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10, 2020

“장차 나타날 영광” (The glory that will be revealed)

Preacher:
Series:
Passage: 로마서 (Romans) 8:17~18
Service Type:

“장차 나타날 영광”

(The glory that will be revealed)

5-10-20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8:17~18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Now if we are children, then we are heirs – heirs of God and co-heirs with Christ, if indeed we share in His sufferings in order that we may also share in His glory.)

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I consider that our present sufferings are not worth comparing with the glory that will be revealed in us.)

 

[설교 요약]

오늘은 고난 시리즈 마지막 설교로서 ‘회복과 성숙’이 주제입니다. 그런데 왜 수많은 크리스챤들이 고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절망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 크리스챤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깨닫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고난의 문제는 먼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 신분이 얼마나 놀랍고 축복된 것인지를 확인해 나감으로써, 비로소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도 그리스도와 누릴 영광을 위한 소중한 훈련과정인 것을 깨닫아 갈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자녀이면 ~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v.17)는 의미일 것입니다.

오늘 말씀 뿐 아니라, 사도 바울의 서신서 전체를 통해서 이해하게 되는 2가지 중요한 주제를 파악할 수 있는데, 그것은

  • <크리스챤 신분의 정체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In Christ) 발견된다
  • <크리스챤의 고난을 대하는 태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with Christ) 하는 것이다

라고 요약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v.17) 하기 때문입니다. <C.S. 루이스>는 그의 책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rianity)에서 <2가지 생명>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 ‘바이오스’ (Bios)로서 얼마 못 가서 소모되어 사라질 <생물학적 생명>이고

둘째, ‘조에’ (Zoe)인데 자연 세계 전체를 만들어 낸 생명, 즉 모든 존재하는 창조물을 만들어내는 <영원한 생명> 입니다.

우리 크리스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는다는 뜻은, 바로 세상만물을 창조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생명, 즉 ‘조에’를 우리가 받게 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 (갈. 2:20) 고 고백한 뜻입니다. 내 안에 영원한 생명 되신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든 충만과 하늘의 유업을 함께 누리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v.18) 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복된 신분을 확인해 나가고, 그로 말미암아 고난의 훈련까지도 넉넉히 감당해 나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고난과 크리스챤의 관계>에 대해서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크리스챤들이 고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절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현재 당하는 고통과 아픔이 너무 심하기 때문도 아니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지 않거나 무관심해서는 더더욱 아닐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 크리스챤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존재인식’을 아직까지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된 신분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깨닫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안과 불만과 절망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세상 사람들이 당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크리스챤의 신분이 얼마나 놀랍고 축복된 것인지를 확인해 나가고, 그럼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도 그리스도와 누릴 영광을 위한 소중한 훈련과정인 것을 깨닫아 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사도 바울이 강조하여 밝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with Christ) 입니다. 다시말해, 사도는 우리 크리스챤이 왜 이토록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누리고, 영광스러운 미래를 소망할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 크리스챤이 당하는 그 어떤 고난과 고통도 결코 ‘bad news’가 아니요 도리어 강한 군사로 만들어 내는 복된 훈련장이 되는 것인지!? 는 한가지 이유로 요약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기 때문이요, 곧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신학에서 가장 중심되는 두가지 단어가 있다면,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In Christ)와 ‘그러므로’ (therefore) 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라는 단어가 바울신학에 있어서 그의 깊고도 탁월한 영적 논리를 이어 나가는 가장 훌륭한 도구인 <접속사>라면,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단어는 바울의 전체 신학을 꿰뚫는 <주어> 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예수를 믿는 크리스챤이라고 하면서도 어려움과 고난이 닥쳐오면 불안해하고 불만하고 흔들리는 근본적인 이유는 ‘내가 크리스챤이 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에 대한 존재인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임을 주의하여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 크리스챤의 존재인식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크리스챤이라는 존재이유가 있음을 이해해 나가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확신함은 모든 크리스챤의 영적 출생의 중요한 시작이지만, 언제나 그 상태로 머물게 될때 영적으로 자라지 못하게 되고, 우리가 중점적으로 확인해 나가는 ‘고난’에 대한 올바른 영적 이해를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첫번째 편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 (the last Adam) (고전. 15:45) 이라고 부르는 것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왜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일까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을 ‘완전한 사람’으로 창조하신 이후에 모든 인간은 아담의 죄를 유전 받음으로 한사람도 예외없이 불완전한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님은 아담의 원죄를 물려받지 않고 성령의 권능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나심으로 ‘완전한 둘째 사람’이자 ‘마지막 아담’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아담’이란 의미는 예수님 이후에 누군가가 태어나서 또 다시 우리 인간을 대표할 아담과 같은 존재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표하실 마지막 인간이시요 완전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크리스챤’과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요? 성경에서 선포하는 우리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가장 간결하고도 핵심적으로 정의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아 계신다”라고 저는 정의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두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힘차게 선언했습니다. “그런 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라고 말입니다. 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 (a new creation)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통해 우리의 죽었던 영이 산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위해서 다시 어머니의 뱃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음을 예수님은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3,5) ‘거듭난다’는 것은 새로운 영적 생명을 얻는다는 뜻이요, 새로운 창조물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위해 필요한 것은 그 자체가 불가능하지만 육체적으로 어머니의 태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임을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영적 상징이나 비유가 아니라 영적 진리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게 되었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속하였다’는 뜻이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아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이 말은 시적이고 아름다운 표현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 상태가 글짜 그대로 새롭게 창조되는 생명의 역사가 내 속에서 벌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때 우리 속에서 일어난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새로운 창조물, 새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구원받은 성도의 영적 상태를 사도 바울은 이렇게 실감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목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 (갈. 2:20) 우리 거듭난 성도의 삶은 내 속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의 생명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더 이상 아담으로 물려받은 죄의 DNA를 소유함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서 다시 태어나게 되었고 그분의 생명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들어왔던 우리 크리스챤의 존재에 대한 설명 중에서 <C.S.루이스> 만큼 우리 인간이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죽었던 우리가 그분의 생명으로 살게 되었음을 더 잘 설명한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루이스는 그의 대표적인 책,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 (아직 못 읽은 사람, 강추!!) 에서 우리 인간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어떻게 ‘산 생명’이 되는 것인지를 탁월한 영적 비유와 설명을 통해 이해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결론부분에 가서, [2가지의 생명]이라는 개념을 언급합니다. 그 첫째는 ‘바이오스’ (Bios)라고 불리는 얼마 가지 못해서 소모되어 사라질 <생물학적 생명>입니다. 예를 든다면, 공기나 물이나 음식 등을 통해 끊임없이 자연의 보조를 받아야만 유지되는 생명이 ‘바이오스’인 것입니다. 둘째는 ‘조에’ (Zoe) 입니다. 이 ‘조에’는 자연 세계 전체를 만들어 낸 생명입니다. 모든 존재하는 창조물을 만들어내는 영적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이 ‘조에’인 것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인 ‘조에’가 영원 전부터 하나님 아버지 안에 속해 있었던 것이고, 이 ‘조에’는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이 땅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보내신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안에 언제나 있었고 언제나 있을 생명, 즉 ‘조에’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을 얻고 구원받았다는 뜻이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아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루이스는 ‘영원한 생명’ ‘조에’를 설명하고 나서, <고집 센 장난감 병정들>이라는 소 'chapter' 에서 한가지 재미있는 설정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예수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은 ‘양철로 만든 장난감 병정을 진짜 작은 사람으로 바꾼다는 상상’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장난감의 양철을 사람의 살로 바꾸어야 하는데, 양철 병정이 그것을 싫어 한다면 그 장난감은 여러분들이 자기를 죽인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여러분을 저지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한 그는 사람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장난감 병정이 인간이 될 수 있는 길은 생명을 받는 것 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이 언젠가 늙고 병들어 죽게 될 우리가 놀랍게도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될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조에’ 즉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될 때 가능한 것 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게 되었다는 뜻이요, 그분의 생명으로 아들과 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회복과 성숙’이라는 주제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고난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보면서,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고난은 더 이상 하나님의 벌도 아니요 무관심도 아니라 그 자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임을 그동안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고난에 대한 최종적인 우리 성도의 결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달려 있음을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8절>에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v.18) 라고 사도는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마치 사도가 정확한 저울 (balance)을 하나 가지고 와서, 저울 한쪽 끝에는 <현재, 우리 성도가 당하는 고난>을 달고, 다른 한쪽 끝에는 <장차, 미래에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달아서 저울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결과는 말할 것도 없이 장차 우리 성도들에게 나타날 영광은 현재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크고 영광스럽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바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 지를 알아 나가면 나갈수록 우리는 현재의 불같은 고난조차도 우리를 좌절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그 고난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고난에 동참함을 기뻐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우리 성도들이 받게 될 고난에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벧전. 1:6~7) 라고. 고난의 풀무불이 우리의 믿음을 정금보다도 더 귀하게 다듬고 칭찬과 영광을 얻게 한다고 베드로는 밝히는 것입니다.

또한 시편 기자는 자신이 당한 고난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지키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고난당 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 고난 당 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119:67,71) 라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v.17) 고 우리가 고난을 감수하는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당 하는 것은 창피하고 억울한 것이 아니라,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 고난이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것임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자 하는 이유를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 3:10~11)라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의 영광스러운 부활에 이르고자 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분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것이 주께서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도전하신 십자가의 삶이라고 믿습니다. 이 십자가의 삶은 ‘날마다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목 박는 삶’ (갈. 5:24)이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 (눅. 9:23~24)임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 고난 가운데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스러운 삶으로 빗어가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훈련의 손길을 느끼십니까? 더 이상 고난이 불평과 절망이 아니라 우리를 연단하고 성숙케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임을 깨닫으십니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고후. 12:9)고 말씀하시는 고난 가운데 임하는 주님의 은혜를 이해하십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은혜로 허락하신 고난이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음을 깨닫고, 날마다 기쁨과 확신 가운데 이 훈련의 시기를 통과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