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17, 2020

“구원의 기쁨” (The Joy of the Salvation)

Preacher:
Series:
Passage: 로마서 (Romans) 5:1~2
Service Type:

“구원의 기쁨”

(The Joy of the Salvation)

5-17-20

본문말씀: 로마서 5:1~2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Therefore, since we have been justified through faith, we have peace with God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 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through whom we have gained access by faith into this grace in which we now stand. And we rejoice in the hope of the glory of God.)

 

[설교 요약]

            만약 누군가가 오늘날 크리스챤들과 초대교회 성도들과 실제적인 삶에서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기쁨의 삶’이라고 말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v.1) 라고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러므로” 라는 뜻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사함 받아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게 되었다면, 그러므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된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도는 “무엇이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가 누리게 될 영적 변화인가요?” (What is the spiritual steps for those who are saved by faith?) 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과 평화를 누린다” (We have peace with God)는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 열매를 따먹고 범죄했을 때 그의 첫 반응은 하나님의 낯을 피했던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갈라놓고, 그분을 피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로 하나님과 화목된 자는 그 무엇보다도 그분과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v.1).

둘째,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 (We also rejoice in our sufferings)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를 누리게 될 때,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게 됩니다. 왜냐면, 그 환난이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을 우리 마음 가운데 부어 주시는 성령을 통해 깨닫기 때문입니다 (v.3~5).

셋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기뻐한다” (We also joy in God through Jesus Christ)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요. 15:4)고 말씀하고 나서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나의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요. 15:11)라고 그 이유를 밝히셨습니다. 주님의 기쁨만이 세상이 줄 수도 빼앗을 수도 없는 참된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된 그분의 자녀들로서, 성도 여러분이 실제적으로 그분과 평화의 관계속에서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하며, 그리스도의 기쁨을 날마다 누리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만약 누군가가 오늘날 크리스챤들과 초대교회 성도들과 실제적인 삶에서 큰 차이점이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기쁨의 삶’이라고 말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뿐 아니라 여러 서신서에 나오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에서 발견하게 되는 ‘기쁨의 삶’ ‘즐거움과 감사의 삶’이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모습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쉽게 찾을 수 없고 희귀하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 2장>에서 ‘성도들이 서로 교제하여 함께 떡을 떼며, 함께 기도하면서,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v.42~46) 삶을 나눈다는 증언을 들으면서, 오늘날의 우리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강하게 느낍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는 이런 묘사를 들으면서 마치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느끼는 분은 없습니까? 제가 오늘 성도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기 원하는 것은 우리 크리스챤의 <실제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하나의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가르침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너와 나’의 삶은 어떤 상태인가를 각자 점검하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고민하기 원하는 것은 우리 크리스챤이 어떤 상황과 조건 가운데서도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길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그 은혜 가운데 기쁨과 감사의 삶을 날마다 누리는 축복된 성도 여러분의 삶 되시길 소망합니다.

성도 여러분은 <불행한 크리스챤!?> 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제가 이해하기로는 이론적 (=원칙적)인 의미에서 ‘불행한 크리스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크리스챤이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자요, 그리스도의 영, 성령의 능력을 통해 죄와 사망에서 해방된 축복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의 삶은 안따깝게도 그렇치 않은 경우가 너무도 많은 것입니다. 제가 앞서 언급 했드시 초대교회 성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과 오늘날 크리스챤의 차이가 실제로 ‘기쁨의 삶’을 누리는 가? 에 달려 있다면, 이 차이는 결코 간단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차이가 불행한 크리스찬이라 불리어 질 수 있는 핵심임을 저는 믿습니다.

오늘 말씀도 사도 바울의 중요한 <접속사> ‘그러므로’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 즉” (v.1a). 그렇다면 무엇이 “그러므로” 라는 뜻일까요? 그것은 앞의 <롬. 4장>의 결론을 받고 있습니다. <롬. 4장>의 요지는 “하나님의 약속과 아브라함의 믿음” 입니다. <롬. 4:3>에서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v. 3) 고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정확히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롬. 4장> 뒷편에 가서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롬. 4:17)고.

그런데 하나님의 이런 놀라운 약속이 감사하긴 한데, 사실 이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상황인 것을 논리적인 저자, 사도 바울이 놓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 (롬. 4:18)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나이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아니 (할 뿐)” (v.19)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 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하나님께서) 능히 이루실 것을 그가 확신(했다)” (v.20,21)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이 의로 여기셨다’ (v.22)는 것입니다. 사도는 여기까지 아브라함의 믿음을 설명하고 나서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셨다고 성경에 기록하셨는지?’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면서 <롬. 4장>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롬. 4:24) 라고 말입니다.

성경에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 것을 자세히 기록한 것은 아브라함 한사람만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크리스챤 즉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자들에게 또한 의롭다 하심을 주시고자 함이라는 것입니다. ‘이 예수는 우리의 범죄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 줌이 되고, 우리의 의롭다 하심을 위해 3일만에 다시 무덤에서 살아나신 것’ (v.25) 입니다. 이것이 <롬. 4장>의 결론인데, 이 결론을 내리고 나서 사도는 <롬. 5장>을 시작하면서 ‘그러므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성경에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기록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우리 크리스챤도 위함이다. 그럼으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v.1) 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먼저 제 성경 버젼은 “~ 화평을 누리자” 라고 되어 있지만, NIV 영어번역에서 보듯이 “~ 평화를 누립니다” (~ have peace with) 라고 번역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어 의롭다 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 화목함을 누리게 되었다면, 하나님 아버지와 평화의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므로, 하나님 아버지와 평화의 관계를 누리게 된다” (v.1) 라고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을, 아니 우리 모든 성도들을 격려합니다.

여기에서 사도는 “무엇이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가 누리게 될 영적 변화인가요?” (What is the spiritual steps for those who are saved by faith?) 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첫째> “하나님과 평화를 누린다” (We have peace with God)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십니까? 이것은 간단한 질문처럼 보일 수 있지만, 우리 삶 속에 발생하는 수만가지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중심에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가?’가 있음을 저는 확신합니다. 이 시간 저는 우리가 만족하지 못하는 것들을 모두 다 열거하기엔 시간이 부족합니다. 늘 부족한 재정상태가 불만스러운 것이고, 사람과의 관계가 스트레스를 쌓이게 하고, 진로와 직업과 알 수 없는 미래가 우리를 불안과 염려로 몰아 갈 때가 한두번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내 소원을 성취시키는 ‘알라딘의 요술 램프’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믿음만이 우리 크리스챤의 삶을 그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불안해 하거나 염려하지 않고 기쁨 가운데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6~7)는 사도의 권고는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크리스챤의 특권은 ‘평화를 누리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평화의 삶>은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를 가질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분의 평화>라고 사도는 설명합니다.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3:1) 로 시작하는 그 아름다운 <시. 23편>에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5) 는 그 심령 깊은 곳에서 부터 넘쳐나는 만족과 기쁨의 고백은 바로 하나님과의 평화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선한 목자와 그의 사랑스런 양과의 그 평화스럽고 복된 관계에서 그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멜찌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안전함과 만족을 누린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사도는 하나님과의 평화의 관계가 가져오는 강력한 영향력을 계속해서 설명합니다.

<둘째>,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 (We also rejoice in our sufferings)는 것입니다. 저는 그동안 몇 주에 걸쳐서 ‘고난과 우리 크리스챤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기억 하시겠지만, 이 ‘고난’을 신약의 여러 저자들은 ‘징계’ (chastisement/ discipline) 라고 불렀는데, 이 징계는 한마디로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히. 12:8)는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 징계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손길을 그의 자녀는 더욱 강하게 느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롬. 5:3~5) 라고 바울은 선언합니다. 그 불같은 환난과 핍박이 성도들을 좌절시키고 절망과 실패로 몰고 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환난을 통해 소망을 품게 되고, 환난 가운데 도리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불사조 같은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도데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이것이 궁금할 때 마다 우리는 곧바로 <1절>로 되돌아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은 즉 ~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자” (v.1) 하나님 아버지와 평화를 누리는 자는 환난 중에도 도리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신실하신 은혜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요, 하나님은 그 어떤 환난 가운데서도 그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구원받은 성도가 누리는 영적 변화의 은혜는,

<셋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기뻐한다” (We also joy in God through Jesus Christ)는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롬. 5:11) 고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28~29)라고. 세상에는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음으로 그들의 인생의 무거운 짐 아래에서 허덕이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못지않게 안따까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고 하며, 그럼으로 죄 씻음 받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인생의 무거운 짐을 버리지 못하고 부둥켜 안고 살아가는 자들인 것입니다. 사실 이런 묘사는 상당히 모순적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어 영접했다면, 우리 모두는 각자의 무거운 짐을 다 그분의 발 아래 내려 놓고 참된 자유를 누려야 마땅한데, 실제 우리의 삶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문제제기를 했드시 나의 성경지식이 아니라 실제적인 나의 <영적 상태>는 어떠한가?를 우리 각자는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진정으로 ‘기쁨의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그를 믿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요. 15:4~5)라고.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왜 자신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셨는지?’에 대해서 이렇게 그 이유를 결론적으로 밝히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나의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요. 15:11)라고. 주님께서 그를 믿는 제자들에게 ‘내 안에 거하라’고 명하신 이유는 주님의 기쁨, 세상이 줄 수도 빼앗을 수도 없는 참된 기쁨을 넘치게 주시고자 함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십니까? 넘치는 기쁨의 은혜를 누리십니까? 아니면, 여전히 여러분이 스스로 정해 놓은 인간적인 기쁨의 조건이 만족되지 않음으로 인하여 영적 목마름 가운데 고통받고 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신 은혜는 단 한명도 예외 없이, 또한 자신과 평화를 누릴 은혜의 문을 열어 놓고 계심을 저는 확신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통해 우리와 화목하심으로 그의 자녀 삼아 주심으로 자신과 평화를 누릴 은혜의 강물로 우리를 이끄셨습니다. 풍성한 성령의 강물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강제로 그 물을 마시게 우리를 억압하지 않으십니다. 그 물을 마시는 것은 우리의 자발적인 몫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께 순종함으로 그 은혜의 강물을 마음껏 마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 원합니다. 그리하여 그 속에서 끝없이 솟아나는 기쁨의 생수를 넘치도록 누리는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