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 2, 2023

“그는 흠모할 것이 없도다” (He Had No Beauty To Attract Us)

Preacher:
Series:
Passage: 이사야 (Isaiah) 53:1-2
Service Type:

“그는 흠모할 것이 없도다”

(He Had No Beauty To Attract Us)

4-2-23

본문말씀: 이사야 (Isaiah) 53:1-2

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설교 요약]

            이제 한주 후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부활절입니다. 이번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큰 그림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택한 자녀에게 베푸신 구원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이사야 53장>말씀은 구약에 나오는 여러 선지자들의 오실 메시야 (구세주)에 대한 대표적인 예언의 말씀 가운데 하나인데, 그 주제는 ‘고난의 종’입니다. 그렇다면, 왜 메시야는 고난을 당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우리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사. 53:5)라고.

우리 인간이 어떻게 죄를 범하게 되었는지가 <창. 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인간부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뱀의 거짓말을 믿음으로 금지한 ‘선악과 열매’를 따먹음으로 범죄하여 죽게 된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태어나게 될 모든 후손에게 죄와 죽음이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범죄한 직후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 (the woman’s seed)으로 오셔서 ‘뱀’ (=사단 마귀)의 머리를 부수고 그를 믿는 모든 자를 구원하실 메시야를 약속하셨습니다 (창. 3:15). 그 이후 이어지는 수천년의 역사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까지의 유대인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왜 유대인들은 이 땅에 오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것일까요?” 그것은 유대민족들이

  • ‘하나님 아버지를 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세속적인 메시야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 ‘메시야의 십자가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께서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독생자임을 믿는 모든 자는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특권을 주시는 것입니다 (요. 1:12). 이제 저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허락하신 구원의 놀랍고 영광스러움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창세전에 구원을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도 전에, 아니 천지가 창조되기도 전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자녀를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은혜에 있는 것임

둘째, ‘완전한 아담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자녀의 신분’이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챤들 가운데는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옛날 ‘죄 짓지 않은 아담’의 상태로 회복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완전한 인간, 아담’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성도가 누릴 영광인 것입니다 (롬. 8:18)

[설교 전문]

            이제 한주 후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부활절입니다. 저는 이번 주와 다음 주일 두번에 걸쳐 부활절 메시지를 성도 여러분과 함께 나누길 원합니다. 이번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큰 그림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택한 자녀에게 예비하신 구원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지를 묵상해 보겠습니다.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한 구원의 계획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주 부활절 주일에는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우리 각자에게 적용하는 시간 갖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사야 53장>말씀은 구약에 나오는 여러 선지자들의 오실 메시야 (구세주)에 대한 대표적인 예언의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사야는 총 66장이라는 방대한 하나님께 받은 말씀 가운데서도 여러 곳에서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 그 중에서도 <53장>의 말씀은 가장 클라이막스에 해당합니다. 이와 같은 <53장>의 주제는 ‘고난의 종’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데, 이 장의 말씀은 이사야서 뿐만 아니라, 구약의 여러 예언의 말씀 가운데서도 오실 메시야에 대한 매우 구체적인 묘사와 그가 이 땅에 오셔서 성취할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 밝혀주는 말씀으로 유명합니다.

제가 앞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이번주와 다음주 두번의 부활절 메시지에서의 핵심질문은 ‘왜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신 것인가?’ 그리고 ‘그분의 부활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저는 먼저 큰 그림에서 ‘왜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는 이 땅에 오셔야만 했는가?’를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그 이유를 ‘우리 인간의 죄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의 오늘 본문의 이어지는 말씀에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5)고 묘사하는 고난의 메시야는 바로 우리 인간의 죄를 담당하는 메시야임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 담당하고자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 인간은 죄를 범하게 된 것일까요? 크리스챤 대부분은 잘 이해하고 있듯이, 그리고 적지 않은 불신자들 가운데서도 그것을 믿지는 않는다 할찌라도 적어도 알고는 있는 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인간의 창조와 타락>의 스토리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1~3장>까지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성경의 첫 말씀인 <창세기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1:1)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하듯 있는 재료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 완전한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경험하는 것과 같은 ‘천지만물’을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 하나만 만드셨다고 해도 놀라운 일인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존재하는 모든 것, 곧 광활한 우주의 수없이 많은 별들과 은하계를 포함한 끝없는 천체들을 그분의 손으로 창조하셨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창조물 가운데 우리 인간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창조의 마지막날 첫 인간부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제 자신이 인간이기 때문 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매우 특별한 존재로 창조하셨음을 성경을 통해 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떠한 존재로 창조하셨는지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7)라고. 하나님은 그의 거룩되고 영광스러운 형상과 특성을 가장 빼 닮은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 이상 하나님 보시기에 특별하고 사랑받는 존재가 더 있을까요!? 한편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창조하실 뿐 아니라, ‘기쁨’이라는 뜻의 아름답고 풍성한 ‘에덴동산’을 창설하셔서 ‘첫 인간부부, 아담과 하와’가 영원토록 하나님과 더불어 살수 있게 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처럼, 그 이후 벌어진 불행한 인간의 역사를 성경은 우리를 위해 밝혀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만드셔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수많은 열매 맺는 나무를 두셔서 그들에게 허락 하시되, 오직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창. 2:17)고 경고하시고 금지하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첫 인간부부는 하나님의 오직 한가지 금지사항 마져도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뱀의 꼬임에 넘어가 선악과 열매를 따 먹은 것입니다. 뱀이 무엇이라고 하와를 유혹했습니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 3:5)고 유혹했던 것입니다. 그 뱀의 꼬임을 듣고 하와가 그 나무를 보았을 때 그 나무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로 보였던 것입니다 (창. 3:6). 그리하여 그녀는 먼저 열매를 따 먹고, 그의 남편에게 주어 그도 먹은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줄 아십니까? 이것은 ‘선악과 열매’가 매우 매력적이고 파워풀한 어떤 열매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한 신학자는 “만약 선악과 열매가 그렇게 매력적이고 신적 능력을 주는 것이었다면, 뱀이 유혹하기 전에 이미 그들은 그 열매를 주목했을 것이다라고 ‘선악과 열매’를 주석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뱀이 유혹하기 이전에 이 선악과 열매는 그들에겐 아무것도 아니었고, 전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들이 이 열매에 주목하게 된 것은 뱀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의심하면서부터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으로 이와 같은 ‘뱀의 이간질’은 <하나님이 인간의 행복과 가능성 그리고 인간의 능력과 번성을 방해하고 가로막는 존재일 수 있다는 그분에 대한 불신을 싹트게 만들었고, 급기야 첫 인간 부부는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과 열매를 따 먹음으로 경고하신 죄와 죽음을 가져오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과의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파괴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이 현재까지 우리 인간이 죄와 죽음의 고통 가운데 신음하게 되는 이유 (결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여러분 중에 ‘첫 인간 아담이 죄를 범한 것과, 그 죄로 인해 그가 죽게 된 것은 알겠는데, 왜 아담 때문에 우리까지 모두 죄와 죽음의 형벌을 받아야 하는 것인가요? 이건 너무 불공평한 것 아닌가요?’ 라고 항변하고 싶은 분은 없습니까? 제가 이해하기로 이런 불공평하다고 느껴지는 <영적 원인과 결과>의 논리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한가지 매우 중요한 ‘영적 법칙’ (=영적 원리)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첫 사람 ‘아담’은 ‘완벽한 인간’ (죄없는 인간)으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와 같이 죄를 유전받은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아담은 수많은 인간 중의 한명이 아니라, 그로부터 태어날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대표성을 가진 매우 중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대한 첫 사람 아담의 영적 지위요, 영향력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좋던 싫던) 관계없이, 이것이 성경에서 알려주는 첫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에게 미치게 된 죄와 죽음의 시작이요, 그 첫사람이 일류에게 미친 막대한 나쁜 영향력이라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첫 사람 아담은 그로부터 태어나는 모든 인류에게 죄와 죽음이라는 저주스러운 유산만을 물려주고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그 저주스런 ‘죄와 죽음’의 유산을 물려받을 수 밖에 없게 된 것이지요!?

여러분 뿐 아니라, 저도 매우 불만스러운 ‘대표성의 원리’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놀라운 반전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놀라운 영적 원리요,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약속하신 ‘메시야’를 보내셔서 ‘첫 사람 아담’의 대표성으로 인해 모든 인류가 죄와 사망에 빠진 것처럼, ‘마지막 아담’이 되게 하셔서 우리 모든 인류를 대표 (=대신)하여 죄를 홀로 담당함으로 그를 믿는 모든 자를 ‘죄와 죽음’에서 자유케 하시고, 아담과 비교할 수 없는 생명과 사랑의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증거하면서 바로 이 대표성을 이렇게 잘 설명하였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 15:22,45)라고 말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함으로 죽음과 저주가 임하게 되었음을 선언하실 뿐 아니라, 이렇게 그의 후손에게 임할 놀라운 구원의 소망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창. 3:15)고 말입니다.

이 <창세기 3:15>말씀은 정확히 말하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범죄하게 한 뱀 곧 사단 마귀에게 하나님께서 선언하시는 심판의 메시지인데, 이 메시지 안에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 (the woman’s seed)이라는 지칭을 함에 있어 ‘후손’을 <복수>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단수>로 말씀하심으로 장차 이 땅에 오실 메시야를 통해 뱀, 곧 사단 마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사단 마귀를 영원한 파멸과 죽음으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바로 이 말씀이 성경에 등장하는 오실 메시야에 대한 첫번째 예언의 말씀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말씀들이 선포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한가지 문제제기 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그 누구보다 모든 율법의 말씀과 여러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를 오랫동안 기다렸던 유대민족 대부분은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음으로 구원에서 제외되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몇가지 이유?에 대해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 아버지를 바로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마. 22:29) 사실 사두개인 뿐 아니라, 율법의 말씀을 가장 사랑하고 잘 지킨다고 스스로 자부심에 가득찼던 바리새인들까지 그들의 진정한 문제는 바로 주님의 말씀과 같이 ‘그들은 성경도, 하나님이 누구시며 또 그분의 능력이 어떠한지도 알지 못하고 오해했다’는데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영적 무지가 예수님을 거부하게 만든 근본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둘째, ‘세속적인 메시야를 기대한 것’입니다. 앞서도 설명했드시, 유대인들은 예수님 당시 실제적으로 철저하게 말씀에 근거하여 오실 메시야를 분별하고 확신했다기 보다는 보다 세속적인 메시야를 추구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원인은 그들이 오랜 기간동안 주위 강대국의 침략에 시달린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은 자기 민족을 구원할 메시야가 나타나면 마치 마치 그들이 자랑하는 다윗왕과 같이 강력한 나라를 일으켜 주위 열강들을 막강한 군사력과 정치력으로 제압할 정치적인 메시야로 기대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께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이 배불리 먹고 남는 표적을 보이셨을 때,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요. 6:14)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그 선지자’ (the Prophet)는 모세가 예언한 오실 메시야인 것입니다. 이들은 한때 예수님께 열광하기도 했지만, 그 이유는 단지 주님을 그들의 ‘빵문제를 해결해줄 메시야’로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셋째, ‘메시야의 십자가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무엇인줄 아십니까? 제가 바로 앞서 말씀 드린데로 주께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남자 성인만 해도 5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고도 남을 표적을 행하셨을 때, 이들이 열광하며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식하고 그들의 왕으로 삼고자 흥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아 자신이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더 자세히 설명하시면서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요. 6:51)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점점 더 분명하게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살이 찢기어지고, 그 보배로운 피를 남김없이 쏫으셔서 그를 믿는 모든 자를 구원하시기 위한 임박한 죽음을 영적으로 밝히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전까지 열광하며 주님을 따랐던 자들이 이와 같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는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요. 6:60)라고 하며 그때부터 한명 두명 주님을 떠났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야가 왜 죽어야만 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결정적 개기라고 믿습니다.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4)는 생명의 법칙과 이렇게 자신이 자원하여 생명을 버림으로 많은 생명의 열매를 거두고자 하시는 것이 메시야 되신 주님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임을 안타깝게도 유대인들은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제 저는 오늘 말씀의 핵심이 되는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것은 ‘왜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신 것인가?’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저는 그것은 ‘우리 인간의 죄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침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소리쳤듯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에서 인간의 죄를 대신 지고 하나님께 바쳐졌던 ‘희생제물’ 즉 ‘어린 양’과 같이 우리 주님은 우리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자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가 예언하듯이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살아가시면서 사람들로부터 흠모와 인기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많은 경멸과 굴욕을 받으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다윗 왕가의 후손이었지만,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33년의 험한 인생을 사셨습니다. 그분의 손은 왕궁의 귀족들처럼 부드럽지 않고, 도리어 수없는 대패질로 인해 딱딱하게 못이 박힌 손이었습니다. 그는 메마른 땅에 줄기가 나듯, 변두리 땅 나사렛에서 자라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수 있겠느냐?’ (요. 1:46)는 사람들의 편견과 멸시를 평생 받으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땅에 오신 메시야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던 것)’ (v.2)입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에서 우리가 결코 놓쳐서는 안되는 것 한가지를 나누기 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언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고자 계획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 인간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 구원할 가능성이 없어 보여서 인간의 죄로 얼룩진 역사 그 어느 땐가 하나님이 마음을 정하신 것’도 아니요, 앞서 말씀 드린데로 첫 인간부부가 하나님께 범죄하고 나서 곧바로 <창.3:15>에서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셨을 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때는 ‘창세전에’ 곧 ‘영원전부터’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이 어디에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성령의 충만을 받아 에베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자들을 구원코자 계획하신 때가 언제인지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4-5)라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계획은 영원전부터, 곧 천지가 창조되기도 전에 계획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것은 하나님은 ‘전지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이미 창조 이후에 있을 인간의 타락을 아셨다는 것이요, 그럼으로 이미 천지가 창조되기도 전에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실 놀랍고 영광스런 계획을 세워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창조되기도 전에 이미 그들의 범죄로 인해 죄의 유전을 받게 될 후손들에 대한 원대한 구원의 계획을 창조의 첫 순간부터 이미 세워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것 못지 않게 아니 더욱 더 영광스런 사실은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1:5)라고 사도 바울이 묘사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신분은 단순히 우리가 죄짓지 않는 첫 인간 아담과 하와의 상태로 돌아가는 정도가 아님을 뜻합니다. 범죄하기 전의 첫 사람 아담과 하와와 같이 <죄가 없는 완전한 상태의 인간>도 엄청난 창조물의 위치이지만, 사도가 예언한 성도의 지위,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된 우리의 위치는 첫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영광스럽다는 것이 <로이드 존스>와 같이 바울신학에 정통한 학자들의 견해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첫 사람 아담’의 신분은 ‘완전한 창조물’이라면, ‘구원받은 성도’의 신분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입니다. 이것은 생각할수록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차이입니다. 사실 오늘날 크리스챤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음을 별 뜻없이 너무 자주 사용하다 보니 잘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동일한 ‘성자 하나님’이 아니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하늘에 속한 유업을 허락하셨다는 점이 ‘첫 사람 아담’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런 신분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독생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서서 이루신 목적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의 대속 죽음을 통해 그를 믿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셔서 영원한 영광과 복락을 주님과 함께 누리게 하시는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이 시간 존귀와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다음 시간에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를 살펴보고, 적용해 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한주 후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아담’되셔서 우리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신 부활절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것일까요?’ ‘왜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던 것일까요?’ 그리고 ‘무엇이 그분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일까요?’ 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영광을 결코 소수의 크리스챤만 누리는 특권이 아님을 믿습니다.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함으로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본받고, 그분의 부활의 영광에 아름답게 동참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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