통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서 기인됨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참되게 사귀어 나갈수 있을까요?’ 그것은

첫째, “구원에서 출발함”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성도의 사귐이 어디에서 출발하는지를 이렇게 밝힙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v. 3)고! 먼저 우리 각자가 구원받아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과의 사귐이 있어야만 합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의 관계로 맺어져 있다면, 우리는 반듯이 “서로 사랑하라” (요. 13:34)는 그리스도의 최고의 명령을 기쁨으로 지키고자 힘쓸 것입니다 (요일. 2:7,8).

셋째, “행함과 진실함”으로 가능합니다: 요한은 도전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일. 3:18) 우리 성도의 진정한 사귐을 결정하는 것은 말과 혀로가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에 있음을 사도는 도전하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 안에서 말과 혀로가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서로를 사랑으로 섬겨 나가는 주의 몸된 공동체 되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그동안 마음은 간절했지만, 각자 공부와 일들의 바쁜 일정으로 인하여 기회가 잘 나지 않았었는데, 이렇게 자연에 나와 맑은 공기를 마시며 형제 자매의 귀한 교제를 나누게 되어 얼마나 기쁘고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이 수련회를 위해 멀리 포틀랜드, 뉴욕에서 날아온 자매들을 생각하면, 이런 1박2일이라는 일정도 매우 짧고 아쉽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어저께 함께 경험하고 누렸듯이 서로 주의 사랑 안에서 연결될 수만 있다면, 서로의 기쁨과 슬픔을, 자랑과 아픔, 상처와 약점까지 함께 나누고 품어 줄 수 있다면, 우리는 가까이 있으나 멀리 있으나 주 안에서 한 지체임을 믿습니다. 이제 오늘 주일 예배를 마지막으로 1박2일의 수련회는 공식적으로 끝이 나겠지만, 그러나 우리의 사귐은 영원할 것을 믿습니다.

저는 오늘 ‘사랑의 사도’라 불리는 사도 요한이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던 여러 성도들에게 보낸 첫번째 편지의 내용인 오늘 본문내용에 대해 성도 여러분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12제자중 유일하게 순교 당하지 않았던 사도 요한은 그렇다고 육신적으로 결코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사도 요한은 말년에 90세가 넘는 나이에 밧모섬에 유배됨으로 주님의 제자로서 고난의 삶을 끝까지 충성스럽게 감당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포함된 <요한일서>말씀의 주요한 두가지 주제는 첫째, 초대교회 당시 성도들을 미혹케 했던 ‘영지주의’라는 거짓 가르침을 저자 사도 요한은 강력하게 경고하고, 두번째는 ‘성도의 교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중에서 두번째의 ‘성도의 교제’ (the fellowship of saints), 곧 ‘사귐’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연결된 몸으로써 서로를 어떻게 품어주고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저에게 ‘어떤 교회가 주님께 진정한 몸으로 성장하는 몸’이라고 불릴 수 있는지?’에 대한 판단근거를 들라면 저는 “성도의 교제”를 그것으로 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교회 공동체가 얼마나 건강한 교회인지? 그리고 얼마나 신앙 안에서 성숙된 교회인지?’를 가름하는 척도가 ‘성도의 교제’가 얼마만큼 더 깊어지고 있는가로 확인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공동체의 영적 건강과 성숙도를 ‘교제’ 한가지만으로 어떻게 다 파악할 수 있겠느냐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이후에 설명하겠지만, 결론적으로 ‘성도의 진정한 사귐’은 그들이 올바른 말씀의 젖을 먹고, 건강하게 자라나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살아 있는 제사를 각자의 삶과 공동체의 모습 가운데 잘 드리고 있는지를 아울러 파악할 수 있는 핵심적 요소가 바로 ‘성도의 사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교제’는 헬라어 원어 “코이노니아”에서 왔는데, 이것은 ‘동업자, 제휴자, 동료, 친구, 배우자, 분배자’라는 뜻을 가진 “코이노노스”라는 단어에서 유래했으며, ‘동료의식, 교제, 사귐, 공동체, 공유, 참여, 상호교류, 우정’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첫사람 아담을 만드시고 나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창. 2:18)고 말씀하심을 보게 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하여 그를 돕는 비서, 조수와 같은 보조적인 어떤 존재 하나를 만드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인간존재 자체가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분명하게 밝히신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돕고 의지함으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삼위일체의 하나님 자신도 ‘성부, 성자, 성령’께서 영원전부터 영원까지 언제나 서로 깊은 교통하심과 사랑으로 존재하심을 볼 때, 그 창조자 하나님에서 파생된 그분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은 우리 인간의 본질이 이와 같이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 교제하고 사귐’을 통해 살도록 첫 인간부부를 만드셨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원인과 결과라고 저는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제가 성도 여러분과 함께 좀더 깊이 살펴보기 원하는 것은 ‘어떻게 우리 성도들은 참되게 사귀어 나갈수 있을 것인가?’를 이해하기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 “성도의 사귐은 구원에서 출발함”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의 모든 진정한 사귐의 출발은 결코 인간적인 코드가 맞고, 성격이나 기질, 취미가 서로 맞아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함께 하는 사귐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v. 3)고 사도요한은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말씀의 의미는 성도의 사귐은 궁극적으로 ‘구원받음’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더 깊은 사귐을 나누기 원한다면, 가장 먼저 우리 각자 돌아보아야 할 것은 내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귀고 있는가?’를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고 사도 요한은 도전하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아직까지 하나님을 믿는 그 참된 믿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영접함이 없다면, 따라서 진정한 성도간의 사귐, 곧 참된 코이오니아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v. 3)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사랑의 명령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4-5)고. 또한 우리 주 예수님은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 14:21)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종합해 볼 때, 우리 크리스챤의 사귐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 오늘부터 사랑하자!’고 선언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먼저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요,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일까요? 저는 이 사랑은 감히 주께서 잡히시기 전날밤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 안에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이어지는 성도의 사귐, 두번째가 됩니다. 그것은

둘째, “성도의 사귐은 그리스도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앞서 제가 언급했듯이 주님은 잡히시기 전날밤에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은 이것입니다. 곧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4)고 명하셨습니다. 성도의 사귐은 ‘구원’에서 출발하고, 이 구원은 우리를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반드시 기초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부와 성자 하나님과의 사랑이 얼마나 깊어지고 진실한가를 우리가 스스로 판별해 보고 싶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된 우리 성도들에게 주신 “새 계명”을 나는 그리고 우리는 어느 정도로 지키고 있는지를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는 주님의 명령(계명)을 얼마만큼 순종함으로 지키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이런 주님께서 명령하신 사랑의 계명을 염두에 두고 첫번째 편지 2장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요일. 2:7,8)라고. 여기서 사도는 ‘옛 계명’ 혹은 ‘새 계명’이라는 단어를 통해 이것이 우리 주님의 사랑의 계명임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이 사랑의 계명을 왜 한번은 ‘옛 계명’ 또 한번은 ‘새 계명’으로 표현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성경에는 이미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약을 통해 수없이 ‘사랑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이 ‘옛 계명’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키지 못했던 사랑의 계명을 이제 예수님의 보혈로 죄 씻음 받고 그의 영,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우리 또한 새롭게 행할 수 있는 사랑이기에 ‘새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진정으로 서로 연결되고 아름다운 사귐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은 서로가 뭔가 기질적으로 잘 통한다거나 생각이나 취미가 비슷하고 인간적인 공통점을 찾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참된 사귐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서로 사랑하라”는 복된 명령을 성령의 능력을 따라 순종함으로 사랑하기를 힘쓴 결과인 것입니다. 이제 끝으로,

셋째, “성도의 사귐은 행함과 진실함”으로 가능합니다: 아마 성도 여러분도 느끼시겠지만, 사도 요한의 글은 말씀이 어렵거나 교리적으로 이해하기 난해한 문장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보는 요한의 첫번째 편지가 실천하기 쉬운 내용일까요? 네, 물론 어떤 성도들에게 이 내용은 매우 쉽고 즐거울 수 있습니다. 바로 주님을 사랑함으로 그분의 명령을 지켜 행하기를 원하고, 진실함으로 주님을 좇아가는 자들에게는 말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주님을 향한 내 마음의 중심이 올바로 서 있지 않을 때, 이 사랑의 명령만큼 힘들고 어려운 명령은 세상에 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우리들을 향해 이렇게 도전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요일. 2:3~5)고 말입니다.

‘말로 만이 아니라, 행함으로 우리의 신실함을 보여야 한다’고 요한은 도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말이 아닐까요?! 자기 스스로는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도 어둠에 있는 자’요, 반대로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 (요일. 2:9-10)고 그는 선언합니다. 그럼으로 사랑의 사도는 ‘어떻게 우리 공동체가 진정한 사귐을 이루어 갈 수 있을 것인지를 이와 같이 결론적으로 선언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요일. 3:18-1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아포슬 공동체는 진정으로 행함과 진실함으로 서로를 용납하고 품어줌으로써 주의 사랑 안에서 복된 성도의 교제를 이루어 가고 있습니까?

사랑이라는 말만큼 우리를 설레게 하고 꿈꾸게 하는 것도 없지만, 사랑만큼 고통스럽고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이성 간의 사랑을 너머선 사랑입니다. 부모의 피로 맺어진 혈육의 가족간의 사랑일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함께 맺어진 영적 가족 곧 신앙 공동체간의 사랑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하나로 부르시고, 서로를 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 이 주님의 사랑의 명령은 우리가 신뢰하고 순종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복된 명령임을 저는 믿습니다. 사도요한은 흩어져 있는 성도들을 향해 어떻게 서로가 진정한 사귐을 행할 수 있을 것인지를 밝혀 나가는 가운데 이와 같이 결론적으로 선언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바라기는 말과 혀로서가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우리 아포슬 되길 소망합니다. 가까이 있으나 멀리 있으나 주의 귀하신 성령의 부어 주시는 은혜로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는 아포슬 공동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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